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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W.말로 (@mallo_HQ)

 "히나타, 오늘도 그 선배랑 밥 먹어?"

 "응, 먼저 가볼게! 다음 수업에서 보자!"

 테루시마가 기다릴까 봐 동기에게 미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어서 다리를 움직인다. 과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은 분명 뜀박질 때문은 아닐 거다. 테루시마 유우지. 그 어렵다는 경제학과에서 무려 과톱을 하면서도 노랗게 탈색한 머리와 혀의 피어싱 때문에 간혹 양아치로 오해받는다는, 성격 좋은 선배. 히나타가 다니는 대학에서는 다른 과더라도 테루시마만은 모두 안다. 그에 비해 히나타는 그저 흔한 마케팅 전공의 신입생. 학년도 두 학년이나 차이 나고 과마저 다르지만, 테루시마와 히나타는 최근 매일 같이 밥을 먹고 있다.

 

 "선배, 늦어서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헉, 심지어 내가 수업 들은 빌딩 근처에서 보시자고 하셨구나. 달려온 후에야 테루시마의 수업은 캠퍼스 반대편이었다는 걸 기억해낸다.

 "아니야, 나도 금방 도착했어!"

 거짓말. 보나 마나 10분 이상은 기다렸을 거다. 히나타는 단 한 번도 테루시마가 약속 시각을 어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서 들어가요, 늦었으니 제가 살게요!"

 등을 떠미는 히나타의 작은 두 손은 실질적으로 큰 힘을 내지는 못하지만, 못 이기는 척 테루시마가 앞서 들어간다. 언제나처럼 계산은 제가 할 예정이지만.

 "오늘 수업은 어땠어?"

 "외계어예요!!!"

 "방금 들은 게 경제수학이지?"

 "네!! 제가 왜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니 알겠는데 이건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어요! 전 마케팅 전공인데 갑자기 매트릭스다 뭐다 막 처음 듣는 영어 단어들이 슉 나오는데 그럼 교수님을 그걸로 콰광 뭘 하시는데 그럼 전 막 와- 하면서 쳐다보면 수업이 끝나요!"

 설명마저 참 히나타다워 테루시마는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누른다.

 "도와줄까?"

 "아녜요-!! 어떻게 감히 선배의 시간을 뺐어요!"

 그리고 어차피 츠키시마가 도와줘요. 뭐, 바보냐고 놀리기는 하지만요. 덧붙이는 말이 영 거슬린다.

 "나한테 물어봐도 되는데! 다 잊기 전에 나도 복습해야 해!"

 "으아아 아니에요! 민폐를 끼칠 수는 없죠!"
 

 결국 히나타의 거절을 끝으로 음식이 나와버려 일단 먹기에 집중한다. 정말 복스럽게 잘 먹어. 원래는 음식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지만 히나타를 알게 된 이후에는 대학 다닌 후 처음으로 주변 맛집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미식가로 소문난 동기들에게 물어보면 가르쳐 주면서도 항상 질문들이 따라왔다. 왜, 애인이라도 생겼어? 그럴 때마다 테루시마는 자기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웃곤 했다. 부모님께서 용돈을 넉넉히 주시는 편이긴 했지만, 히나타와 테루시마는 일단 기본이 4인분부터 시작했기에,  테루시마는 틈틈이 고액과외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지금처럼 히나타가 맛있는 걸 정말 맛있어하며 먹을 때가 가장 즐겁다.


 

-


 

 돌이켜보면 이 이상하다면 이상한 조합은 우연이라는 단어로도 부족할 만큼 운이 좋게 만났다. 나이 먹어서 다른 과 술자리에 끼면 꼰대 소리 듣는다며 한사코 거절하던 테루시마를 친구들이 억지로 끌고 들어와 앉혔었다. 얘들아, 얘가 경제학 과톱 테루시마 유우지야. 우리 과랑 경제학과는 겹치는 수업 많으니까 얘한테 물어봐도 대답 잘해줄 거야. 테루시마는 부끄럼을 잘 타는 성격이 아닌데도 그 순간만큼은 귀 끝이 빨개졌다. 그렇게 어색한 소개만 하고 떠나버린 동기가 원망스러웠지만, 테루시마가 누군가. 인생도, 학업도, 동아리도, 모두 즐기는 것. 기왕 이렇게 된 김에 평소처럼 즐기자는 생각으로 분위기를 띄우니 어색했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르륵 녹았다.

 "저는 히나타 쇼요, 신입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히나타는 처음부터 눈에 띄었다. 남들보다 작은 체구, 누가 봐도 긴장한 얼굴, 속이 안 좋은지 가끔 화장실로 뛰어가던 작은 소년. 옆에 히나타의 친구가 설명하길 새로운 환경이 낯설어서 이렇지 원래는 매우 밝은 아이라고 했다. 이름이랑 잘 어울리네. 속을 게우고 온 아이는 친구랑 몇 번 얘기하더니 드디어 긴장이 좀 풀렸는지 주위 사람들과 얘기를 시작했는데, 테루시마도 탁월한 사교성으로 주위에 사람이 끊기지 않았지만 히나타 같은 사람은 또 처음 봤다. 누가 말하면 완벽히 경청하고, 풍부한 반응에 이어 누구든 가장 듣고 싶어 했을, 아니, 듣기 전에는 듣고 싶었는지도 몰랐으나 듣고 나면 잊을 수 없을 말들을 하는 것이 딱 천성이다. 이건 어떻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배려가 몸에 밴, 주위를 따스하게 만드는 사람. 빛나는 눈동자와 웃는 입이 저를 향할 때 테루시마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사랑이구나.

 테루시마의 이상형은 항상 섹시한 사람이었는데, 그 이후로 이상형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됐다.




 

 그날 어떻게 하다 보니 번호까지 받아내 이런저런 핑계로 불러내다가, 이젠 자연스럽게 별일 없으면 같이 밥을 먹는 관계까지로 발전했다. 히나타가 워낙 인사이더라 약속이 많긴 했지만, 그런 날은 테루시마도 다른 사람들과 밥을 먹고, 적어도 일주일에 3번은 점심을 먹는 사이. 그동안 테루시마가 알아낸 사실들이 있다면 히나타를 고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을 좋아하며, 회사와 소비자가 소통하는 방법이라 생각하니 너무 멋지다고 생각하여 마케팅 전공을 턱걸이로 들어왔는데 막상 오니 경제학과 수학이 너무 많아 괴로워하는 중이고, 여동생을 매우 사랑하며, 의성어를 많이 쓴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더 귀엽고, 사랑스럽고, 웃는 것이 예쁘다.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선배!"

 매번 얻어먹어 미안하다며 아무리 거절해도 결국 카페에 앉혀 테루시마가 좋아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달콤한 케이크까지 당당히 주문하고 왔다. 저번 주에 자취가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든다고 괴로워하던 애가 이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히나타를 말릴 길이 없다. 히나타에 대해 배운 다른 점 중 하나는, 남들을 존중하고 유한 성격이지만 자신이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해낸다는 점이다. 히나타가 음료를 들고 돌아오자 고맙다고 말하며 가장 자신 있는 미소를 지으니 약간 붉어지는 볼이 착각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


 

 와, 진짜 섹시하다.

 히나타는 생각이 표정이 다 드러나는 편임을 자신도 잘 알기에, 최대한 테루시마가 하는 얘기를 다 들으며 평소와 같은 반응을 하려고 노력 중이다. 하지만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뿐이다. 얘기하며 보이는 혀에 있는 피어싱이, 오늘도 멋지게 스타일링 된 머리가, 그래도 경제학은 재밌는 면도 많다고 웃는 눈과 입에서 나오는 실력 있는 자의 여유로운 자신감마저 모두 지나치게 섹시하다. 첫 술자리에서부터 피어싱은 섹시하다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잘 주지 않던 전화번호도 홀린 듯이 건네버렸다. 히나타 앞에서는 단 한 번도 피지 않았지만, 가끔 학교 건물 뒤편에서 보이는 담배 피우던 모습이나, 동기가 발표의 정석으로 유명하다며 보여준 테루시마의 발표하는 영상, 그리고 모든 일을 즐기는 걸 보며 처음엔 호감이었던 것이 그다음에는 존경, 이제는 연모까지 와버렸다. 매번 도와달라는 것이 미안하여 정말 어려운 문제들만 물어봤지만, 테루시마는 단 한 번도 귀찮다고 했던 적이 없었다. 도리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집중한 이후 히나타가 이해할 때까지 몇 번이고 설명해주는 친절함과 상냥함을 내비쳤다. 이래서 동기들이 연상을 사귀는 건가.

 "히나타, 듣고 있어?"

 "네!!!"

 아차, 너무 기합이 들어가 버렸다. 강한 긍정은 부정이라고 츠키시마가 그랬는데. 얼굴이 창피함으로 화르르 달아오른다.

 "히나타 많이 피곤해? 커피 하나 더 사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잠깐 세수 좀 하고 올게요!"

 중간고사 기간이라 피곤한가 보다. 테루시마는 그날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히나타가 듣는 수업들의 족보를 찾아봤다.


 

-



 

 이건 진짜 아니야, 이건 정말 아니야.

 중간고사부터 망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온다. 히나타는 소통하고 싶어서 마케팅으로 왔는데, 처음 2년은 웬걸 끊임없이 경제학만 듣는다. 세상에. 이럴 줄 알았으면 이 과 안 왔을 텐데. 하지만 제가 만든 선전이 티비에 나오는 생각은 언제 해도 짜릿하다. 소비자가 간지러워하는 부분을 긁어주는 제품을 널리 알려야지! 이런 순수한 생각으로 들어온 과인데. 마음을 굳게 다잡아보려고 해도 50점도 못 넘겼을 거로 생각하니 속상해져 터덜터덜 기숙사로 돌아가는 등이 평소보다도 작아 보인다. 오죽 안쓰러우면 지나가던 동기들이 힘내라며 주전부리라도 쥐여준다.

 선배가 노트까지 줬는데.

 족보도 모자라 돈 주고도 못 구한다는 테루사마의 비법 노트까지 받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히나타는 외우는 데는 재능이 없었다. 운동하면서 읽으면 어떤 원리로 더 잘 외워진다는 동기의 말에 오오오-!! 나를 위한 비법이네! 이러며 러닝머신을 하면서 외우다가 살만 2킬로 빠졌고, 물구나무를 서서 읽어봐도 머리만 아프지 들어오지를 않았다. 고등학교 친구인 카게야마가 봤으면 보게-! 뭐하냐! 싶었을 만큼 같은 공식을 몇백 번 받아 적어도 응용해서 풀어보라고 하면 눈앞이 새하얘지고 배가 뒤틀렸다. 수학은 나랑 정말 안 맞아. 째째시마는 잘만 풀던데. 얄미운 친우는 천성이 이과면서 같이 마케팅을 전공하며 양민학살을 하는 중이었다. 보자마자 이해하는 사기캐 같으니라고. 물어보면 유인원은 이런 거 못 푸나 보지? 하는 표정에 입맛이 뚝 떨어져 다음부터는 차라리 교과서를 씹어먹을 기세로 쳐다봤다. 그래, 이해가 안 되면 통째로 외워버리자! 만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한 페이지 본 이후에 씹어먹는 것도 해봤지만, 종이가 너무 맛이 없어서 포기했다. 애꿎은 펜만 질겅질겅 씹으며 시험지를 쳐다봤지만 아무리 봐도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니, 내 점수는 낙제구나. 시험을 다시 생각하니 갑자기 하늘이 잿빛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히나타, 왜 이리 시무룩해?"

 차가운 음료를 건네주는 손을 따라 시선을 올려보니 조금 전까지 생각하던 테루시마 선배다.

 "선배-!!!!! 죄송해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미안해!!!!"

 90도로 숙이며 죄송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히나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못한 것이 없다. 아니, 도리어 어린 후배를 매일 보고 싶어하는 제가 더 잘못한 것 같아 히나타를 따라 90도 사과하니 히나타가 깜짝 놀라며 펄쩍 뛴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선배! 제가! 죄송해요!"

 "아니야 히나타! 내가 미안해!"

 주위에서 봤다면 너네 뭐하냐고 한마디 했을 법하다. 이러다가 끝이 없을까 봐 테루시마가 먼저 끊는다.

 "그래서 우리 히나타는 도대체 뭐가 미안한데?"

 헉, 우리 히나타래. 순간 심장이 잠깐 이상하게 뛴 것 같지만, 일단 사과부터 해야 한다.

 "시험을 망쳤어요!!"

 "그럴 수 있지!"

 너무 활짝 웃으며 대답하니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잠깐만, 아니지, 이게 아닌데!

 "하지만 선배가 노트도 주시고 질문도 답해주시고 정말 많이 도와주셨는데- 죄송합니다!"

 "내 노트와 설명이 부족했네! 미안해!"

 "선배가 왜 사과를 하세요!"

 "그러는 너는 왜 사과하는데?"

 "그거야- 선배가 도와주셨는데 제가 시험을 망쳤으니까요!"

 급기야 울먹거리기 시작하는 히나타를 보니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운 것이, 교수님 정강이를 차면 끌려갈까 같은 어이없는 고민까지 하기 시작한다.

 "히나타, 너무 걱정하지 마. 어차피 상대평가니 평균이 중요한 거고, 시험 하나 망친다고 세상 안 망해! 기말고사도 아닌 중간고사고, 설령 기말고사더라도 망치면 뭐 어때? 히나타가 필요한 내용을 배우는 게 중요한 거야. 배우려고 온 대학인데, 배우는 것이 중요한 거지! 시험 점수는 숫자일 뿐이니까 너무 마음에 담지 마."

 테루시마 선배는 천사입니까.

 밝게 웃는 다정한 목소리엔 동정이 없이 순수한 진심만이 담겨 있어 테루시마가 평소에도 그렇게 생각함을 히나타는 느낀다. '즐기자.' 테루시마가 항상 입에 붙이고 사는 말인데, 그게 이렇게도 쓰일 줄이야. 테루시마상에게 공부는 정말 즐기는 것이구나. 히나타는 순간 테루시마가 빛난다는 착각까지 한다. 좋아하는 과목을 배우고, 더 알아가는 것이 즐겁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시험 성적도 숫자일 뿐이고, 배우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겠지. 문득 테루시마의 노트가 생각난다. 깔끔히 정리된 노트는 모든 챕터의 끝에 최근 뉴스에 나온 실제 사례들이 적혀있고, 실생활에 이론이 어떻게 쓰이는지까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을 텐데 스스로 적어놓은 노트가 빼곡하다. 테루시마상은 정말 즐겁게 공부하시는구나. 나도 언젠가 그럴 수 있을까. 부러움과 동경심이 섞인 상태로 멍하니 쳐다보자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준다.

 "히나타, 시험 모두 끝났어?"

 "중간고사는요!"

 "그럼 술 마실까?"

 "선배도 다 끝나셨어요?"

 "응! 시험 끝난 기념으로 사줄게!"

 실은 하나 남았지만.

 "아니에요! 오늘은 제가 살 거예요!"

 "선배가 사주면 좋겠다고? 알았어!"

 원래 1학년 때 많이 얻어먹고 다녀야 한다며 카드를 꺼내 보이는 테루시마를 누가 말릴 수 있을까. 끝내 들어간 곳은 시험이 끝났으면 역시 배에 기름칠을 해주며 기력을 채워야 한다는 테루시마가 적극 추천한 양꼬치 집이다. 수다를 떨면서도 손은 능숙하게 양꼬치를 굽고 잘 익은 것들부터 히나타 앞에 하나씩 놔준다. 은근 술을 잘 마시는 히나타와 주당으로 소문난 테루시마 앞에는 양꼬치 스틱도 맥주병도 하나둘씩 쌓여간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테루시마도 히나타도 즐겁다. 재밌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모르겠지만 둘 다 웃음이 끊기지를 않고, 얼굴만 봐도 미소가 퍼진다.

 "히나타."

 "네, 선배."

 "언제까지 선배라고 할 거야?"

 "으음- 영원히요-!"

 "난 요비스테 하고 싶은데."

 "선배는 하세요!"

 "그럼 나는 쇼요라 부르는데 쇼요는 아직도 존댓말에 선배- 선배- 우리 그것보다는 친하잖아!"

 과장하며 슬픈 표정을 짓는 테루시마를 보며 빵 터진 히나타는 뒤늦게야 테루시마가 은근슬쩍 이름을 불렀다는 걸 깨닫고 붉어지려는 얼굴을 진정시키려 괜스레 술을 한 모금 더 마신다.

 "하지만 선배 맞잖아요-!"

 "그럼 나도 후배님이라 부를 거야!"

 "그게 뭐예요!"

 "쇼요 따라 해 봐, 유우지 형-"

 "엣-"

 히나타가 당황하자 유우지 형- 섹시한 얼굴을 제대로 써먹으며 천천히 한 번 더 말하는 건 얄밉지만 잘생겼다. 얼굴 천재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인가.

 "유우지 형!"

 창피함에 목소리가 좀 커져서 주위 사람들이 돌아보자 바로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잘 익은 사과처럼 된 얼굴을 푹 숙인다. 귀여워, 이렇게 귀여워서 어쩌면 좋지.

 "쇼요."

 "왜요, 형?"

 호칭까지 바꿨어. 뿌듯함에 웃음이 온 얼굴을 가득 채운다.

 "우리 사귈래?"

 취중고백이지만 둘 다 이 정도로는 기분이 좋을 뿐, 취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그리고 히나타도, 지금 하는 대답이 술이 없어도 같을 거라는 것을 안다.

 "먼저 고백해줘서 고마워요, 유우지 형."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고 하던가. 벚꽃을 봐도 실감 나지 않았던 봄에 태양이 내려앉아 온기를 선사한다.


 

-


 

 "쇼요, 정말 배구 많이 안 해본 것 맞아?"

 "네! 재밌어요!"

 예전 추억을 되살릴 겸 죠젠지 동기들과 함께 2:2 배구를 하기로 했는데, 히나타가 궁금하다며 따라와 결국 같이하게 됐다. 그런데 웬걸. 학교 체육 시간 이후 처음 해본다면서 공은 집요하게 따라가고, 눈이 잘 보이는 건지 어설프게 보낸 공도 떠있기만 하면 치고, 집중력도 어지간한 선수 저리 가라다. 이쯤 되면 키워보고 싶을 정도인데. 탄탄한 실력을 베이스로 즐기는 것이 목표인 죠젠지 졸업생들답게 다들 날아다니듯이 배구공을 코트 한편에서 저편으로 보냈고, 히나타도 그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배구를 즐긴다. 기분 좋게 2:2 연습을 마친 후 옷을 갈아입으러 같이 탈의실로 들어간다. 히나타는 괜스레 부끄러워 구석에서 혼자 옷을 벗는데, 굳이 옆에서 옷을 벗는 테루시마의 등에 저절로 눈길이 간다.

 

 와, 우와, 와...

 입을 벌리고 쳐다볼 만큼 아름다운 몸이다. 균형 잡힌 등 근육과 복근. 과하지도 않고 딱 적당하여 다른 의미로 조각상 같다. 멋지다, 예쁘다는 말보다도 아름답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몸의 오른쪽 날개뼈에는 날개 모양의 타투가 있다. 굵은 선과 얇은 선들이 만들어내는, 분명 멈춰있지만, 역동적인 타투. 저런 문양을, 그, 뭐지, 최근에 친구가 타투 도안을 뒤적거리다 이런 스타일로 하고 싶다며 내밀었던 기억이 어슴푸레 난다. 맞아, 트라이벌 타투라고 했어. 테루시마가 옷을 벗고 입느라 어깨를 움직일 때마다 따라 움직이는 타투는 정말 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누가 그랬더라, 배구는 항상 위를 보는 스포츠라고. 테루시마에게 참 잘 어울리는 스포츠, 그리고 저 날개와도 찰떡궁합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해볼까.

 배구도 타투도 흥미가 생긴다.


 

-


 

 "쇼요, 정말 괜찮겠어?"

 "네! 할 수 있어요!"

 아플 텐데. 약간 떨고 있는 히나타의 손을 꼭 잡고 찾아온 곳은 타투샵이다. 히나타와 테루시마가 고르고 고른 디자인은 테루시마처럼 트라이벌 타투지만 날개 대신에 새다. 조금 추상적인 모습에 정확히 어떤 새인지는 처음엔 알 수 없지만, 히나타는 까마귀라고 한다. 많은 새 중에 왜 까마귀느냐고 물어보니 돌아오는 대답은 간단하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정말 받으시겠어요?"

 "네! 해주세요!"

 씩씩하게 대답하는 걸 보자니 칭찬과 함께 입에 간식이라도 물려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타투는 한 번 하면 지우는 것은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시간도 오래 걸려,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이 가게는 시술 전에 꼭 세 번을 물어본다. 당당히 대답하는 히나타의 올곧은 눈빛을 보자 고개를 끄덕이며 타투이스트가 도안을 다시 한번 살핀다.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눈물이 찔끔 나는 걸 꾹 삼키며 히나타는 이거 두 번은 못하겠다고 생각하며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 애꿎은 입술만 괴롭힌다. 옆에서 지켜보는 테루시마가 안쓰러워 반대쪽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타투 디자인이 망가질 수도 있으니 이쪽은 죄 없는 손톱만 깨물고 앉아있다. 시간이 이렇게 느렸었나? 하나에 집중하면 시간이 사라져 버린다고 느끼는 히나타마저 고통 앞에서는 시간의 상대성을 뼈저리게 느낀다. 날개뼈 부분은 덜 아프다고 들었는데, 다 거짓말이야! 크기는 히나타의 작은 손바닥만 하지만, 도안이 꽤 정교해 3시간은 족히 걸릴 거라고 했던 테루시마의 말이 적중한다. 바늘이 살갗을 뚫는 느낌은 보통 예방주사 맞을 때밖에 느낄 일이 없었고, 그것마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기에 이건 히나타에겐 새로운 아픔이자 고통이다. 하지만 항상 웃는 테루시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며 이빨이 상하기라도 할까 봐 민트나 사탕을 건네주는 다정함으로 버틸만하다. 오렌지 사탕을 혀로 굴리며 소소한 얘기를 나누는 것으로 긴장을 조금씩 풀자 처음보다는 덜 아프다. 그래도 바늘이 찌르는 느낌은 아직도 익숙하지 않지만. 지나갈 듯 지나가지 않던 시간에 히나타도, 타투이스트도, 지켜보는 테루시마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다 됐어요."

 편하게 볼 수 있게 자리를 비켜주자 여기저기 있는 거울에 왼쪽 날개뼈에 새겨진 까마귀가 비친다. 뻐근한 어깨를 풀어주니 날갯짓을 시작한다. 도움닫기. 테루시마를 따라 하던 배구에 속절없이 빠지기 시작한 히나타는 최근 도움닫기가 인공의 날개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키가 작더라도, 진지하게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더라도 침착하게 도움닫기를 하고 날아오르면 코트의 반대편이 보인다. 그럴 때마다 뛰는 심장은 살아있음을 느끼도록 온몸에 피를 가득 불어넣어 주고, 다시 날 준비를 하도록 도와준다.

 나는 날 수 있어.

 테루시마처럼 즐기려면 배구도, 공부도, 강해야 한다. 여기서 강함은 결과만 두고 얘기하는 것이 아닌, 과정을 말한다. 테루시마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구보다 많이 연습하고, 공부하는 것을, 즐겁지 않은 과정도 열정이 있기에 참아가며 날아오르는 걸 옆에서 지켜봤다. 슬럼프가 오면은 이 과정은 도움닫기라고 하는 것 또한 지켜봤다. 대단한 사람, 닮고 싶은 사람. 히나타는 테루시마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기에, 그리고 둘의 관계와 상관없이 그 존경심은 늘 있을 것을 알기에, 히나타도 동경과 애정을 담아 이 도안을 택했다. 후회는 없다.


 

-


 

 "히나타, 고생했어! 많이 먹어!!"

 축하의 의미로 테루시마가 히나타가 가장 좋아하는 고기를 구워주는데, 장소는 평소의 대학 캠퍼스가 아닌 탁 트인 바다가 보이는 게스트 하우스다. 예약하길 잘했다. 종강한 지 얼마 안 됐고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라, 바다에도 주변 도로에도 사람이 북적북적하다. 더 한산한 곳으로 알아볼까 싶었지만, 히나타가 타투를 받은 직후 장거리 이동은 피곤할까 봐 결국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예매했다.

 고기가 노릇노릇 익자 히나타 그릇 위에 가장 잘 익은 부위부터 올려둔 다음에 바로 다음 고기를 올린다. 많이 먹어야 회복도 잘하지! 하지만 그릇에 올려주는 고기의 절반은 결국 테루시마의 입으로 들어온다.

 "쇼요, 내가 먹을 테니 쇼요부터 먹어!"

 "형 지금 구우시느라 계속 못 드시고 계시잖아요!"

 "구우면서 먹고 있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무리 봐도 제 입에 들어가는 고기가 더 많은 것 같아 결국 서로서로 먹여주게 돼버린다. 내가 구워도 되는데. 놀라운 체력을 자랑하는 히나타인 만큼 지금도 매우 활기차지만 테루시마는 완강해 결국 테루시마의 입맛에 맞춰 고기를 양념에 적당히 찍어 호호 분 다음에 먹여준다. 고기를 두 근은 사 온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고기 한 근은 일 인분인 것 같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고기를 다 먹은 다음에는 불판을 한번 씻은 다음 해산물을 굽기 시작한다. 옆에는 조개탕도 보글보글 끓이며 밥도 한 그릇씩 가득 퍼온다.

 "내일은 수영해도 되겠죠?"

 우리 쇼요는 먹는 것도 예뻐. 남이 들으면 팔불출이라 한마디 했을법한 생각을 하며 포슬포슬한 밥 위에 반찬을 얹어준다.

 "아직은 안 하는 게 좋을걸? 특히 바다는 소금물이니까."

 "안타깝다-!! 수영 재밌는데요!"

 "다음번에 또 오면 되지. 그때는 좀 더 한적한 곳으로 갈까?"

 "그것도 좋고 여기도 좋아요! 형이랑 가는 곳이면 다 좋아요!"

 입에 발린 말이 아닌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숨김없이 애정을 드러내는 눈빛에서 읽을 수 있다. 얘는 정말 천연 사랑 꾼이구나.

 "내일은 비치 발리볼 해볼래?"

 "네!!!"

 히나타는 배구를 좋아한다. 하지만 최근엔 기말고사를 준비하느라 테루시마랑 같이 하루 대다수를 도서관에서 보냈다. 히나타는 집중력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과목을 공부할 때는 놀라울 만큼 열심히, 또 열정적으로, 그리고 다른 과목에서는 보이지 않던 집중력을 내비치며 공부한다. 바쁜 하루 중에도 둘 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배구를 했지만 (보통 테루시마가 공을 올려주면 히나타가 스파이크를 하는 형태였다), 활동량이 많은 둘에게 한 시간은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고로 둘은 지금 온몸이 간질거릴 만큼 배구를 하고 싶다. 시간이 늦지만 않았어도 지금 나갔을 텐데. 아쉬움을 달래며 뒷정리를 끝낸 후에는 배구 대신 산책을 택하는데, 보통 밤바다의 산책은 로맨틱하겠지만 둘의 산책은 사뭇 다르다. 파도가 모래에 부딪히는 소리, 바람이 귀를 스치는 소리, 히나타의 웃음소리 하나하나가 행복으로 다가와 둘은 웃고 뛰며 자유로운 즐거움을 만끽한다.


 

-


 

 "원터치-!!"

 "나이스 원터치!"

 몇 번을 봐도 놀랍도록 높게 뛴다. 히나타의 날개뼈에 새겨진 날개가 움직임과 동시에 히나타의 몸도 높게 날아오른다. 블로킹의 타이밍을 맞추는 것조차 타고났는지, 훨씬 오래 해온 저를 금방 따라 하는 모습에 기분 좋은 소름이 오싹 돋는다. 히나타가 살려준 공을 낭비할 수는 없지. 꽤 멀리 뒤로 날아간 공을 재빠르게 쫓는다. 테루시마는 천재 세터가 아니기에 토스 완성도가 높지는 않더라도, 히나타가 있는 곳을 예상해 공을 보낼 수는 있다. 히나타는 미숙한 토스도 끝까지 쫓아가는 근성과 집착이 있어, 상대편은 당연히 히나타에게 블로킹 한 명을 붙이고 원터치를 대비해 한 명은 뒤로 물러선다. 틀렸어, 너네. 테루시마는 이럴 때가 가장 즐겁다. 당장에라도 공을 칠 듯이 높이 뛴 히나타 대신에 공을 치는 것은 테루시마다. 남들이라면 절대 치지 않을 위치. 하지만 테루시마는 칠 수 있고, 그 공을 블로킹도, 리시브도 없는 곳으로 보낼 자신이 있다. 그것만으로 칠 이유는 충분하다. 허를 찔린 상대편이 보내는 어이없다는 눈빛에는 약간의 존경도 섞여 있다. 테루시마는 히나타랑 하이파이브를 한 다음에 서브를 준비한다.

 

 정확하게 상대 팀이 흔들릴 곳을 노린 서브 때문에 리시브는 불안정하고, 자연스럽게 스파이크도 위력이 죽어 테루시마가 안정적으로 찬스 볼을 깔끔하게 올린다. 햇빛 때문에 잘 보이지 않을 법도 하지만 히나타는 공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탕- 손바닥이 공을 내려치는 감각, 코트 건너편이 보이는 시야. 블로킹을 피해 코스를 바꾸는 것은 아직도 어려워 실패할 때도 잦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다음 공은 또 올라오니까. 이번에는 기분 좋게 성공해서 더욱 신 난 히나타는 테루시마에게 달려가 폴짝 뛰어 안긴다. 테루시마는 그런 히나타를 능숙하게 들어 올려 한 바퀴 빙글빙글 돌려주고 다시 내려준다. 배구를 알려주길 잘했어.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하늘 아래의 햇빛은 적당히 따갑고 하늘보다는 색깔이 짙은 바다가 내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거기에 이름을 닮은 주황빛 머리카락을 가진 애인과 하는 배구, 그리고 둘의 어깨의 대칭으로 새겨진 날개들. 테루시마는 그저, 둘의 남은 날들이 오늘 같기를 바란다. 둘이 즐기는 것을 하며, 같이 날고, 쉬고, 도약하는, 그런 날들.

 오늘도 테루시마의 태양은 밝게 빛난다.

[테루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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