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짝사랑의 끝

[쿠로히나ts]

W. 우늉(@Narahan_star)

 1.

 “쇼요….”

 코즈메 켄마, 네코마 고교 2학년. 답지않게 귀애하던 1학년 매니저가 복도에 쭈그려 앉아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다! 호외지만 동시에 나쁜 소식이었다.

 눈이 마주친 히나타가 후다닥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고 마구 얼굴을 문지른다.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잔뜩 호두턱을 만들면서 소리없이 울던 그 표정이 코즈메의 눈꺼풀에 콕콕 박혀 망막에 남는다. 표정 근육을 만드는 칼로리조차 불필요하다고 느끼며 평소에 변화가 많이 없던 코즈메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 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점심시간의 쓸데없는 참견들이 귀찮아 사람이 잘 오지않는 5층 구석에서 낮잠이라도 자려고 애써 올라온 건데, 마주친 충격적인 광경에 순식간에 평화롭던 오후가 긴박해졌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네가 울던 말던 난 갈 테니 붙잡지 말아줘, 라고 생각했을 텐데…. 주저앉아 애처롭게 울고 있던 게 1학년 매니저라면 말이 백 번이고 틀려졌다.

 무릎 위로 깊숙이 머리를 묻어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간간히 코를 훌쩍대는 소리와, 빨갛게 달아오른 목덜미와 귓가. 엉엉 우는 이유도 알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울어 본 사람을 달래 본 경험이 없는 코즈메는 잠시 고민했다. 사람 달래고 어르는 것을 잘하는 사람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울고있는 가여운 아이와 특별한 관계지 않은가. 하지만 곧 포기했다. 데리고 오는 것도 물론 좋은 방법이지만, 눈 앞의 울고 있는 매니저를 버리고 간다는 것은 코즈메의 선택지에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코즈메는 그냥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최대한 숙인다고 숙인 것인데 그 동그란 머리통이 한참이나 아래에 있었다. 물론 여자아이와 비교할 문제는 아니지만 코즈메는 배구부원들 사이에서도 꽤 작은 편에 속했기 때문에 이렇게 키차이나 체격차이가 느껴질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특히나 히나타는 그 또래 여자애들 사이에서도 체격이나 키나 거진 반절정도 작아 더욱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아니, 사실 이 따위 체격차가 히나타를 특별하게 만드는 게 아니다. 그건 코즈메도 잘 알고 있었다.

 “쇼요, 왜 그래? 어디 아파?”

 작은 동물이 겁에 질려 몸을 둥그렇게 말고 바들바들 떠는 것 마냥 옹송그리던 히나타의 몸이 움찔, 하고 떨렸지만 한참이나 대답이 없다. 역시 피해주는 것이 옳은 선택인가. 혹시 예민한 고교생의 감수성인가. 하지만 혹시 어딘가 아파 우는 걸까 걱정이 앞섰다.

 쇼요, 쿠로 불러줄까?

 이내 히나타가 코를 쿨쩍이며 고개를 조금 들었다.

 “켄, 크흥, 켄마….”

 아…, 역시 얼굴 엉망이야. 얼굴이 이미 새빨간 것이, 계속 울다가 열이 날지도 모른다. 얼마나 손으로 비빈 것인지 눈두덩이가 이미 잔뜩 부어 있었다. 이리저리 쏘다니기 좋아하고 에너지 넘치는 활발한 아이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혹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끙끙대며 열이 오르는 걸 코즈메는 알고 있었다. 배구부 유일의 매니저가 또 열이 올라 끙끙거린다면 안절부절 연습에 집중 못할 사람들 한 움큼,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화를 낼 사람 한 움큼, 온갖 방정을 떨어 댈 사람 한 움큼 인지라 코즈메는 또 손으로 눈을 비비려는 히나타의 팔목을 가볍게 잡아 제지했다.

 “비비면 안 돼. 나중에 아플 거야.”

 물론 자신도 이 세 그룹 중 한 곳에 속해 있음이 당연하다.

 손 말고 물에 젖은 수건 같은 것이 있으면 좋았으려만, 남자 고교생에게 손수건이란 사치였다. 그런 고상하고 세심한 물건이 있을 리 만무했다. 쿠로오라면 또 모를까. 휴지 좀 적셔올까? 많이 따가워? 히나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색이 옅은 그 자잘한 속눈썹과 장밋빛 볼이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볼에 눈물자국이 선명하다. 학교 5층에서 단순한 심경변화로 이렇게 울고 있을 리 없었다. 그럼 역시 누가 울렸나. 코즈메의 눈이 가늘어졌다. 학기 초에 남자 배구부 매니저를 하고 있다고 여자아이들이 뒤에서 수근거리는 걸 코즈메도 알고 있었다.

 

 올해 초, 잔뜩 벚꽃잎을 뒤집어 쓴 채 체육관에 나타난 히나타는 배구부원들과 금방 친해졌다. 옆사람에게 그저 물어보면 될 것을, 굳이 첫 등교일부터 체육복을 입고 온 학교를 뒤지며 배구부를 찾는다며 돌아다녔던 근성답게 모든 일에 참 열심이었다. 매니저는 딱히 뽑지 않는다고, 좀 당황한 표정으로 말하던 쿠로오를 밀치고 좋다고, 제발 들어와 달라고 야마모토가 애원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난처해 보이던 주장에게 매니저를 거절당했을지도 몰랐다.

 배구가 좋아 들어왔다던 아이는 키가 꽤 큰 부원들에게 겁을 좀 내긴 했지만 이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 마냥 녹아 들었다. 그 작은 입에서 종알거리며 나오는 칭찬을 듣고 있자면 못내 부끄러워 몸을 배배 꼬지만 이내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덩치가 큰 사람들 앞에서 벌벌 떨며 쪼그라들기는 하지만 또 몇 번 마주보다 보면 금새 친해져 와글와글 몰려다닌다. 나이나 성별, 성격 마저도 히나타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좋은 점을 본능처럼 알아차렸다. 아니, 사실 히나타는 그 “좋은 점”을 사람을 대하는 것에 사용하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 있는 좋은 점이나, 나쁜 점이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지 코즈메는 잘 알고 있었다. 히나타는 대단해.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그녀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꼽게 바라본다면 한없이 싫은 것이 인간인지라. 첫 학기가 시작되고, 배구부 매니저로 들어간 히나타가 조금 놀던 여자 아이들에게 붙잡혀 가던 것을 중간에 가로챈 것이 몇 번, 주동자인 아이들을 때때로 주시하고 있자니 나중에 알아서 떨어져 나갔다. 아침연습, 방과 후 연습, 매니저가 되어 일일이 챙기기는 귀찮고 너가 하고 있는 걸 보니 배알이 꼴렸다는 그 생각이 참 하찮았다. 자신답지 않게 화가 난 얼굴로 불한당처럼 그 마른 손목을 쥐어 잡고 체육관으로 돌아오면 부원들이 의아하게 쳐다보곤 했었지. 같은 1학년인 하이바나 이누오카, 그리고 새 친구들과 친해진 이후로 같이 다니는 시간이 많아 완전히 떨어져 나간 줄 알았는데.

 흠뻑 젖은 속눈썹 아래로 커다란 눈동자가 어찌나 애처롭던지, 남의 일에는 웬만하면 끼어들고 싶지 않은 코즈메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이렇게 금방 뚝뚝 울어 대고 겁이 많아 깜짝깜짝 놀래니 성격 나쁜 남자애들이 이리저리 찔러보며 괴롭혔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던 고요하던 코즈메의 마음에 폭풍을 일으켰다.

 “쇼요, 혹시…,”

 “켄, 크흥, 켄마, 역시 나 여자로써 매력이 전혀 없는 걸까!”

 “뭐?”

 아니, 취소. 폭풍은 폭풍이지만, 좀 다른 폭풍이었다. 그리고 코즈메는 히나타의 눈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쿠로오 테츠로. 코즈메 켄마의 소꿉친구이자, 네코마 고교 남자 배구부 주장, 3학년, 리드 블로커, 지칭하는 호칭들은 많았지만, 가장 최근의 얻은 호칭은 “히나타 쇼요의 남자친구”였다. 당연히 “남자친구”가 정말 성별이 남자인 친구라는 소리가 아니다.

 코즈메의 얼굴이 기이하게 기울어졌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에 퍼런 귀기가 절절 흘렀다. 그래, 결국 저질렀나. 죽인다, 정말. 울던 아이를 혼자 놓고 갈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이야기가 바뀌었다. 슬쩍 일어나는 코즈메의 바지자락을 히나타가 꾹 잡았다. 혹시 갈까 봐 얼마나 세게 잡은 것인지 작달막한 주먹이 새하얗게 변해 있어 코즈메는 다시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쿠, 킁, 쿠로오 씨한테 말하지마….”

 콧물 때문에 잔뜩 뭉그러진 발음이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글쎄, 이렇게 계속 울고 있으면 약속해 줄 수 없어. 한숨과 함께 소매로 살살 젖은 볼과 눈 밑을 닦아준다. 손짓을 따라 머리가 앞뒤로 까딱까딱 흔들렸다.

 “그래서 왜 울고 있었던 건데. 쿠로가 무슨 짓이라도 한 거야?”

 그의 소꿉친구와 올해 들어온 1학년 매니저가 꼭 붙어서 쭈뼛쭈뼛 코즈메 앞으로 다가온 것이 어언 2개월 전이었다. 양 옆으로 붙여 놓고 보니 키차이가 정말 많이 나서, 그렇지 않아도 덩치라던지 얼굴이라던지 여간 위협적이라는 소리를 많이 듣는 소꿉친구에게 매니저와 같이 다니지 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코즈메가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 히나타가 떠듬거리며 소리쳤다.

 “저, 저, 쿠로오 씨와 사귀고 싶습니다! 교제를 허락해 주세요!”

 “하?”

 올해 들어 단연코 가장 크게 목소리를 낸 날이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히나타와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이던 소꿉친구가 손을 꼭 잡고 있다는 걸 그때서야 알아챘었지.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거야, 라고 말하기엔 오죽이나 히나타를 귀여워한 것을 배구부 전원이 알고 있었다. 그것보다 언제부터 사귀었던 거야. 전혀 낌새를 눈치 못 챘는데.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히나타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어필을 해댔다.

 저는 쿠로오 씨를 제일 사, 사랑하구요…! 또 엄청 다정하게 대해줄 자신도 있고!

 횡설수설 했지만 대부분 자신이 얼마나 쿠로오를 사랑하는지, 얼마나 사랑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붉어지다 못해 결국 울먹거리기 시작한 히나타에게 차마 왜 자신에게 그런 말을, 그것도 존댓말로 하는 거냐는 의문도 물어보지 못하고 그저 축하한다고 얼떨떨하게 말을 건넸다. 히나타와 쿠로오는 그 날 오후 연습에서 교제사실을 모두에게 알렸다.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자신에게 교제허락…,을 두 사람 다 받으려고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두 사람이 연인이 되었다는 걸 코즈메는 그 후로도 퍽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물론, 바뀐 점이 있긴 하다. 쿠로오와 코즈메는 동선이 꽤 겹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가까운 거리에 살기도 했고, 옛날부터 온갖 잔소리를 해대며 챙겨준 역사가 어언 10여년이 넘어간다. 아침에 쿠로오가 깨우러 올 때 작은 아이가 등뒤에서 나와 놀라 자빠질 뻔 했다든가, 아니면 하교할 때 동행이 한 명 늘었다든가. 주말에 나가자는 쿠로오의 옆에 소풍 가는 아이 마냥 상기된 얼굴로 손을 꼭 잡고 나타난다.

 연애경험이라고는 코즈메도 재작년에 발매된 두근두근★ª러브 다이어리의 미카가 전부였지만 적어도 친구를 끼고 배구경기를 보러 간다 거나 연습을 한다 거나 하는 두 사람이 조금 기묘해 보이기는 했다.

 좀 더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떨까, 히나타가 섭섭해 할까 쿠로오에게 몰래 찔러봤지만 다음날에 히나타가 새벽같이 찾아와 자기가 귀찮았냐고 엉엉 울어 댔다. 같이 온 쿠로오가 충격 받은 얼굴로, 너 어떻게 히나타에게…, 라는 말을 지껄이던 이후로 이 바보커플에게 최대한 관심을 주지 않으려 그동안 노력했다.

 히나타 쇼요는 사랑받아야 마땅한 아이다. 자신의 소꿉친구는 도대체 그동안 무슨 짓을 했길래 이 사랑스런 아이의 입에서 이 따위 말이 나오게 하는가. 코즈메의 눈이 하얗게 가늘어졌다. 훌쩍, 훌쩍,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 눈동자가 잔뜩 망설임을 담고 자신을 올려본다. 사실 무슨 말이 나오던 쿠로오의 잘못이라고 결론을 맺을 코즈메에게 이미 히나타의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2.

 “아, 진짜 공용 샤워실 온수 언제 나오는 거야. 벌써 겨울이라고.”

 아침 연습이 끝나면 한 겨울이라도 땀이 흠뻑 젖는다. 수업을 듣기 위해서는 적어도 땀이라도 씻어야 했다, 라고 다들 말하지만 샤워실의 온수기계가 고장난지 벌써 일년이 넘었다. 더운 여름이라면 모르겠지만 날씨가 추워지자 하나, 둘, 샤워실로 가는 걸 기피했다. 의외의 한 명 빼고. 올해 초만해도 가장 먼저 샤워실 보이콧을 선언한 쿠로오 테츠로가 차가운 몸을 덜덜 떨면서 샤워실에서 뛰어 나왔다. 푹 젖은 머리에 금방 살얼음이 살짝 꼈다.

 “망할, 1년 전부터 고장 났다고 그리 말했건만.”

 같이 뛰쳐나온 야쿠 모리스케가 신경실적으로 구시렁거렸다. 기어이 졸업하고 고칠 건 가. 내 학비, 내 세금! 전력질주로 반까지 뛰어간 쿠로오와 야쿠가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가 들어갔다. 다행히 오늘도 세이프. 같은 반 학생들은 역시 끼리끼리 모여 잡담을 떨어 대고 있었다. 쿠로오와 야쿠의 도착을 알아차린 몇몇이 인사해 왔다.

 “쿠로오! 오늘도 머리가 멋지네!”

 최근에 계속 아침운동 후에 샤워를 하자 머리가 그 전보다 차분해졌다. 베개에 눌려 솟구친 앞머리가 멋지다는 소리도 들어본 적 있지만, 종종 젖은 머리로 반에 들어오는 쿠로오에게 꼭 한번씩 칭찬의 말을 하는 여자애들이 늘었다. 아니, 사실 머리스타일이야 상관없나. 그냥 말을 걸 빌미가 생긴 것뿐이다. 야쿠는 힐끗, 그의 주장을 한번 훑어보다 자기 자리로 종종거리며 돌아갔다.

 “으음, 그런가? 잠깐, 평소에는 별로라는 말이야?”

 새삼스런 얼굴로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던 쿠로오가 깜짝 놀라 말했다. 말을 건 여자애가 꺄르륵, 웃는다.

별로 안 웃긴데…. 야쿠가 가방에서 교과서를 빼내고 필기구를 정리할 때까지 쿠로오는 그 여자애와 대화하고 있었다. 그냥 끝내면 될 것을, 머리카락이 평소에는 별로였나에 관해 끈질기게 물어보다 괜히 다른 이야기에 말렸다.

 네가 실습시간에 만들 쿠키 이야기를 왜 저렇게 장황하게 하는 거지. 배구부 매니저가 혼자라서 힘들지 않냐는 이야기는 이 시점에서 왜 하는 거야? 가만히 듣고있던 야쿠의 눈썹이 찌그러졌다. 누가 봐도 너에게 사심이 있잖아, 멍청아. 담임이 들어오자 여자애는 후다닥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옆자리 짝꿍과 소근거리다 깔깔대고 웃는 게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겨우 풀려난 쿠로오가 서둘러 야쿠의 옆자리로 달려와 교과서를 꺼냈다.

 “야.”

 “응?”

 노트와 필기구를 꺼내던 쿠로오가 교과서에 메모지를 붙이며 대답한다. 입시가 멀지 않았고, 쿠로오는 다사다난한 일상 속에서 꽤 공부에 집중을 하는 편이었다.

 “히나타한테 잘 하고 있냐?”

 메모지 위에 필기를 하던 손이 멈췄다. 시선은 앞을 향해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지만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따가웠다. 이내 평소와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당연하지. 애지중지 잘 모시고 있습니다.”

 뭐, 그렇겠지. 야쿠는 이내 필기를 시작했다.

 쿠로오 테츠로는, 솔직히 말해서, 참 잘난 인간이었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첫째, 인정하기 싫지만 잘 생겼다. 여자아이들은 쿠로오의 눈꼬리가 섹시하게 올라갔다며 좋아했고, 웃을 때 입꼬리가 슬쩍 말려 귀엽다고도 했다. 잠꼬대 때문이라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 엉망인 머리를 잘 정리해 한쪽만 깐 머리스타일도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덩치나 키는 네코마들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컸지만 얼굴은 전체적으로 날렵하게 떨어졌다. 커다란 체구, 그 마저도 부드럽고 유연하다. 그 큰 키와 날카로운 인상 때문인지 웃지 않을 때는 종종 서늘한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생글생글, 잘도 웃고 있어 다른 애들은 잘 못 느끼는 것 같기도 했고.

 둘째, 성격도 꽤 괜찮았다. 쿠로오는 누가 뭐라고 해도 팀의 주장으로써 팀을 훌륭하게 이끌고 있다고 야쿠 스스로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뒤에서 받쳐주고, 앞에서 이끌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 느낌을 주는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10여년이 넘게 무기력한 소꿉친구를 어르며 단련된 솜씨로 강약을 잘 조절해 인간관계를 별탈없이 부드럽게 이끄는 사람이었다. 운동에 전념하는 남자애답지 않게 풍부한 화젯거리와 센스 있는 말주변은 남자애들이나 여자애들 구분할 것 없이 인기를 끌었다.

 흠. 야쿠는 힐끗 쿠로오를 곁눈질로 쳐다봤다. 필기하던 쿠로오가 시선을 느꼈는지 야쿠에게 시선을 옮기다가 씩, 웃어 보인다.

 어휴. 무엇보다, 쿠로오는 답지않게 꽤 물러 터진 부분이 많아서 아무리 시답지 않은 말이나 눈에 빤히 보이는 수작이라 할지라도 경청하고 반응했다. 상냥한 건 가? 그래서인지 오해하는 애들이 꽤 있었고. 재작년에도, 작년에도 치정문제가 있지 않았던가.

 그저 기본적인 대화로부터 착각을 하는 애들도 문제가 좀 있지만, 야쿠는 저 냉한 얼굴이랑 어울리지 않는 상냥하고 사근사근한 쿠로오의 잘못이 적어도 오 할은 넘는다고 생각했다. 뭐, 그래도 당시에 그건 어차피 네 인생이라는 마음으로 피해만 오지 않는다면 무시했지만, 아니 오히려 치정문제가 재미있다고 깔깔 거리기도 했지만, 올 해는 이야기가 다르지 않는가.

 야쿠의 눈이 뾰족하게 솟아 마구 노려보자 막 방정식의 마지막 답을 써 내려가던 쿠로오가 화들짝 놀라 왜, 왜, 입모양으로 마구 항의한다. 젠자앙, 말도 못하고 답답해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두피만 아프다.

 “쿠로오~.”

 수요일은 아침 내내 수학과 문학, 그리고 과학계열이 주르륵 짜여 일주일 중에 가장 힘들었다. 입시가 다가오니 공부에 집중하는 사람은 점점 많아졌지만 그렇다고 일상생활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라. 곧 졸업해 헤어진다는 생각 때문일까, 근래에 고백하고 고백 받는 아이들이 늘었다. 아마 그와 같은 선상의 문제일 거라고 야쿠는 생각했다. 아침에 쿠로오를 붙잡고 한참이나 온갖 예쁜 척을 해대던 여자애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비음이 얼마나 섞였던지, 야쿠의 눈썹이 짜부라졌다. 흠, 아니면 그냥 자신이 아끼는 1학년 매니저의 애인에게 근래에 계속 추파를 던져, 다분히 주관적으로 사심이 들어갔을 수도 있다. 점심시간이 되자 마자 책상 위에 길게 늘어진 쿠로오에게 다가왔는데 옆구리에 다소곳한 색의 도시락이 들어있었다.

 아주 작정을 했군.

 “아…, 응?”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연습에, 그래도 수험생이라고 수업에 집중하다 보면 머리에 열이나 눈동자가 핑글핑글 돌아가는 느낌이다. 덩치도 큰 게 책상 위에 엎어져 있다가 비척비척 일어났다.

 “쿠로오, 혹시 점심 어떻게 할 꺼야?”

 “으음, 오늘 야끼소바 빵 나오는 날이었나.”

 “아니! 오늘 단팥빵 나오는 날!”

 으, 쿠로오가 질색한다. 갓 구워 나온 단팥빵도 달아서 싫은데, 텁텁한 맛과 쓴 뒷맛을 남기는 매점 빵이라면 말도 다했다. 매점엔 절대 안 가. 대답하는 쿠로오의 말을 예상이나 한 듯 여자애의 얼굴이 환해진다. 옆구리에 낀 도시락 통의 양을 보건대 절 때 1인분은 아니다. 분명 노린 걸 꺼야. 당장 저 눈치 없는 주장의 목을 짤짤 쥐고 이 새끼 여친있는 놈이라고 말을 해주고 싶지만 그 놈의 눈치가 없는 건지, 다른 생각이 있는건지, 어쨌든 본인이 말하지 않는다면 타인인 야쿠가 떠벌리고 다니는 것도 꼴이 우스울 거다. 위원회 때문에 회의에 가야하는 야쿠는 마침내 프린트와 회의자료를 다 챙겨 일어났다.

 “아, 오늘 급식에 꽁치구이 나온다 던데.”

 “진짜? 예이-, 카이랑 먹으러 가야겠다.”

 저런. 매점 메뉴는 체크하셨고, 급식 메뉴는 체크하시지 않으셨군요. 패착의 원인을 분석하시고 다음 기회에 다시 도전해 주세요. 아, 그리고 여자친구 있는 몸입니다. 야쿠는 자신을 마구 째려 보기 시작하는 여자아이의 시선을 산뜻하게 무시했다. 물론 급식은 꽁치구이가 아닐 수도 있다. 점심 메뉴를 알게 뭐람. 누가 눈치 없는 쿠로오 좀 때려줘.

문을 열었다.

 “…….”

 “…….”

 찬 바람이 휭, 하고 분 것 같았다. 물론 교실 안보단 복도가 추웠지만, 그렇다고 건물 안에서 바람이 불리 없으니 이건 마음에서 부는 찬 바람인가. 그 바람이 교복 안으로 들어와 등을 훑고 지나가 야쿠가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등에는 식은땀이 났다. 과연 이것이 바람 때문인가….

 몇 달 전에 쭈뼛쭈뼛 발을 질질 끄는 주장의 손을 잡고, 자신도 고장 난 것처럼 걸어와 모두에게 교제를 알리는 그 벌게진 얼굴을 차마 잊을 수가 없었다.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히나타의 얼굴 탓인가, 아니면 훨씬 성숙해 보이는 주장의 무안해 뵈는 머쓱한 얼굴 탓인가. 순진한 아이를 홀랑 채어 가는 것처럼 느껴져 자동적으로 양쪽으로 쭉 째지면서 흘겨지는 눈을 막을 수 없었다. 이미 알고 있던가, 옆에서 코즈메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나름 한창 불타오를 때일 텐데, 둘 다 배구할 때는 잡담 하거나 한눈 파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사귀기 전과 사귄 후의 차이점을 야쿠는 한참이나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잊고 있다고 해야 하나. 놀랍도록 사귀기 전과 후의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바쁘게 돌아다니던 아이가 주장에게 스포츠 타월을 건네며 환하게 웃는 얼굴을 봤을 때야, 야쿠는 두 사람이 정말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었다.

 예쁘게 접힌 눈꼬리 아래로 애정과 사랑이 흘러 넘쳤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덩이를 사랑해주지 않고 서야 배기지 못할 것이니, 올곧게 바라보는 시선의 주인공이 부러울 정도였다. 그만큼 순하고 한결 같은 애정이 있었다.

 그래, 그랬었는데. 몇 주 전의 그 사랑스럽게 달아오른 눈두덩이가 다른 의미로 부어 있었다. 잔뜩 젖어 짓무른 눈두덩이, 아래 속눈썹에 댕글댕글 달린 눈물이 애처롭다. 입술은 또 얼마나 깨물었는지 피딱지가 눌러 붙었다. 창문으로 교실 안을 쳐다보던 그 시선이 천천히 야쿠에게 옮겨졌다.

 품에 잘 정리돼 있던 종이가 바닥으로 팔랑, 팔랑 떨어진다. 움푹 빠질 것만 같던 그 커다란 눈에 금새 물이 찰랑찰랑 고이기 시작했다. 그 눈꺼풀에 다 담아 둘 수 없어 주르륵, 볼 위로 흐르자 마자 스스로 지레 놀라 휙, 하고 복도의 반대편으로 뛰어 나갔다.

 “히, 히나타!”

 야쿠가 떨어진 회의자료를 밟고 히나타가 금새 사라진 방향으로 달렸다.

 3.

 “헉, 허억, 꼬맹, 이, 빨라 가지곤….”

 한참을 뛰었더니 쌀쌀한 날씨에도 땀에 흠뻑 젖었다. 물론 오후 연습에 나가면 젖을 거지만, 아침에 덜덜 떨면서 샤워하던 공이 다 사라졌다. 턱에 맺힌 땀을 닦았다. 그렇다고 울던 아이를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전력을 다해 달려왔는데, 매니저 발이 얼마나 빠른 지 중간에 놓쳐버렸다. 하여간 스피드랑 체력 하나는 엄청나다고. 첫 체육대회 이후에 매주 월요일마다 아침, 점심, 오후에 친히 찾아 오셔서 러브콜을 보내는 육상부 주장이 이해된다. 배알도 없이 자기 친구가 찾아왔다고, 지 여친 스카우트하러 온 거 뻔히 알면서도 친한 척을 하던 쿠로오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야쿠가 대신 육상부 주장을 쫓아낸 것이 어언 2달.

 배구부 탈의실과 샤워실이 있는 교사 뒤를 돌았다. 여름 내내 자라온 잡초들은 기어이 뽑지 못해 다 말라 죽어 있었다. 죽은 풀을 밟으면서 뜻밖의 인물이 걸어 나왔다.

 “…켄마?”

 “야쿠 씨?”

 머리카락이 반쯤 물이 빠져 이제 검은 뿌리가 더 많이 보이는 네코마의 두뇌, 코즈메였다. 꾸벅, 목을 가볍게 숙여 인사를 한 코즈메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침착했다. 아직 오후연습이 시작되기는커녕 점심시간인데 어째서 배구부 교사 뒤쪽에서 뜬금없이 나오는가. 옷차림이 아직 교복인 걸 보면 딱히 연습을 하고 싶어서 점심시간을 쪼개 나온 것은 아니다. 아니, 애초에 그럴 성격도 아니고. 시끄러운 점심시간을 피해 도망쳐 나온 건 가. 야쿠의 선택지 중에 가장 신빙성 있는 정답이었다. 손에 든 저것만 없었더라면, 아마도.

 “…그건 뭐 야?”

 “?”

 얼굴에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의아함이 떠올랐다.

 “막대기요.”

 아니, 나도 알아. 그러니까 왜 막대기를 들고 있냐는 말이지. 심지어 야쿠도 그 막대기의 출처를 알았다. 체육관 마루를 정리할 때 쓰는 큰 마대걸레의 봉 부분이다. 몇 주전에 야마모토와 하이바가 방방 뛰다가 부셔버린 건데, 계속 버리려고만 했다가 잊고 체육관에 처박아 둔 거다. 그래서, 그 막대기가 뜬금없이 왜 나온 건데. 그것도 가장 안 어울리는 애 손에서.

 “케, 켄마, 하지마아.”

 코즈메가 나왔던 방향에서 야쿠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히나타가 절뚝거리며 뛰쳐나왔다. 어디서 금새 넘어졌는지 스커트 밑의 무릎이 옴팡 깨져 있다. 역시 울었구나. 엉엉 울면서 코즈메를 따라 나와 조끼를 잡고 늘어진다.

 “잘 됐다. 야쿠 씨, 히나타 좀 잠깐 봐주세요. 계속 울고 있어서…. 저 잠깐 3층 갔다 올 테니까.”

 3층이면 방금 야쿠가 있던 3학년 교실들이 위치한 층이었다. 손에 꽉 쥔 마대자루가 어디를 향하는지 알아차렸다. 코즈메가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히나타의 울음소리가 더 높아졌다. 그래, 정상적인 게 아니었구나. 눈이 반쯤 뒤집어 진 거야.

 “잠깐, 잠깐. 다들 진정해. 히나타는 그만 울고. 나중에 머리 아프다. 그리고 일단 무릎 치료가 먼전 것 같아. 세균 들어가면 안 되니까.”

 메마르고 자갈이 많은 땅에서 엎어진 건지 잔뜩 깨져 딱 보기에도 아파 보이는 무릎을 걸고 넘어지자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것 같던 코즈메가 얌전해 졌다. 엎어줄까? 히나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젖는다. 아쿠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일단 젖은 볼을 닦아줬다. 세상에, 손수건이라니. 야쿠 씨는 상냥하고 세심한 사람이야…. 손길을 따라 휘청거리던 히나타의 젖은 눈이 야쿠의 얼굴을 멍하니 따라갔다.

 그래서 왜 울고 있었던 거야. 양호실까지 가고 싶었지만, 어차피 점심시간이라 잠겨 있을 것 같아 가까운 부실로 자리를 옮겼다. 운동부답게 기본적인 구급약품들은 항상 상비해두는 편이었다. 색도 무시무시한 소독약을 바르자 낑낑거린다. 오죽이나 아플까. 피부가 다 벗겨졌다. 안쓰러운 마음에 코즈메에게 봉을 다시 들려 3층으로 보내고 싶지만 코즈메의 소매를 꼭 잡고 있는 히나타 때문에 야쿠는 부득부득 참았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인…, 잠깐. 혹시 쿠로오가 무슨 짓을,”

 “아, 아니에요!”

 히나타가 손을 뻗어 휘휘 저었다. 격렬한 부정에 두 사람의 눈썹이 점점 올라가는 줄도 모르고 히히, 웃기까지 한다.

 “그냥….”

 울던 걸 들켜서 그런지, 머쓱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던 히나타가 손을 다소곳이 허벅지 위로 모았다.

 “역시 쿠로오 씨한테 나 같은 꼬맹이는 어울리지 않는 걸까…, 생각해서요. 그래서 우울해져서….”

 또 뚝뚝 울 것처럼 호두턱을 만드는 히나타의 입술을 야쿠가 거즈를 붙이다 말고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옆에 나란히 쪼그려 앉아있던 코즈메가 눈썹을 찌푸렸다.

 “같이 놀고 싶은데, 같이 있고 싶은데 공부하라고…, 그리고 저는 뽀뽀도 자꾸 하고싶은데, 맨날 꼬맹이라고 놀리면서 잘 안 해주고요! 또, 또, 돌아갈 때 손도 잘 안 잡아 주시고…. 그리고, 그리고….”

 히나타가 한참이나 우물거리며 머뭇거리더니 이내 깊게 파묻은 속마음을 토해내 듯 꺼냈다.

 “쿠로오 씨 항상 인기 많고…, 저랑 놀 때보다 다른 사람이랑 놀 때 더 즐거워 보여서….”

 말을 할수록 목소리는 구석으로 기어들어갔고, 귀가 새빨개지고, 목은 점점 안으로 움츠러들어 거북이처럼 말렸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체구의 히나타가 몸을 점점 말며 웅크리니 안쓰럽기도 하고, 무릎까지 옴팡지게 깨져오니 가엽기도 하고. 야쿠는 말리는 하얗고 마른 다리를 애써 붙잡으며 거즈 위에 테이프를 덧댔다.

 무릎을 올려 치마가 내려가자 코즈메가 라커 안에 걸려 있던 자신의 저지를 꺼내 와 무릎 위로 덮어주었다.

 사귀기 시작한지 겨우 2개월, 첫만남은 겨우 일년도 되지 않는다. 같은 고등학생이라도 아이는 중학교를 갓 졸업한, 세상에 좋은 것과 행복한 것들만 보았고, 또 그것만 믿는 처연한 16살. 첫 연애라고, 말하지 않아도 눈에 빤히 보인다. 물론 교실도 층이 다르고, 둘 다 부활동 시간에 잡담을 하거나 노닥거리는 타입은 아니었기 때문에 사귀기 시작한 뒤로도 배구부원들이나 네코마 고교 학생들이나 둘이 사귀는 것을 몰랐다지만, 주장은 티를 내지 않았고, 어린 소녀는 티를 내는 법을 몰랐다.

 쾅, 교사 밖에서 무언가 크게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크게 발 구르는 소리가 철제 계단을 내려오는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고 이내 문이 열렸다. 낡은 문의 경첩이 애처롭게 내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코즈메와 야쿠가 일어났다.

 “히, 히나타. 울, 울었어?”

 어디서부터 뛰어왔는지, 헉헉대며 숨을 제대로 고르지 못하던 쿠로오가 간신히 말했다. 큰 소리에 깜짝 놀란 히나타가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하자 애가 탔는지 비틀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에 비해 상대방은 이제 스무살 언저리에 놓인, 졸업을 앞둔 18살. 심지어 몸보다 정신이 더 성숙한. 누군가 이야기 하길 고작 2년차이란다. 하지만 히나타의 눈에는 이역만리보다 하염없이 멀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마음을 주체 못하는 어린 마음이 얼마나 불안해 했겠는가. 쏟아지는 벚꽃 아래에 자신보다 더 크고, 아름답고, 성숙하고, 훨씬 똑똑해 매력적인 선배들에게 몇 번이나 불려 나가던 사람의 뒷모습이 얼마나 망막에 오래 맺혀 있었는지. 졸업이 다가오고 벚꽃대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뒤뜰에 그가 불려 나가는 횟수만큼 비례하는 불안감이 히나타를 덮쳤다. 당사자를 보자 그간의 설움이 잔뜩 들어간 눈물만 뚝뚝 떨궈냈다.

 쿠로오는 얼마나 뛰던 것인지 헐떡대며 거의 부실을 기듯이 가까이 다가왔다. 부은 눈을 보고 안절부절 못하다가 이내 반쯤 내려간 코즈메의 저지 아래 무릎이 피에 흠뻑 젖어 있자 얼굴이 창백해 졌다.

 “히나타, 히나타. 왜, 왜 그래? 누가 괴롭힌 거야?”

 어쩔 줄 몰라 하던 손이 다리 언저리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쿠로오의 손을 핀다면 쏙 모아지는 여린 무릎이었다.

 

 첫 고등학교, 첫 학기, 첫날,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교문에서 크게 넘어져 부끄러워 일어나지 못하는 히나타를 일으켜 세워준 손은 지금도 여전했다. 좋아하는 마음은 커져갔고, 결국 그 불안감을 견디지 못해, 16년 인생 모든 용기를, 모든 운을 바닥까지 닥닥 긁어 모아 했던 고백. 고백한다면 거진 반절을 사귄다는 네코마의 가장 유명한 장소인 뒤뜰따위 걷어차고 겨우 말을 내뱉을 수 있었던 것은 오후연습 전의 아주 잠깐의 시간. 거절의 말을 듣고 속절없이 울어버리자 화들짝 놀라 달래 주던 커다란 손. 엉엉 울며 사귀어 주지 않는다면 평생 미워하겠다는 그 철없는 말에 잔뜩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더니 이내 그러자고, 사귀어 주겠다고 했다.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떼를 써서 얻어낸 결과물은 이 즈음 내리는 서리만큼이나 얄팍하고 금방 녹아버리는 것이어서 히나타는 최선을 다했다. 겨우 2개월이 지났을 뿐이지만, 누구보다 쿠로오를 사랑하고, 누구보다 헌신하며, 그리고 누구보다 소중이 대해 줄 자신이 있었다. 물론 자신감 만으로 모든 것이 잘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손을 잡는 것에 이주일이나 걸렸던 두 사람은, 히나타의 적극적인 뽀뽀 요구에 쿠로오의 목이 점점 뒤로 빼는 일을 반복했다. 집 근처까지 같이 가주는 남자는 다정했지만, 히나타에게 그 어떠한 연인의 일도 요구하지 않았다. 살며시 접히는 눈꼬리에 애정이 묻어 있었지만, 글쎄, 연치 꽤 나는 여동생에게나 할 법한 웃음이다. 날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건 히나타 뿐인가보다. 사귀기 시작한 이후로도 종종 네코마의 뒤뜰로 불려 나가는 쿠로오를 보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는 걸 보면 말이다. 엉엉 우는 걸 코즈메에게 들킨 이후에 코즈메는 불편한 얼굴로 끙끙거리더니 한참만에 말을 했다.

 쿠로가 네 것이라고 주장해. 너에겐 그럴 권리가 있지 않을까. 쿠로의 여자친구는 너야.

 네코마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은 코즈메라고 믿고 있는 히나타가 무의식 중에 고개를 위아래로 격렬하게 끄덕였다. 내 것이라고 도장을 찍으러 가야지! 겁도 없이 3학년 교실을 척척 올라갔고, 그리고 마주친 건 예쁜 선배와 다정하게 웃고 있는 남자친구. 서러웠던 마음에 가시가 비죽 돋아났다.

 …그래서? 그래서 포기 할 꺼야?

 잔뜩 젖어 축 늘어진 눈꼬리가 앙칼지게 올라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안절부절 무릎 위를 배회하던 손을 히나타가 낚아 잡아챘다.

 “나는!”

 냉한 부실의 온도 때문인가, 쿠로오의 땀이 금새 말라버렸다. 사실 히나타는 떼를 써서 그를 얻었던 아니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 옆에만 있으면, 누가 욕을 하던 무슨 말을 하던 상관 없었다.

 내 옆에만 있으면.

 “쿠로오 씨는 내 꺼야! 그러니까 여자들 하고 그렇게 웃으면서 이야기 하지마요! 다른 선배들 하고 뒤뜰 가지마요. 어차피 그거 다 고백하는 거야. 실습하고 남았다고 주는 과자 다 받지 마요! 다 사심 있어서 주는 거니까. 왜 나랑 사귀면서, 왜, 왜….”

 내가 불쌍해서, 떼써서, 졸업하면 볼 일 없어서 사귀어 주는 거라도 좋아. 그 때까지는 내거니까. 작은 손으로 얼마나 꽉 쥐었던 것인지 쿠로오의 손으로 자신의 손톱이 파고드는 줄도 몰랐다. 쿠로오는 알알이 박히는 손톱을 알고 있음에도 작게 숨을 색색 내쉬며 히나타의 머리를 쳐다보았다.

 떼를 써서 사귀어 주는 거 알아요. 상관없어. 그렇게 해서 곁에 머물 수 있다면. 아이취급 해도 좋아. 얼마나 밑바닥을 보여줄 것인지, 스스로도 부끄러워 히나타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그래, 그래도 다 상관 없었다. 쿠로오의 반대편 손이 슥 올라와 히나타의 고집스런 손등을 덮었다. 굳은 살이 박힌 거친 손이 손등을 쓸자 히나타가 주절주절 말을 하다 말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야쿠가 말하길, 주장인 쿠로오 테츠로는 험악한 인상과 달리 물러 터졌다고 그랬다. 의외로 길 잃은 꼬마를 지나치지 못한 다거나, 고지식하게 쓰레기 한번 길가에 버린 적도 없었고, 횡설수설하는 친구 앞에 시간을 들여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대부분은 좋게 말해 자상했다. 오지랖이 넓다 하면 넓었지. 그걸 꼭 이용해 먹고, 그리고 뻔한 수작질에 걸려드는 멍청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여자친구가 있는데도, 뻔한 수작에 걸려들어가던 아까 그 장면처럼 말이다.

 .

 .

 .

 …정말?

 공을 한 손으로 잡는 것이 멋지다고 방방 뛰어 대던 신입생을 꼬마라고 그렇게 놀려 대던 쿠로오가 조작조작, 어울리지도 않게 아이에게 손을 잡혀 배구부원들에게 걸어올 때. 코트와 팀메이트들을 바라보던 그 무감정한 눈빛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작은 등을 좇았을 때. 앞서 뛰어나가던 히나타의 뒤가 아니라 그를 따라 옆에 서 있을 때. 조잘거리는 이야기를 더 잘 들으려 아이가 말 할 때마다 무릎을 굽혔을 때. 매니저가 주장의 저지를 입고 있을 때. 식탐 많은 아이에게 좋아하는 반찬을 양보할 때. 자판기에서 뽑을 주스캔이 1개가 아닌 2개로 늘어났을 때. 햇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에서 굳이 해를 등지고 그림자를 만들어 줄 때. 쿠로오가 눈꺼풀 사이에 숨겨놓은 그 수줍은 마음이, 그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커져 차마 숨기지 못하고 알알이, 새어 나왔다.

 사랑받는 당사자도, 주변 사람들도 대부분 알아차리지 못한 마음이.

 아무리 물러 터지고, 아무리 자상해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사귀지 않아.

 하얗게 질린 작은 손을 쿠로오가 두 손으로 감싸 앉았다.

 “너에게 폐가 될까 꾹 숨겼는데, 서운해 할 줄은 몰랐네.”

 땀범벅의 쿠로오가 고개를 깊게 숙이고 헐떡거렸다. 마주잡은 손이 단단했다. 히나타의 젖은 눈이 동그랗다. 하루종일 얼마나 애를 태우며 울었을까. 커다란 눈이 녹아버리면 어째. 숨을 몰아 쉰 쿠로오가 머리를 들었을 때는 웃음기가 싹 가신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아니, 좀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고요한 눈동자가 시퍼렇게 타오른다. 방금 전까지 활활 타오르던 히나타의 마음에 누가 찬 물을 들이 부은 것 마냥 싸늘하게 식었다. 미묘한 표정을 지은 코즈메가 슬슬 히나타의 옆에서 멀어졌다.

 “네가….”

 쿠로오는 말을 골랐다.

 “네가 날 부끄러워할까 봐 말하지 않았어. 내가 먼저 졸업하고 헤어지게 된다면 네 학교생활에 흠이 되지 않게.”

 쿠로오의 손 안에 잡혀 있던 하얀 손이 부들거리며 떨리다가 휙, 쿠로오의 손을 내쳤다. 나쁜 것을 굳이 찾기보단 좋은 점을 먼저 발견해 내곤 하던 그 처연한 눈동자에 매달려 있는 것이 절망이라면, 상대방은 얼마나 나쁜 새끼여야 할까. 쿠로오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이 그저 선배의 동경이라고.”

 허공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애처롭다. 야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망할 주장.

 “언젠가 헤어질 수 있다는 마음 가짐으로.”

 “이…!”

 쿠로오는 그 손을 잡아채 품안으로 꽉 이끌었다. 가는 몸뚱어리는 맥없이 쿠로오의 품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조그맣다 놀려대면 눈을 홉 뜨고 대거리를 해댔지만 도대체가 반품에도 못 들어오는 작달막한 연인은 벚꽃이 눈송이로 바뀔 때까지 채 손한마디를 자라지 못한 것 같았다. 맞닿아 있는 심장이 빠르게 뛴다. 들숨날숨, 자신보다 빠른 템포가 불안에 힘을 줘 꽉 껴안았다. 작은 동물 같았다. 원망하며 바르작거리는 아이를 더욱더 꽉 껴안았다.

 “그래서 네가 이별을 고할 때 너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려고, 최대한 깔끔하게 헤어져 주려고 그랬는데.”

 앉아서 껴 안아야 겨우 가슴팍쯤 오는 작고 동그란 머리에 볼을 기댔다. 팔딱팔딱, 뛰는 심장. 소금기 맺힌 울음이 마음이 아팠다.

 “그런 쿨하고 어른스러운 선배가 되고 싶었는데.”

 꼼지락거리는 아이가 머리를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못돼서 미안해.”

 “…네?”

 후. 쿠로오가 씩 웃었다. 올려다보는 얼굴이 엉망이다. 눈은 벌써 빨갛게 변해 있었고 볼은 추운데 잔뜩 젖기까지 해 얼어붙은 살가죽이 아프게 일어나 있었다. 애기풀꽃 같은 코에서 맑은 콧물이 주르륵 흘렀다. 씩 웃은 쿠로오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헤진 코밑을 살살 닦아주었다. 킁, 해. 차마 좋아하는 사람의 새하얀 손수건에 콧물을 뭍이는 생각을 해본적도 없는 히나타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어봤지만 단단한 품안에서 조그마한 움직임도 버거웠다. 결국 줄줄 흐르는 콧물을 어쩌지 못하고 킁, 하고 크게 풀자 쿠로오가 작게 웃으면서 마저 닦아주었다.

 “쿠, 쿠로오 씨.”

 바로 몇 달 뒤에 졸업해 가버리는 자신은 이제 대학생. 온몸이 귤처럼 변하며 조작조작 고백해온 연인은 이제 겨우 1학년. 아아, 사람이란 어째서 항상 최악의 시나리오를 먼저 생각해 놓는 걸까.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말이다. 사랑에 빠지는 건 순간이었지만 환하게 웃는 히나타를 보며 드는 생각은 항상 최악의 것이었다.

 그래, 중학교때 시골에서 살다 온 히나타는 제대로 된 선배가 없었다고 했었다. 첫 부활동, 첫 소속감, 첫 선배. 처음은 설레고 멋져 보이지. 비록 짧은 기간밖에 유효하지 않는 콩깍지였지만. 히나타가 좋아하는 티를 그렇게 내도 쿠로오가 침묵한 건 단순히 그가 눈치가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많아서.

 처음 네가 고백해 왔을 때, 그 우연히 만나 체육관으로 가는 그 짧은 길에 수줍게 고백해 온 아이에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려고 손으로 입을 틀어쥐었다. 맙소사, 그리고 입에서 멋대로 튀어나오는 거절의 말.

 멍청한 새끼, 굴러들어오는 금덩이를 차버린 정신나간 새끼. 전혀 다른 말을 뱉고 싶어 덜덜 떨리는 입술을 가로막은 건 마음 한구석에 남은 양심 한 톨.

 히나타는 어려. 처음이란 단어에 지금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겠지. 한달 뒤에는 어떨까. 두 달 뒤에는? 세 달 후엔? 내가 졸업하고 거리가 멀어지면? 같은 도쿄 안이라도 지금처럼 계속 만날 수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어. 히나타는 사랑스러운 소녀다. 사랑받아야 마땅한 아이. 사귀기 시작하면 온전히 사랑하는 그 눈동자를 독점할 수 있겠지. 보드라운 머리카락도, 커다란 눈동자도, 코도, 입술도, 팔도, 다리도, 다. 그리고 히나타의 모든 걸 알고 나서는 이미 늦었겠지. 그 때는 헤어지자고 네가 말해도 절대 못해.

 절대.

 미워하겠다는 귀여운 말과 함께 나온 두번째 고백은 쿠로오의 그 쌀알만한 양심 한 톨을 마저 짓밟았다. 알아, 닥치고 있어. 불안과 양심을 꾹꾹 내리 눌렀다. 좋아 죽으려는 입꼬리를 겨우겨우 내리 눌렀다. 마지막 비명을 내지르며 남긴 건 겨우 주변에 사귄다고 알리지 않기, 스킨십 하지 않기, 둘만 남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억지로 끼워진 코즈메는 잔뜩 불편해하고 귀찮아 했지만 쿠로오는 속으로 크게 안심했다. 티가 나지 않게 자신을 제어 할 수 있었으니까.

히나타의 뜨끈한 얼굴에 키스했다. 이마에도, 눈두덩이에도, 콧잔등에도, 입주변에도 잔뜩. 의심을 가득 품은 눈동자는 의외의 스킨십에 이내 헤롱헤롱 풀려간다.

 브레이크마저 없다면 너를 속절없이 사랑하는 내가, 네가 마침내 이별을 고했을 때 너무 비참할 것 같아서. 히나타가 뒤에서 우는 줄도 모르고 자신의 체면, 자신의 감정, 자신의 상황만 밀어 부쳤다.

 “이제 그만 할거야. 널 사랑하는 걸 억지로 참는 거.”

 아리송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던 히나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쿠로오가 대체 이 대낮에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반절도 이해못한 표정이었지만 마지막 말은 어렴풋이 무슨 뜻인지 알아챈 모양이다. 하루종일 울상이던 입꼬리가 오늘 처음으로 비실비실 올라갔다. 팔이 쑥 올라와 쿠로오의 몸을 마주 꽉 안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아무래도 좋았다. 마주보는 사랑하는 눈꼬리에 사랑이 올망졸망 매달려 있었다. 이내 참을 수가 없어 주르륵 흘러 넘쳤다. 막아보려 댐을 억지로 쌓아 올린 쿠로오의 노력도 다 소용없었다.

 “쿠로오 씨, 이제, 그럼 이제 쿠로오 씨랑 다른 여자 선배들이랑 밥 안 먹어요? 네? 네? 이야기도 안 하고? 그리고 선물 같은 것도 안 받고?!”

 엣, 나 그런 적 없어. 있는데! 만날 고백 받으러 뒤뜰에 갔는데! 내가 봤는데! 이야기 하지 말라는 건 무리 아닐까…. 아 빨리 대답해 줘요, 할 거예요? 이제 안 할 거죠! 네, 네?!

 이제 온전히 제 품이 된 쿠로오의 튼실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마구 비비며 히나타가 칭얼거리 듯 재촉했다. 일상 대화도 안 돼? 안 돼! 왁왁 소리지르며 히나타는 결국 약속을 받아냈다. 무슨 소린고 하니 이제 쿠로오는 히나타의 눈에 가시처럼 콕콕 박힌 사람들과 더 이상 대화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히히, 얻어낸 약속에 기분이 좋은 히나타가 궁둥이를 실룩거렸다.

 웃다가 울면 엉덩이에 뿔나는데, 우리 꼬맹이. 쿠로오 씨가 뿔났는지 안 났는지 확인해 줄까? 꺄아악, 히나타가 깔깔 웃으며 뒤로 넘어가는 걸 쿠로오가 가득 다시 끌어 안았다.

 쿠로오가 손수건을 꺼낼 때쯤 “엑”하는 표정으로 슬슬 자리를 옮기던 코즈메와 야쿠의 표정이 쩌적쩌적 굳어갔다. 으으, 빨리 나가자. 야쿠의 시선에 코즈메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문으로 발을 옮길 때 신성한 부실에서 꼭 붙어있던 두 사람도 일어서려 했다.

 “좋아…. 그럼, 히나타. 우리 타케시부터 조지러 가볼까?”

 “타케시?”

 “그 육상부 주장말이야. 월요일마다 널 데리고 가겠다고 오던.”

 “쿠로오 씨, 그 선배랑 친한 거 아니었어요?”

 “선배라니. 걔를 선배라고 부르지 마.”

 “쇼요…!”

 쿠로오가 주섬주섬 일어나며 여전히 주저 앉아있는 히나타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가뿐하게 일으켜 세우려고 할 때 부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코즈메가 흔치 않은 격양된 목소리로 히나타를 불렀다. 멀뚱멀뚱, 나란히 쳐다보는 저 바보 같은 커플을 위해 코즈메는 손가락으로 히나타의 무릎을 친절히 가리켰다. 야쿠가 옆에서 헉, 하고 헛바람을 삼켰다.

아까 앉은 상태에서 히나타를 쿠로오가 끌어당겨 바닥에 무릎을 비빈 건지 잘 붙여 놨던 거즈와 테이프는 어디 가고 겨우 지혈했던 무릎에서 피가 다시 줄줄 나고 있었다.

 히이익, 코즈메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한참이내 내린 쿠로오도 터진 상처를 발견했는지 순식간에 얼굴이 새하얗게 굳어버렸다.

 “아, 괜찮아요. 어릴 때 많이 넘어져 보기도 했고 이런 상처는 많이,”

 “히, 히나타! 야야아앙호실 가자!”

 채 히나타는 말을 끝낼 새도 없이 팔랑거리는 나뭇잎 마냥 쿠로의 등에 업혔다. 하등 히나타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움직임이었건만 체격 차이 때문인가 부드럽게 등에 안착했다. 허둥지둥 히나타를 업은 쿠로오가 반쯤 열려 있던 문을 박찼다. 쿵, 너덜너덜하던 경첩이 기어이 부서지며 문의 윗부분이 덜렁거렸지만 쿠로오의 안중에도 없었다. 무릎에 피가 철철 나는 히나타도 하루 종일 울상인 얼굴에서 이제야 뭐가 그리 재미난 지 깔깔거리면서 웃고 있었다.

긴 짝사랑이 이제야 제대로 끝났기 때문이다.

Copyright ⓒ 2018 CAPTAINHINADAY Collaboration all rights reserved
Sources by Freepik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