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무게
W.은우 (@enwoo_hq)
세상에는 수많은 관계가 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 9시에 출근해 저녁 6시 퇴근할 때까지 사무실에서 파티션을 경계로 같은 공기를 공유하는 직장 상사와의 관계가. 업무를 마치고 담배 연기와 피로감에 젖어 현관 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한 후 콧속을 짜릿하게 자극하는 애인표 김치찌개 냄새라던가. 혹은 학생 시절부터 팔짱을 끼고 화장실에 같이 가서 잡담까지 하던 친밀한 사이였지만 오해가 쌓여 한 순간에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버린 관계가 있다. 사와무라 다이치는 생각한다. 자신과 히나타 쇼요의 관계는 어디에 위치해 있을까.
“선배님! 우리 배구해요.”
밝은 얼굴에 미소가 걸려있다. 기껏 주어진 자유시간에 사색을 하고 있었더니 다이치의 고뇌를 이끈 당사자가 말을 걸었다.
“그래. 지금 갈게.”
주장은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응답했다. 히나타의 얼굴을 보면 미소가 절로 나오기도 하고, 인상을 찌푸려 괜히 나쁜 기운을 전하고 싶지 않았다. 반년 정도일까. 배구부 신입에게 마음을 내준 시간은.
*
도둑잡기를 한 적이 있다. 트럼프 카드를 나눠 최후의 조커 카드를 손에 쥔 자가 패하는 게임이다. 사와무라, 카게야마, 츠키시마, 스가와라, 그리고 히나타 순으로 둥그렇게 앉아 게임을 하면 항상 지는 사람은 고정되었다. 사와무라 다이치로.
“왜 또 내가 지는데!”
게임에 져 아이스크림을 고를 때 투정을 부렸나. 아이스크림 사는 건 상관없지만 항상 게임에 지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투덜투덜대자 옆 자리에서 쌍쌍바를 골라 마트 냉동고의 냉기를 느끼며 감탄하던 히나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이치 선배, 표정 다 읽혀요!”
손을 뒤적이다 아쉬운 듯 냉동고를 닫았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중대사를 아무렇게 않게 말하는 히나타였다. 사와무라가 주머니 속사정이 넉넉하지 않아 부원들의 아이스크림만 계산하자 핸드폰에 출금 알림이 떴다.
[KB국민체크(1*1*) 사*무라님 08/06 12:10 2000원 M마트 사용]
어휴, 만 원도 안 남았네. 한숨을 쉬려 입을 벌리는 순간 달콤한 무언가가 혀끝에 닿았다.
“항상 선배님 걸 사지 않더라구요. 드세요!”
작은 크기의 쌍쌍바 조각을 입에 넣은 후배의 말이 달았다. 아니 입 안에 느껴지는 맛이 달았다.
매번 연습할 때마다 다이치는 히나타에게 유독 약했다. 고작 게임도 이기지 못할뿐더러 눈조차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순간이 많다. 한 손에 카드를 들어 히나타의 선택을 기다릴 때 눈과 눈이 스치는 짧은 찰나, 알몸으로 벗겨진 자신이 관찰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부끄럽고 숨고 싶다.
사람을 한 단어로 정의해야 한다면 다이치는 히나타를 “열정”으로 표현할 것이다. 활기차고 분위기를 띄우는, 다정하고 따듯한 모든 특성을 큰 덩어리로 뭉치면 히나타 쇼요가 산출될 사실이 자명하다. 후배와의 첫 만남, 그 시간이 언제였나.
배구가 좋다고 작은 덩치로 방방뛰는 히나타는 눈에 자꾸만 밟혔다. 사와무라 다이치 역시 배구를 가장 사랑한다. 사랑하니 고등학교 3학년 졸업반이 되었지만 경기를 위해 연습에 연습을 매진하지 않겠는가.
“배구를 꼭 하고 싶어요.”
눈을 반짝이고 두 손을 꽉 쥐고선 큰 소리로 외치는 모습은 그 누구보다 커 보였다. 히나타보다 20cm가량 큰 다이치보다, 그리고 새로 들어온 츠키시마 케이란 녀석보다 더욱.
언젠가 사와무라 다이치는 히나타 쇼요에게 물음을 던진 적이 있다.
“배구가 왜 좋니?”그 물음에 후배는 자신을 이상하게 응시했다.
“왜 좋냐니요. 그냥 좋아요. 배구가 좋아요. 배구를 할 때 너무너무 기뻐요.”
배구를 좋아하는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그냥 기뻐서 배구를 열심히 할 뿐인데. 궁시렁거리는 모습이 참 예뻐보였던 그 때부터였나. 잘 모르겠다.
*
같은 동아리, 아주 짧은 반 년의 시간, 찬 바닥에 누워 거친 호흡을 주고받는 순간들. 곧 성인이 될 자신과 올 해 입학한 히나타 쇼요. 자신은 사랑에 관해 남자, 여자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사람도 아니었고 사람이 사람에게 끌리는 감정은 만고의 진리라 생각한다. 종교의 윤리관 혹은 국가 제도의 억제력으로 통제될 감정이 아니다. 한 인간의 감정은 그렇다. 세상의 시선이 두려워 사랑을 망설이는가. 이는 거짓의 명제이다. 사와무라 다이치는 주위의 시선에 매몰되어 사랑을 못할 사람이 아니다. 비난을 받으면 뭐, 어쩌라고. 모두에게 비밀은 있고 다이치의 비밀은 후배를 좋아한다는 점 하나 뿐이다. 다만 가장 두려운 건,
“다이치 선배, 멋있어요!”
언제나와 같은 표정으로 두 손을 모으고 반짝반짝 빛나는 히나타 쇼요다.
“기다려줘서 고마워.”
다이치 역시 익숙한 근육세포를 움직여 웃는 낯을 만든다. 너는 내가 하고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모르겠지. 그럴 것이다. 좋아해, 히나타 쇼요. 두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돌아올 눈빛이 무섭다. 카라스노 배구부 부원에게 열정과 사랑을 동등하게 비춰주는 일도 샘나는데 더욱이 제 사랑이 더럽다고 피하면 견딜 수 없다.
“맛있는 간식 드실래요? 저 용돈 받았어요. 제가 살게요.”
네 사랑스러움을 느낀 과거의 순간이 스쳐지나간다. 태양이 머리꼭지에서 작열하던 여름날 상대적으로 달달했던 아이스크림.
“쌍쌍바 먹고 싶네.”
“쌀쌀하잖아요. 감기 걸리면 어떻게 하려구.”
눈썹을 축 내리곤 입을 뾰루퉁 내미는 히나타다. 주장님이 아플까 걱정되잖아요. 후배의 걱정과 달리 선배의 마음과 뱃속은 온통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진달래의 색깔처럼 아롱이는 분홍빛이 서서히 연기처럼 올라와 목구멍을 간질인다. 지금이야 어서 말해. 마음의 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감정을 꿀꺽 삼켜낸다. 쌓이고 쌓인 감정은 진득한 촉감으로 뱃속으로 다시 내려가는 속도마저 굼벵이 기어가듯 느리다.
“더워.”
운동해서 더운가봐. 사족까지 첨언하고서 하하 웃었다.
학교 근처 대형마트 냉동식품 코너에서 구석 깊이 박혀있는 쌍쌍바, 메로나, 슈팅스타 등 온갖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다른 부원들도 먹어야하니까 넉넉하게 사들고 가요.”
“......그래.”
휘적휘적 냉동고를 뒤져 다양한 아이스크림을 카트에 담고, 계산한다. 고3이니 공부나 하라며 용돈이 끊긴 다이치와는 달리 히나타는 주저없이 카드를 내밀어 구매한다. 두 사람의 나이는 다르고 서로 처한 환경도 상이하다. 곧 졸업할 사람과 카라스노의 끝내주는 미끼라는 주위 사람들의 평가도 다르다. 와, 사와무라와 히나타 봐봐. 시라토리자와의 경기에서 승리했다며. 고작 고등학생에서 미야기 현의 강자로 불리는 이름도 변했다. 환경이 바뀌고, 평가의 시선이 넓어졌으며 대우가 변했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건 사랑스러운 너와 너를 향한 내 감정.
다이치와 히나타는 두 손 가득 아이스크림을 들고 말없이 걸어가도 전혀 어색함 없는 사이이다. 무얼했다고 하늘이 하늘색과 주홍색으로 얼룩질까 궁금하다. 고작 배구 연습을 마치고 장을 봤을 뿐인데.
“멋있었어요! 오늘도. 주장님은 짱이야.”
뜬금없이 말을 꺼내는 이유는 어색함을 감추려는 속임수가 아니라 그저 히나타가 원하기 때문이다.
“너도 수고했어.”
다이치와 히나타의 관계는 한 단어로 명확하게 정립하지 못한다. 배구부 부원, 주장과 신입, 선배와 후배. 게다가 다이치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히나타.
“행복해, 히나타?”
고민하다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언제나 오늘과 같았으면 좋겠어요.”
빙긋 웃으며 응답한다. 다이치는 밝게 웃는 히나타를 볼 때마다 저 아래서 몽글몽글 솟아나는 감정이 버거웠다. 어제도, 아까도, 지금까지 하고픈 말은 따로 있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히나타와 행복하다면 자신 역시 행복하리라. 괜한 고백으로 얼굴 붉히고 싶지 않고, 거절당하기 싫다. 주장과 부원이라는 관계로 남아서 고민과 힘든 감정을 공유하는 위치면 족하다. 존재하는 다양한 관계 중 언제든 잘라낼 수 있는 가벼운 사이, 학창시절 추억을 회고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동창, 또 영원히 함께 하고 끝까지 함께 해야만 하는 관계 역시 존재한다. 소중한 인연을 지키는 게 감정을 토로해 시원해지는 소망보다 중요할 것이다. 목 언저리에서 주저하다 잠식된 단어가 많다. 세월이 흐르며 단어의 길이와 감정의 깊이가 커져 어깨와 등 위까지 짓누른다. 감정을 질량으로 재단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안다. 수학적 통계로 어찌 추상적인 마음을 재단하겠는가. 아, 그래도 버겁다. 힘들다. 사랑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