Vincere vel mori
승리하거나 죽거나
W.라파시르 (@6125janelee)
프롤로그
안대를 묵어놨는지 눈을 떠도 감아도 어두컴컴하기만 했다.손을 무언가에 팽팽하게 묶여 있었고 머리는 따끔하면서 어지러웠다.튀어오르는 잡생각 중에서 불현듯 집 근처의 골목길이 떠올랐다.거기서 둔탁하게 무언갈 때리는 소리가 나고 이후의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그 감각이 살아나자 그제서야 납치 당했다는게 실감했다.손을 당기자 손을 묵은 천은 더 쎄게 조여왔고 풀리지 않았다.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의자에 묵인 건 아니었지만 어디에 갇혀있는지 묵여있는지 알 수 없었다.그저 움직일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부드러운 촉감만 느껴졌다.
무섭게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은 곳에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신경이 곤두서서인지 단지 방문이 열렸을 뿐인데도 크게 몸이 움찔거렸다.과민반응을 보이는 내게 점점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괴기하게 울렸다.초원의 맹수에게 몰린 토끼처럼 뒤로 발버둥쳤지만 등과 벽이 서로 맞닿아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없다.겁에 질식되고 있을 때쯤 누군지 모를 이의 손이 안대를 풀어내렸다.갑자기 눈에 빛이 들어차서 따끔거리고 흐리멍덩하게 보였다.눈은 여러번 깜빡 깜빡 거리는 앞이 제대로 보였다.
"후타쿠치?"
생각지도 못한 이의 등장에 입술이 떨렸다.
"오랜만이야, 소요."
"니가 한 짓이야?"
"뭘 그렇게 매섭게 말해.우리 친구였잖아?"
자기가 좋아하던 젤리를 먹었을 때처럼 천연덕스럽게 웃는 그를 보니 구역질이 치밀었다.미간을 찌푸린 채 노려봤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오히려 후타쿠치는 능글맞게 웃으며 옛날 이야기를 꺼내며 우정을 운운했다.들을 수록 이야기보단 내 눈앞의 사람이 내가 알던 후타쿠치 켄지가 맞는지가 더 궁금해졌다.단지 다른 사람보다 장난끼가 더 많았을 뿐인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야만적인 생각을 품을 수 있는가.
"후타쿠치 정말 실망이다."
"나야말로 어떻게 네가 날 버릴 수가 있어?"
"버린게 아니란걸 알잖아!내가 네 소유물이야?내가 연애하는게 그렇게 꼴불견이냐고!"
"어.내가 그 새끼보다 나은데 대체 왜 그 새끼랑 사귀는데?"
"오이카와 씨는 너처럼 폭력적이진 않거든."
"그래봤자지.그 새끼가 나중에 태도 바꿀지 누가 알아?"
"하…너랑은 천년 동안 얘기해도 넌 안 바뀔 것 같다.이거나 풀어"
"그 새끼랑은 헤어지고 나랑 사귀는 조건으로"
"싫다면?"
"그 새끼가 어떻게 되겠지."
누가 말했던가. 말이 통하지 않는 이와 협상하지 말라고.협박 대상이 오이카와 씨가 됬을 때부터 승산은 후타쿠치에게 기울어져 있었다.그 뒤로 이어진 의미 없는 말싸움은 나를 더 깊은 수렁에 밀어넣었고 수렁의 맨 아랫바닥에 처박힌 채 후타쿠치의 말을 따랐다.안 따르면 제맘대로 내 몸을 조종해 자해하게 만들거나 자존심을 하나하나 깊게 건들였다.화가 풀리고 나면 마냥 좋다고 헤실거리는 꼴을 볼 때면 이걸 확 쓰레기통에 밀어넣고 싶다는 욕구가 꿈틀거렸다.욕구는 폭풍우처럼 몰아쳤지만 늘 호수처럼 잔잔하게 만들려 애썼다.그런 내 노력은 뻔뻔한 그의 태도에 가끔 무너지곤 했다.이건 너희의 잘못이다, 난 그저 내 복수하는 것이다.뚫린 입이라고 잘도 떠들어댔다.그가 귀에 못이 박히다 못해 못이 귀를 뚫을 정도로 늘 반복하는 건 초조함과 분노가 만들어낸 최악의 자기합리화였다.
하지만 후타쿠치는 아직 복수를 끝내지 않았다.
Vincere vel mori. 승리하거나 죽거나.
여기 저기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울렸다.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새되고 높은비명이었다.비명에 넋을 놓고 있으니 흙 먼지가 소용돌이 치며 불어왔다.눈을 뜨지도 못한 채 간신히 서 있었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빌런이 어디에 있는건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정확하게는 빌런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다른 히어로들이 외상을 남길 때 빌런의 생각을 조종해야 하는데 조종은 커녕 읽지도 못하니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사이버보그라기엔 능력치가 너무 강했고 바람이 쓸고간 흔적에는 미세하게나마 감정이 묻어져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멀뚱히 서 있는 동안 흙 먼지가 조금씩 가라앉아 내 주변에 작은 사막을 이루었다.이미 한 차례 폭풍이 치고 같지만 폭풍 전야처럼 사방이 고요했다.상황 파악이 안 되서 그저 고층 건물의 끝만 바라보며 짐작밖에 할 수 없었다.이번 사건은 힘으로 해결한 건가.별 도리없이 얼굴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있을 때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고요했던 사방에 울렸다.고개를 슬쩍 돌리니 멀리서 쿠니미가 평소랑 다르게 뛰어오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 고위 간부들 싸그리 납치 당했답니다."
숨을 채 고르기도 전에 쿠니미는 속사포처럼 말했다.그 말을 들은 순간 쿠니미의 거친 숨소리마저 아득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고위 간부의 납치.위에서 닦달할 것도 심히 걱정 됬지만 경호원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그들이 납치 됬는게 께름칙하게만 다가와서 얼굴이 심히 일그러졌다.숨을 몰아쉬던 쿠니미의 숨이 진정이 되자 쿠니미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빌런은 총합 두 명이었고 한 명은 풍력을 조절 다른 한 명은 파악 중 입니다.공중전을 벌이던 히어로들은 부상이 심각해서 병원으로 보내졌답니다.간부들은 위치 파악이 안 된답니다.정보팀에서 파악한 건 이 정도입니다만 더 조사할까요?"
"다른 빌런 능력이랑 능력치 확인은 계속 하고 전과가 있는지 조사해보고.간부들 위치는 찾으려는 시도는 해봐."
쿠니미는 덧붙일 말이라도 있는지 입을 어물거렸다.
"그런데 그 무리 중에…히나타 선배가 계셨습니다."
저도 모르게 사고 회로가 멈췄다.목이 졸리는 듯한 신음이 입 사이로 비어져 나왔다.심장이 쿵 내려앉는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때아닌 보고싶은 이의 등장에 차라리 쿠니미의 허황된 착각이길 일순 바랬지만 그의 성미답지 않은 올곧은 눈빛은 나의 생각에 반박을 넣었다.그 눈빛에 하릴없이 속으로 욕짓거리를 뇌까렸다.
하필 이런데서 히나타가.3년전에 실종된 히나타가.
Ama et fac quod vis.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하라.
잠이 아직 덕지덕지 붙어져있는 몸짓으로 기지개를 키며 거실로 너덜거리는 걸음걸이로 걸아나왔다.할 일 없이 tv나 볼까 하고 리모콘 전원을 눌렀지만 어느 채널을 돌려도 어제 사건만 나오기에 다시 원래의 검은 화면이 나오게 뒀다.여론은 고위 간부들이 사라진데 히어로의 탓이 없냐며 질타를 쏟아부을게 불 보듯 뻔했다.그리고 잘 알지도 못하는 학자 나으리들이 나와 불에다가 기름을 부을것도.
이러저러한 생각이 머리속을 헤집었다.그 중에서 가장 자기멋대로 어지른건 히나타였다.3년전만 해도 강하고 용감했던 히어로이자 같은 수색팀의 팀원이었다.어린 나이치고는 상당히 익숙한 손놀림으로 사건을 해결했고 다른 팀의 팀원들에게 조차 이쁨 받았다.그와의 추억 언저리에서 나눈 반지는 아직 내 약지에서 떠나적이 없었다.사랑을 담은 속삭임도 서로의 열기가 퍼지던 포옹도 더 이상 나눌 수 없게, 쥐도새도 모르게 향수가 향을 남기고 금방 사라지듯 사라졌다.다들 히나타가 남긴 향에 괴로워 했고 그 향에 빠져 허우적 된다고 더 깊이 향수에 빠진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히나타와의 재회가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재회가 있는 것도 몰랐고 재회만으로도 황당함, 괴로움, 미련이 한데 섞여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어지러움이 너울거렸다.
나른한 아침과 다르게 터질 듯 생각이 자꾸 튀어나오는 머리는 도통 진정이 되지않았다.마른 세수로 얼굴을 두어번 문지르고 몸을 일으켰다.잠에서 헤어나온지는 꽤 지났지만 잡생각들이 날 잡고있어 몸이 찌뿌둥한건 매한가지 였다.
뭐라도 먹어야겠다 싶어서 식빵이랑 잼을 꺼냈다.빵을 앞 뒤로 고소하게 굽고 너무 단 건 싫어서 잼을 얇게 퍼발랐다.바사삭, 소리를 내며 빵을 한 입 베어물면 딸기 잼이 부드럽게 입 안을 감쌌다.딸기씨가 리듬감있게 씹혔지만 기분은 전혀 나아지질 않았다.밥을 먹은 듯 안 먹은 듯 한 기분으로 아침 식사를 마무리했다.빵 부스러기를 쓰레기통에 밀어버린 채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 부분이 너덜거리는 셔츠를 벗어버리고 흰 셔츠를 서랍에서 꺼내 입었다.단추를 끝까지 꿰고 나서 정장 바지의 버클도 끼웠다.옷을 다 차려입었지만 어디로 가야할지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를 못했다.아무리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위급 상황에 뛰어다니는 히어로지만 우선 회사에 출근한 뒤 안내서와 명부에 이름을 적는게 우선이다.그런데 출근할 회사는 어제 본 잿더미가 된 회사로 뇌리 또렷이 박혀있다.임시로 세워둔 사무실 같은게 있지않을까 싶었다.집 안의 불을 다 끄고 가스 벨브까지 잠그고 나서야 집에서 나섰다.
바람은 손을 잘라낼 것 같이 거세게 불면서 옷 틈새 사이로 새어들어갔다.추위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찬기를 머금은 손을 주머니에 푹 찔러넣었다.회사와 가까워 질수록 보이는 사람이 줄었다.큰 사고가 났으니 일반인 통제는 당연한거지만 히나타로 인해 회사가 작살이 난건 크게 와닿지 않아서 새삼스럽게 좀 놀랐다.걸은지 몇 분이 지나지 않아 회사 쪽에 다다랐다.웅장하게 서 있던 고층의 건물 대신 가루가 되어버린 잔해 속에 임시 사무실이랍시고 세워진 천막이 난장판 속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 때마다 형태가 일그러지는 천막은 머지않아 제 구실을 못 해낼 것 같았다.잿더미 사이를 가로질러서 그런지 구두와 바지 밑 자락이 흙탕물에 담근 것처럼 흙투성이였다.불쾌감을 떠 앉고 가냘프게 휘날리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에는 이번에 회사를 부수고 고위 간부를 납치한 빌런들을 잡겠다는 이들의 목소리가 울렸다.빌러의 정보를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정보팀 테이블을 지나쳐 우리팀, 수색팀 테이블을 찾았다.인기척이 들렸는지 보드 앞에서 있는 이와이즈미와 그의 설명을 듣던 팀원들이 일제히 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마침 잘 왔네."
마침 네 이야기하고 있어으니깐 와서 앉아라, 라는 말투가 묻어다는 이와이즈미의 말에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았다.곧바로 이와이즈미는 멈춘 말을 다시 시작했다.앞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프린트물을 펼치는 히나타에 대한 프로필이 상세하게 적혀있었다.붉은 글씨로 적혀있는 ' 행방불명 ' 을 보자 납이라도 삼킨 것처럼 몸이 무거워졌다.차마 두 눈으로 계속 볼 수가 없어서 프린트를 덥고 고개를 꼿꼿이 세워 들어올렸다.그렇다한들 회의 중간 중간에 히나타라는 이름이 귀에 박힐 때마다 몸이 뒤틀리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보고서를 보니 빌런의 생각이 읽히지 않았다, 라 적어놨던데 안드로이드도 있었어?"
"아니, 안드로이드는 아냐."
"히나타라는 느낌은 못 받았고?"
"히나타라는 느낌 받았으면 내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겠냐?"
아니꼬운듯한 말이 거칠게 나갔다.전혀 그럴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누가 들어도 화가 묻어나는 어조였다.킨다이치랑 야하바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채 눈을 뻐끔거렸고 하나마키랑 마츠카와는 착잡한 듯 입꼬리를 유지시키려 애썼다.팀원들의 그런 반응에 입에 제갈이라도 물린 듯 굳게 닫혔다.속내로 나에게 왜 그랬냐 따지고 싶었지만 충동적이다, 이외에의 변명거리 밖에 없었다.사람들이 면목이 없을 때 으레 그러듯 바닥 쳐다보았다.이와이즈미는 내 눈길만큼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분위기를 이어 설명을 계속해나갔다.
"일단 모인 정보로 그들의 본거지를 찾아내는데 선동이 우리 수색팀이다.정보팀에서 자그마한 흔적이라도 찾아내면 그걸로 본거지를 찾아내면 된다.정보팀에서 큰 통지는 없으니 휴식을 취해도 좋지만 임시 거처지에서 멀리 떨어지지말것.해산."
강단있고 명료한 이와이즈미의 정리로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도 커피나 한 잔 마실 생각으로 일어났지만 잠깐만이라고도 말할 틈도 없이 강압적인 이와이즈미의 손에 막무가내로 이끌려 천막 밖 뒤 공터로 나갔다.불만을 입 밖으로 내뱉기도 전에 이와이즈미가 말을 꺼냈다.
"힘들면 특별 케이스로 바줄테니깐 일찍 퇴근해도 좋아."
"됐어.괜찮아."
"회의 중에 히나타 얘기할 때마다 움찔거리는 거 눈치 못 챌 줄 알았냐?이럴까봐 일부러 안 불렀는데 꾸역꾸역 나와서 마음고생하지말고 일찍 들어가."
"…"
"가끔 오가는 걸 보고 일말 같이했던 나도 개가 이렇게 나타났다는 거에 큰 충격 먹었는데 히나타 좋아했고 사랑했던 넌 지금 얼마나 힘든지 짐작이 안가."
"이와이즈미 난 진짜…"
괜찮다, 라 말해야 하는데 목에 무언가 응어리 져서 그 말이 나오지 못했다.대신 눈가에 점점 열이 올라 붉어지더니 그 자리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괴로움이 퍼지듯이 삽시간에 눈물이 볼을, 입가를, 옷깃을 적셨다.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찍어누르듯 닦아도 마르지 않았다.끝끝내 참아왔던 눈물이 북바처오르니 멈출 줄을 몰랐다.끅끅 거리며 참아보아도 짙은 설움이 다시 치고 올라올 뿐이었다.
이와이즈미 아무 말 않고 어깨를 부드럽게 두어번 토닥여주었다.괴로움으로 거칠어 졌던 호흡이 조금씩 가라앉으니 이와이즈미가 계속 다독여주며 집으로 들어가라고 권유했다.아까 괜찮다고 말하지 못하고 펑펑 울어버려서 더 이상 남아있겠다고 억지 부릴 힘이 없었던 나는 힘이 빠져 버린 채 갈 수밖에 없었다.
Dum spiro spero. 살아있는 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
집에 도착하자 눈 앞의 광경에 안 그래도 수척해진 온 몸이 올이 풀린 수건처럼 찢어질 것만 같았다.다리 힘이 풀린건지 상대가 밀착하여 밀어붙인 탓인지 다리가 맥 없이 접혀들었다.입 밖으로 신음 소리조차 내뱉을 수 없을 정도 패닉이 강하게 날 치고갔다.현관문에서는 날 기다렸다는 듯이 서 있는 갈색 머리의 사람이, 그의 어깨 너머로 익숙한 오렌지빛 머리의 뒤통수가 보였다.갈색의 머리의 사람은 십 몇분 전 프린트물에서 봤던 사람을 붙여놓기라도 한듯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었다.
날 떠나고 있는 정신의 발목이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혼신의 힘을 짜내 정신줄을 붙들었다.차분히 여길 빠져나갈 궁리를 해봤지만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고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했다.아니면 그를 때리고 방심한 틈을 타 째빨리 빠져나가는 건?눈치를 살피다 주먹을 들어올리라고 뇌가 명령했지만 움직이려고 하니 무거운게 날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입으로 욕지기가 터져나오려 했지만 혀 조차도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낭패한 기색을 비추자 그 사람, 아마 후타쿠치는 냉소적인 웃음을 날 비웃듯 흘렸다.
"안 움직여 지니까 많이 당황스러우신가?"
"…"
"노려보면 뭐가 바뀌는 것도 아니니깐 그렇게 노려보지마-."
"니 능력으로는 안 되겠지만 충고는 해줄께.생각을 안 읽으려 하는게 좋을거야."
"읽으면 어떻게 할건데"
"궁금하면 한 번 해보시든가"
그의 말대로 그의 생각이 읽어지지 않아 적잖이 놀랐지만 아까의 충격의 여파 때문이라 넘겨 짚으며 그러려니 했다.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특별한 능력이 있으면 안 읽어지단거나 그 날 컨디션들.내가 가진 능력은 다른 이들의 능력보다는 쓸만 하지만 육체적, 신체적 관리를 조금더 신경써야 하는게 까다로웠다.늘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는게 습관이 되어 몸에 베였지만 어제는 견뎌내기도 힘들어서 능력 같은 건 전혀 신경쓰지 않은 탓에 이 사단이 났다.
살의를 대놓고 흘리는 상대의 미소에 증오스럽다는 눈빛으로 부라리듯 올려다봤지만 상대는 마치 어린아이의 장난을 보는듯이 끔찍하게 빙긋 눈 웃음을 지어보였다.헛웃음을 내뱉자 그는 언제까지 앉아 있을꺼냐며 검은색 장갑낀 손을 내밀었지만 뿌리치고 스스로 일어났다.뒤에서 그가 호오 하면서 놀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몸은 자연스레 히나타의 앞에 섰다.후드모자를 뒤집어 쓴 그에게 말을 걸었다.
"히나타"
"오이카와 씨"
부름에 답하기도 전에 옆구리에서 고통이 밀려들어왔다.놀란 토끼 눈으로 옆구리를 내려다보니 히나타가 잽싸게 찔러넣은 단검이 옆구리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머리 속에는 히나타가 나한테 왜?라는 질문이 먼저 떠올랐지만 낮게 욕짓거리를 내뱉으며 단검을 비틀어 옆구리에서 빼냈다.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몸서리가 났지만 입술을 앞니로 짓눌러 신음이 새 나오는 걸 막았다.피가 새어나오는 옷자락을 움켜지며 현관에서 아무렇지 않게 유유히 걸어나오는 후타쿠치를 노려보았다.
"내 능력이 뭔지 모르나봐?"
"…"
"너랑 비슷하지만 다르지.네가 조종할 수 있는게 정신이라면 난 그게 몸일 뿐이야."
"그걸로 히나타를 조종한거고?"
"머리는 아직 살아있나보네.히나타는 한 번 조종에 성공하면 그 뒤엔 쉽지만 그 한 번이 어렵더라구"
"히나타한테 왜 그래?"
"내 인생을 나락으로 차버린 세상에 복수하기 위해 필요했거든."
"그게 이유가 된다고…"
"할 말은 나중에 해.아직 내 말 안 끝났어."
내 말을 거침없이 싹둑 자르고선 아까 같은 살기를 풍겼다.나를 넘어뜨리곤 움직이지 못하게 벽으로 밀어붙이며 부담스러울 정도로 얼굴을 들이댔다.그를 내팽겨칠까 싶었지만 어차피 그의 능력이라면 더 모질게 제압할 수 있다는 걸 알아 일단 묵묵히 그가 이어나가는 말을 들었다.
"난 어릴 때부터 찢어지게 가난했지.부모님 잘 만나서 평평한 길만 걸으면서 순탄하게 살아온 너랑은 다르게 받쳐줄 부모도 없고 가진거라곤 다른 사람보다 좋은 능력 밖에 없어.좋은 능력이 있으면 뭐해.사관학교 갈 돈도 없고 날이 어둑해지면 깡패들한테 쳐 맞기나 하는 무능한 아버지가 다야.게다가 그 정신나간 아버지는 상황도 뭣 같은데 정부가 빈부격차 줄여보겠다고 주는 쥐꼬리만한 돈으로 학교를 보냈어.자기 빚 갚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그렇다고 내가 그 학교를 가면 뭐해?돈 없다고 다른 애들한테 놀림 받는데.개들한테 한 복수는 시험 때 일등을 차지한 게 끝이야.내가 졸업하니 아버지도 인생을 졸업했지.밤새 맟다가 죽은거야.경찰에 신고해도 입도 벙긋 안 하더라.그래서 내가 ' 사는 곳은 억울하게 죽어도 아무도 관심 같지 않겠구나 ' 라고 생각해서 유치하게도 그걸 바꾸자고 대학교에 들어갔어.들어가서 처음 만난게 누구게?히나타야.솔직히 첫인상은 시끄러워었어.그래도 계속 따라다니는 걸 말리기 귀찮아서 알아서 떨어져나가겠지라고 생각하고 나뒀지.근데 내가 단단히 오해했던거지.내가 개를 귀찮아한다고.하루는 히나타가 아파서 못 나왔는데 너무 허전한거야.그 뒤는 뻔하지.그 다음 날부터 같이 다니고 덕분에 다른 친구들도 생기고 사회 생활에 그럭저럭 적응해 나갔어.나한테 계속 할 수 있다라고 말해주고 히어로소속 시험도 합격하게 도와준것도 모두 히나타야.내 인생이라는 선로에는 기차 하나 밖에 없으니 내 마음은 개한테 향했지.고백한 날짜만 기다리다 다른 사람이 데려갔어.그래도 계속 친구일거라고 생각했어.나혼자서 줄곧.난 이제 개의 선로에서 기동을 멈춘 기차 중 하나 일 뿐이었어.난 그게 싫었고 개가 완전히 다른 사람과 함께하기 전에 데려갔지."
"…"
"이건 말하고 너한테도, 세상한테도 내가 느낀 고통을 다시 느끼게 하고 싶었어."
"…"
"오이카와 너만 없었다면 애초에 이런 일도 없었을 거라고."
귓 가에 숨결이 닿을 정도 귀에 속삭였다.어조는 부드러웠지만 등에 한기가 곤두섰다.희열을 띤 후타쿠치의 얼굴.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본 전부였다.
Amor vincit omnia.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겨낸다.
에필로그
"이와이즈미 선배 후타쿠치 유년기 조사 자료 나왔어요."
모니터에 후타쿠치의 어두운 유년기를 담아낸 텍스트로 가득 차 있었다.내 부름에 고개를 끄덕이시며 모니터 앞에 서서 찬찬히 텍스트의 내용을 훑어보셨다.처음에는 눈을 가늘게 뜨시더니 점점 크게 뜨셨다.마지막 스크롤까지 다 확인하자 만족스러웠는지 두어번 어깨를 토닥여주셨다.킨다이치라면 빙긋 웃으면 칭찬 받아 기쁘다는 걸 숨기질 못했겠지만 난 그냥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진짜 선배 말대로 가난하다가 명문대갔네요."
"그런 케이스가 종종 있어.그리고 이 녀석 히나타 동기니깐 사심 있었을지 모르지."
"그래서 히나타 선배를 납치해서… 이렇게 된거네요."
적절한 언어가 떠오르지 않아 뒷말은 웅얼거리며 묻어버렸다.고위 간부의 실종에 연이은 선배의 죽음.몸에 있는 칼에 찔린 상처말고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사건 현장과 그 곳에서 창백하게 누워있는 선배의 모습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가끔은 재수없게 보이는 선배이긴 해도 유능한 선배였고 일할 때는 의지할 수 있는 선배였다.선배의 빈자리는 공허함으로 다가왔다.
대타도 없고 치울 시간도 없다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팀원 중 아무도 그의 자리를 치우지 않았다.흔적은 있지만 정작 그가 없는 자리는 오이카와 선배가 없다는 걸 상기시켜주었다.그걸 보는 팀원들도 나도 겉으로 다들 착실히 일하고 있지만 동료가 곁을 떠났다는 것의 쓴맛을 베어내고 있었다.레몬 같기도 하고 설 익은 감처럼 떫기도 한 쓴맛이 가시지 않았다.
Ab imo pectore.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