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히나]
봄
W.말로 (@mallo_HQ)
"사와무라 선생님, 안녕하세요!"
허리를 굽혀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가는 주황빛 머리와 이름처럼 햇살 같은 미소는 누가 봐도 히나타 쇼요다. 매일 아침 보는 모습이지만 매일 아침 더 사랑스러워, 다이치는 심장 한쪽이 떨어짐과 함께 양심이 쿡쿡 찔림을 느낀다. 학생을 데리고 무슨 생각하는 거야, 다이치. 너 이런 사람 아니잖아. 학생을 좋아한다고 하면 경악할 제 친우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히나타가 지나간 자리에 잔향처럼 남는 따스함을 무의식적으로 찾는다.
잡생각을 뒤로하고 하루 수업을 확인한다. 배구를 했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이들에게 자기가 느꼈던 벅참을 가르쳐 주고 싶다는 일념으로 고등학교에 체육 교사가 된 다이치는 오늘도 바쁘다. 오늘은 3학년 4반, 2학년 3반, 5반, 1학년도 수업이 있네. 마침 지금 하는 스포츠가 배구라, 다이치의 모교이기도 한 카라스노 체육관에 익숙한 배구 네트를 설치하고 앉아있으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소심한 에이스였던 아사히, 누구보다 건실했지만 절대 안주하지 않았던 스가와라, 차기 주장 엔노시타, 열정적이었던 타나카, 수호신 니시노야, 성실했던 키노시타와 나리타. 눈을 감으면 팀의 지지대, 주장, 땅이었던 자신과, 날아오르던 까마귀들, 빛나던 코트와 절대 바닥에 닿은 일이 없도록 쫓았던 그 공이 그려진다.
그리고 요새 보이는 또 한 명. 1학년이라 아직 키는 작지만, 나는 날 수 있다고 하는, 그 누구보다도 높게 뛰는 아이. 히나타가 도움닫기를 하고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면 자기도 코트 위에 서 있다는 착각이 들곤 했다. 그래서일까. 분명 같은 팀이 아니었는데, 눈을 감으면 히나타가 같은 팀에 서 있다. 카라스노 유니폼을 입고 자기가 리시브한 공을 속공으로 넣는다. 이건 가상이다. 현실이 아니야. 하지만 눈앞에 잡힐 듯 생생한 환상과 코를 찌르는 에어 파스 냄새는 다이치를 속절없이 흔든다. 아직 1학년, 거기에 첫 학기라 히나타는 운동부를 정하지 않고 여러 종목을 시도하고 있고, 시도하는 종족마다 히나타를 탐낸다. 야구에서는 홈런이었을 공을 당연하다는 듯이 뛰어올라 잡아내지를 않나, 타고난 동체시력으로 고등학생 중에서도 에이스인 타자의 공을 쉽게 쳐내 그 자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을 정도다. 게다가 발은 또 어찌나 빠른지, 도루하면 실패라는 걸 몰랐고 슬라이딩 캐치도 곧잘 해냈다. 키가 중요한 농구에서도 쏜살같이 나타나 상대 팀의 패스를 가로챘고, 높게 뛰어 골대를 향하는 공을 가져왔다. 게다가 히나타는 성장판이 닫히지 않아, 앞으로 많이 클 거라는 의사의 말을 들은 농구부는 히나타를 차기 유망주로 점찍어둔 상태다. 테니스는 경기 한 번 보고 스플릿 스텝을 혼자 익혀오더니 공을 향한 어마어마한 집착을 발휘해서 코트를 누비는 모습이 순간이동을 보는 듯하다. 축구는 히나타가 있던 반이 이기는 게 당연한 절차일 정도로 공 컨트롤도 뛰어났는데, 공을 차기 전 그 짧은 순간에 골대의 공간이 빛났다고 한다. 타고났어, 쟤는. 자전거를 타고 산을 넘어 학교를 온다더니, 육상에서도 두각을 보였을 만큼 지구력과 스피드 둘 다 탄탄하다. 게다가 마지막에 속도를 늦추는 대신 올려야 한다는 것을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실천하는 모습에서 떡잎부터 다르다는 말까지 나왔다. 체조는 또 어떤가. 마르지만 가볍고 균형 잡인 근육들, 한 번 가르쳐 주면 곧잘 해내는 감각까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둘 다 완벽하니 키워보고 싶다는 코치들이 줄을 섰다.
이렇게 종목별로 탐내는 히나타는 코치들의 배려를 받아 매일 다른 스포츠 동아리를 놀러 가 이것저것 시도하고, 배우고, 고민하고는 했다. 그런 히나타가 요새 가장 흥미있어하는 건 배구 동아리. 다이치가 있기 전에는 꽤 강했다고 한다. 작은 거인이 있었던 카라스노의 배구부는 그의 졸업 이후 점점 약해지기 시작해, 지금은 존폐의 위기에 놓여있다. 다이치가 선생님으로서 온 힘을 다하지만 코치를 구하는 것도, 아이들을 모으는 것도 다 힘들고 어렵다. 그러나 다이치는 이미 배구에 빠진 지 오래여서, 오기로라도 사비를 투자해가며 연결해온 동아리에 그 히나타 쇼요가 매일 오니 학교 내에선 이미 소문이 자자하다.
"선생님!"
"오늘도 왔어?"
"당연하죠! 토스 올려주세요!"
고등학교 때에는 리시브와 스파이크만 많이 연습했지만, 아무래도 체육 교사라 토스도 종종 올리다 보니 이젠 제법 안정적인 토스를 올리는 다이치는 히나타가 스파이크를 칠 때마다 감탄한다. 사람이 저렇게 높게 뛸 수 있구나. 쟁쟁한 선수들의 경기는 많이 봤지만, 히나타만큼 존재감을 내뿜는 선수는 드물 거다. 타점을 조금 더 높게 올려줘도 당연하다는 듯이 친다. 리시브는 아직 서툴지만, 공을 쫓는 집념과 끈기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스파이더맨을 연상시키는 무모한 플레이도, 몇 번 만에 익숙해진 플라잉 리시브도, 모두 히나타답게 완벽히 해낸다. 역시 다들 탐낼만해. 체육 선생님으로서 다양한 종목을 추천하고, 스트레칭과 체력 단련 훈련도 도와주지만, 히나타가 배구를 했으면 하는 욕심은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이 선생을 해도 되는 건가. 괜스레 자괴감이 들지만, 히나타가 날아오르는 모습은 빛날 만큼 아름다워, 눈을 뗄 수가 없다.
"토스 5개만 더 올려주세요!"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부원들은 익숙하게 연습을 잘하고 있어 괜찮을 것 같다. 히나타의 5개는 5개가 아님을 경험으로 알지만, 그럼에도 올려주게 된다.
"그래."
"감사합니다!"
히나타 학생은 인사성이 참 밝아. 교장의 흐뭇한 한마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배구 재밌어요!!"
집 가는 길이 어두운 게 걱정돼 데려다 주겠다고 하니 말리던 히나타를 무시하고 고기만두를 입에 물려주며 같이 걸어간다. 뜨거운 만두를 호호 불어가며 두 볼이 빵빵하게 복스럽게 먹는 모습이 사람을 잘 따르는 강아지를 연상시킨다.
"배구는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스포츠야. 이 경기 한 번 봐봐."
"이게 뭐예요?"
"예전에 녹화한 걸 겨우 찾아서 CD로 구운 건데, 예전에 우리 학교에 작은 거인이라고 불렸던 선수의 전국 대회 경기야. 우리 학교의 옛날 라이벌이였던 팀이 네코마인데, 우리 학교가 까마귀고 그쪽이 고양이라 쓰레기장의 결전이라 불렀었어."
"오오오---!! 신기해요! 잘 볼게요!"
가방에 소중하게 넣으며 이제 거의 다 왔으니 선생님도 어서 집으로 가시라고 하는 히나타의 눈빛이 꽤 단호해, 거기서 헤어진다.
이런 플레이가 있다니.
키가 더 클 것이라는 말은 모든 의사가 했다. 차기 스포츠 유망주로서, 키는 선택폭을 넓혀주는 중요한 스펙이라고 생각한다. 옛날 영상이라 화질은 좋지 않지만, 카라스노 유니폼 10번을 입고 날아다니는 선수가 키가 2m가 넘는 상대편의 블로킹을 비웃듯이 따돌리고, 강스파이크라 생각하면 페인트를 하고, 뒤를 돌면서 리바운드를 하지 않나, 능숙하게 블로킹 아웃을 노리기도 하며 공중에서 코스도 당연하다는 듯이 바꾼다. 손바닥으로 공을 내려치는 쾌감이 좋아 배구를 할 때마다 스파이커를 선택한 히나타는 공중에서 싸우는 방법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몰랐다. 배구부에 놀러 가면 보통 다이치가 토스를 올려주는 것만 치고 돌아왔지만, 이젠 자신도 팀에 녹아들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배구는 연결하는 스포츠라는 사와무라 선생님의 말씀이 처음으로 가슴에 와닿는다. 공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는 랠리가 끝나지 않는다. 영상을 보다가 공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발을 대서라도 올리고, 그 공 하나를 올리기 위해 다들 그렇게나 노력한다. 킬 블로킹을 성공한 작은 거인의 뿌듯한 표정이 잔상처럼 눈앞에 아른거린다. 나도, 나도. 키는 자신과 비슷하지만 어디선가 뿜어나오는 듬직함은 제가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분위기다. 그 경기를 본 후 히나타는 결정한다. 나는, 배구를 할 거에요.
"감사합니다, 잘 봤어요!"
"그래? 어땠어?"
"저 배구할래요! 입부 신청서 써왔어요!"
건네는 종이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히나타 쇼요, 1학년 같은 이미 아는 인적 사항이 적혀있다. 경기를 보여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 걱정부터 앞선다.
"정말? 입부하면 다른 스포츠는 한동안 못할 수도 있는데?"
"괜찮아요!"
"히나타, 입부는 좀 더 신중하게 정해야 해. 특히 넌 고등학교 때 했던 스포츠로 프로로 데뷔할 수도 있잖아?"
"그래서 배구를 선택했어요!"
"하루 만에?"
"네! 배구는 매력적이에요!"
그리고 키가 더 안 크더라도 충분히 싸울 수 있어요! 덧붙이는 말에 살짝 마음이 아리다. 신경 안 쓰는 게 아니었구나. 더 클 거라는 말은 몇 년째 들어왔지만 히나타의 키는 중학교 때의 비해 많이 크지 않았다. 만약 키가 크지 않으면 어떤 스포츠를 해야 하지. 우유도 마시고, 운동도 하고, 잠도 충분히 자고 밥은 어지간한 사람보다 많이 먹는데 키가 안 크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런데 배구는, 키가 크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블로킹을 하더라도 타이밍만 잘 잡는다면 충분히 킬 블로킹도 노릴 수 있을 거라 생각돼서 두근거린다.
"미들 블로커가 하고 싶어요!"
"작은 거인처럼?"
"네!! 그러니까 받아주세요!"
생각보다도 더 좋은 결과다. 최근에 자주 배구를 하기는 했지만, 절대 배구에 "빠져든" 모습이 아니었던 작은 까마귀가, 날개를 활짝 펼 준비를 하는 징조다. 그렇다면 나는, 너의 활주로가 되어줄게.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해, 히나타."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선생님!!"
꾸벅 인사를 하고 수업이 있다고 총총 뛰어간다. 다이치는 부실에 돌아가자마자 히나타를 위한 유니폼을 주문한다. 등 번호는 당연히 10번, 사이즈는 스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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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히나타와 다이치는 더욱 친해졌다. 다이치도 어차피 산을 하나 넘어 집에 가는 처지였기에, 같은 길을 걸어가며 고기만두를 사줬다. 편애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히나타는 매일 가장 늦게까지 남아 뒷정리를 도와줬고, 따로 스파이크를 연습했고, 다이치의 주특기이자 히나타가 가장 경험이 부족한 리시브 연습을 했기에, 그런 모습이 기특해서라도 사주고 싶었다. 배구를 선택했다는 소문이 들리자 다들 굉장히 아쉬워했다. 중학교 때 두각을 보였던 스포츠가 한두 종목이 아니었기에, 왜 굳이 배구를, 이라는 말이 제일 먼저 나왔지만, 히나타는 웃으며 제 첫 경기를 보면 그런 말씀 못 하실걸요! 라고 당당히 말했다. 학기 도중인데도 불구하고 빠르게 팀에 융화되는 걸 보니 천성이 착한 게 또 기특했다. 둘은 돌아가는 길에 여러 얘기를 나눴는데, 히나타가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는 다이치가 고등학교 때 농구부 주장과 점심 쟁탈전을 벌이다 실수로 비상벨을 눌러서 선생님께 엄청나게 혼났다는 일화였다. 히나타는 선생님은 고등학교 때에도 뭔가 어른스러우셨을 줄 알았는데, 선생님도 사람이시구나 싶다며 까르륵 웃었는데, 그게 얄미울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보다 히나타, 너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니. 어릴 때부터 이름처럼 듬직하다, 어른스럽다는 말을 들으며 자라온 다이치지만, 히나타에게까지 그렇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어른이니 당연히 더 성숙해야 하지만, 딱 나이 차만큼만 더 성숙하고 싶었다. 히나타가 편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히나타가 들어온 이후 배구부는 빠르게 성장했다. 처음 배구를 배워서인지, 히나타의 플레이에는 형용할 수 없는 유연함이 담겨있었다. 완벽한 폼이 아니지만 리시브를 했고, 테니스가 아니지만 스플릿 스텝을 썼으며,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공도 뒤쫓아 쳐냈다. 테크닉 자체는 발전할 여백이 많았지만, 죽어가던 배구부에 히나타는 활기를 불어넣어 줬다. 게다가 몇 달의 설득 끝에 전 우카이 전 코치의 손자도 코치하기로 했었고, 히나타는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배구부 입부를 망설이던 츠키시마와 야마구치까지 끌고 왔었다. 2학기에는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천재 세터가 전학을 왔었어, 카게야마의 날카로운 토스와 히나타의 무지막지한 믿음은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켰고 그로 인해 그 누구도 더는 카라스노를 몰락한 강호라고 부를 수 없게 됐다. 다이치는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보며, 이 아이들이 자기와 함께 배구를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같은 상상을 할 때가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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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마음대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지 않았으면 하는 해들은 빠르게 지나갔고 그 별 볼 일 없던 나날들은 길게 늘어졌다. 히나타가 1학년이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오늘이 벌써 졸업식이다. 늠름한 주장으로 성장한 히나타는 고기만두를 얻어먹는 게 아니라 사주는 입장이 됐고 (용돈의 절반을 쓴다는 소문을 들은 이후는 다이치가 내줬지만), 후배들이 의기소침하면 진심 어린 칭찬으로 북돋아 줬고, 탄탄한 실력으로 후배들을 밑받침해줬던, 그러면서도 점수를 가장 많이 땄던 에이스다. 키도 많이 컸고, 실력도 출중하니, 당연히 카게야마랑 같이 국가대표로 스카우트됐다. 츠키시마와 야마구치도 프로팀에서 계속 배구를 할 거라 했으니, 다이치는 이 졸업식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자기 밑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훌륭한 선수로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그리고 그런 아이들의 빼어난 플레이를 보는 것은 직접 뛰는 경기와는 또 다른 긴장감과 벅참을 안겨줬다. 훨훨 비상한 까마귀들을 이제는 놓아줘야 할 때라 슬프면서도 얼마나 넓은 세상에서 날아다닐지 생각하면 또 뿌듯해, 복잡 미묘한 기분으로 졸업하는 부원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뜯어본다.
그중 가장 눈길이 가는 건 당연히 히나타다. 해가 땅으로 지고 땅에서 다시 솟아나듯이 히나타와 다이치의 일상은 서로가 없음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엉켜져 있었다. 아침마다 같이 로드워크를 했고, 다이치가 히나타의 스트레칭을 도와줬고, 아침 훈련, 부 활동, 활동 후 추가 연습, 집에 데려다 주기까지 했었다. 나중엔 카에야마도 추가 연습에 합류했지만, 등하굣길이 같아 로드워크와 데려다 주는 건 늘 다이치의 몫이었다. 실은 히나타와 같이 가는 길은 평소보다 조금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다이치는 단 한 번도 그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도리어 히나타와 걷는 시간이 너무 소중했기에, 단 1초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싶었다. 난 아마 앞으로 이 길을 걸을 때마다 너를 생각하겠지. 같이 걸어가던 길은 나무가 많아 계절 따라 형형색색 알록달록 바뀌었는데, 이젠 보기만 해도 그 아이의 머리와 미소, 웃음소리가 기억날 것을 알았다. 잊으려 해도 수많은 추억이 선명했다. 같이 봤던 수많은 단풍과 노을들, 가끔 봤던 일출. 눈이 쌓이면 미끄러지지 않게 잡아줬던 작은 손이라던가, 감기라도 걸릴까 매어줬던 빨간 목도리, 그리고 꽃들이 피기 전 겨울의 마지막 발악인 꽃샘추위에 히나타가 기침이라도 하면 떨어졌던 심장까지. 히나타와 나눈 대화는 여름의 불쾌함과 겨울의 뼈를 베는 추위마저 추억으로 바꿔버렸다. 그래도 처음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어느 순간 속절없이 빠져버렸다. 마음을 억누르려던 것도 불가능함을 일찌감치 깨닫고 포기했다. 히나타가 성인이었다면 애정 공세라도 했겠지만, 새파랗게 어린아이를 보면 양심에 털이 나는 듯하여, 차마 그러지도 못하고 선생과 제자라는 틀 안에서 최대한 가까이 지냈다.
그것도 오늘부로 끝이지만.
"졸업 축하해, 히나타."
"감사합니다, 선생님!! 꽃 너무 예뻐요!"
일부러 해바라기를 많이 선택한 꽃다발을 건네주니 왜 사람들이 누가 꽃인지 모르겠네 같은 멘트를 날리는지 처음으로 이해했다.
"그동안 고마웠어."
"제가 더 감사하죠! 선생님 덕택에 직업을 찾았는걸요!"
넌 어딜 가도 잘했을 거야. 진심 어린 말을 하니 더 밝은 웃음이 얼굴 위에 꽃핀다.
"선생님."
"응, 히나타."
"저 이름으로 불러주시면 안 돼요?"
"응?"
"이제 학생 아니니 편애한다는 말도 안 나올 거고, 우리 함께한 시간이 꽤 길고 친하잖아요!"
두 볼이 조금 빨개진 상태로 물어보는 게 추워서 빨개진 건 아닌 것 같다. 겉으로는 티 나지 않더라도 속은 당황해 잠깐 멈춰있으니 히나타의 미소가 조금씩 사라지며 빠르게 불편하시면 괜찮다는 말을 포함한 다른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쇼요."
낮은 목소리가 심장을 울린다. 조금만 더, 용기 내면 될까.
"선생님."
"응, 쇼요."
"좋아해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애써 준비한 말은 머릿속에서 새하얗게 불타 재가 된 게 분명하다.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이라 다행이지, 하마터면 공개적으로 고백할 뻔했다. 차마 눈을 뜰 수 없어 꾹 감고 있다 대답이 없어 날뛰는 심장을 애써 달래며 천천히, 조금씩 눈을 뜨자, 분명히 붉어졌을 제 얼굴처럼 홍조를 띄운 다이치의 볼이 보인다. 선생님의 당황한 표정 처음 봐. 실은 히나타는 히나타 나름대로 최대한 노력했다. 체육 선생님이라는 핑계로 찾아가 체력 단련에 대해 물어봤고, 스트레칭을 도와달라고 했고, 온갖 종목에 대해 물어봤다. 도와줄 수 있는 코치들도 친구들도 많았지만, 처음 봤을 때부터 다이치가 좋았다. 이유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친절하고 다정하지만 어떤 면에선 단호하고, 듬직하지만 장난을 치기도 하며, 무엇보다 배구를 하다 쳐다보면 애정 어린 신뢰가 가득한 눈빛이 너무 따스해서. 배구를 소개해준 것도, 작은 거인을 알려준 것도, 바쁠 텐데도 자기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도와주는 게 설렜다. 학생이라, 유망주라, 부원이라 챙겨주는 것임을 모르지 않았지만, 눈빛에서 비쳤던 애정이 착각이 아니었다고 믿고 싶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어느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다이치는 그저 히나타를 꽉 안는다. 애써 발품을 팔아 사온 꽃이 뭉개지는 건 아깝지만, 꽃은 또 사주면 되니까. 이제 매일 사줘도 되니까. 눈물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아보지만 결국 한 방울은 뺨을 따라 내린다.
아직 추운 날씨지만, 봄이다. 다이치와 히나타의 마음속에 만개하는 꽃들이 다른 해보다 조금 빠른 봄이 왔음을 소리친다.
-뒷이야기
"쇼요, 잘 다녀와!"
"다녀올게요!! 다이치도 잘 있어요!!"
쪽 뽀뽀를 하고 후다닥 달려나가는 히나타는 국가 대표이자 일본 배구팀의 에이스, 떠오르는 샛별, 작은 거인 등의 별명이 따라붙는 선수다. 도쿄에서 연습하는 히나타를 위해 다이치도 도쿄에 있는 고등학교의 체육 선생님으로 취직했다. 가족을 두고 미야기 현을 떠난 건 처음이었지만, 히나타와의 신혼 아닌 신혼 생활은 꿀이 뚝뚝 떨어질 만큼 달콤했다. 예를 들면, 오늘 히나타가 싸준 이 도시락처럼 말이다.
아침부터 로드워크를 위해 일찍 나가는 히나타는 그 와중에도 꼭 아침과 점심은 만들고 나간다. 다이치는 답례로 연습하느라 배가 등가죽에 붙을 거 같다고 칭얼대는 히나타를 위해 2인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양의 저녁을 영양소까지 다 고려해 만든다. 오늘 점심은 뭘까. 따듯한 밥 위에 얹혀진 다이치가 좋아하는 반숙 계란과 반찬 칸엔 히나타의 어린 입맛을 반영하는 통통한 소시지, 각종 야채 볶음과 미소국까지 따로 싸줬다. 계란 후라이 위에는 무려 케첩으로 하트까지 그려져 있어, 귀와 귀를 잇는 웃음을 지으며 다이치는 오늘도 히나타의 사랑이 듬뿍 담긴 도시락을 먹는다.
평소에도 4인용 식탁이 부족하다 느껴질 만큼 많은 음식을 만들지만, 오늘은 간이 식탁을 펴야 하나 고민할 만큼 상다리가 휘어지게 많은 반찬이 올라온다. 실은 다이치가 그렇게 손이 빠른 편은 아니어서, 며칠 전부터 히나타가 집에 없을 때 재료들을 손질했고, 틈틈이 먼저 만들 수 있는 것들부터 만들었다. 나츠에게도 연락해 히나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들의 레시피도 받았다. 오늘은 히나타나 다이치의 생일은 아니지만, 둘이 사귀기 시작한 지 500일이 된 날이다. 히나타는 날짜에 무감각해서 100일, 200일도 겨우 기억해서 애써 챙김을 알았기에 그 이후로는 100단위 대신에 연도만 세기로 했지만, 500일은 뭔가 특별해서. 1,000일도, 그 이후도, 같이 세고 싶은 마음에, 뭐라도 더 해주고 싶은 마음에, 선물은 경제적으로 덜 여유로운 히나타가 부담스러워 하는 거 같아 음식으로 마음을 표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올 때가 됐는데. 마침 오븐에서 소고기 요리가 다 됐다고 띵 울린다. 다이치의 야심작답게 꺼내니 향긋한 양념 냄새가 집 안을 가득 채운다. 예쁘게 접시에 옮겨 담아 식탁 한가운데에 두니 딱 맞게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다녀왔습니다!"
"오늘도 수고했어, 쇼요!"
어라.
평소에는 늘 체육복을 입은 상태로 퇴근해, 집에서 빠르게 씻고 저녁을 먹던 히나타가 깔끔히 샤워를 마치고 무려 정장을 입은 상태다. 거기다 손에 든 꽃다발은 다이치가 지나가던 말로 예쁘다고 한 프리지아다.
"500일 동안 저랑 함께해줘서 고마워요!"
사람이 이렇게 몸도 마음도 예쁠 수 있는 건가.
"나야말로 고마워, 쇼요."
"제가 더 고마워요!!"
누가 더 고마운지 싸울 기세라 일단 식탁으로 데려오니 히나타의 입이 떡 벌어진다. 분명 백일 단위는 세지 않기로 했으면서. 거짓말쟁이.
"이게 다 뭐에요! 안 힘드셨어요?"
"틈틈이 준비했지!"
같이 살기 시작할 때 다이치는 히나타에게 절대 굶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었는데, 그게 농담이 아니었구나. 아침과 점심도 원래 다이치가 만들다가, 히나타가 미안한 마음에 만들기 시작한 거였다. 다이치가 해주는 음식들은 죄다 자기 입맛에 맞아 끼니마다 사랑이 느껴질 정도였는데, 오늘은 사랑이 넘쳐 흐른다. 반찬의 개수도 개수지만, 일단 가운데에 있는 소고기 요리는 전에 같이 봤던 영화에서 히나타가 신기해하며 먹어보고 싶다고 했던 거다. 밥은 일반 밥 대신에 히나타가 좋아하는 반숙 계란과 간장이 놓여 있다. 장조림은 먹기 쉽게 손으로 일일이 다 찢어놨고 계란말이는 히나타가 좋아하는 포슬포슬한 식감, 고기를 좋아하는 히나타를 위해 보기 좋게 썬 수육과 삼겹살까지. 영양소를 생각해 나물 무침도 여러 개 놓여 있고 샐러드도 종류가 두 개나 된다. 직접 튀긴 치킨과 육해공을 다 먹일 작정인지 생선구이에 미소국도 놓여 있다. 곧 체육대회라 일하기에도 바쁜 다이치의 야근이 잦아짐을 알았기에 히나타는 더 뭉클하다. 이걸 대체 언제 다 준비한 거야. 일단 앉아서 밥과 함께 다이치가 야심 차게 준비한 소고기부터 먹는다. 터지는 육즙과 부드럽고 따스한 육질에 잘 베인 양념이 짜지도 달지도 않고 딱 적당하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며 반찬을 하나, 둘 비워가는 히나타와, 흐뭇하게 지켜보며 자신도 밥그릇을 비워가는 다이치는 오늘도 행복하다.
오늘은 설거지가 너무 많아 다이치가 하겠다고 했지만 절대 안 된다는 히나타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다. 사와무라가 요리를 저렇게 많이 했는데 어떻게 설거지를 시켜요! 소파 가서 푹 쉬시며 티비 보세요! 결국, 져 준 다이치는 아까 받은 꽃의 향기를 맡고 화분을 꺼내 물을 담은 후 조심스레 꽃다발을 풀어 화분에 꽂는다. 예쁘게 보관했다가 잘 말려야지. 서로 주고받은 꽃들은 늘 말려서, 어느새 책장 한 칸을 가득 채울 만큼 꽃들이 쌓였지만 계속 사오게 되는 이유는 꽃을 보면 서로가 생각나서이지 않을까 싶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도 해바라기가 유독 예쁘게 핀 날에는 한두 개라도 사오게 된다. 히나타는 그저 지나가다 예쁘거나 맛있는 게 있으면 다이치랑 공유하고 싶다. 고등학교 때처럼 자전거로 신 나게 집을 향해 달리다 맛있는 냄새나 신기한 게 있으면 급정거해서 다칠 뻔한 적도 많지만, 서로의 취향을 잘 아는 만큼 선물들은 다 성공해 뿌듯하다. 실은 오늘도 꽃이 다가 아니다. 500일. 백일 단위로는 세지 않더라도 500일 단위는 뭔가 세고 싶다. 그래서 준비한 건 둘이 지금까지 찍은 사진들을 모아 만든 포토북. 다이치가 그렇게 사진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고 히나타도 자주 찍지는 않았지만, 다이치와 함께하는 나날들은 기억하고 싶어 셀카도 사진도 많이 찍어두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한곳에 모아 일일이 편집하고, 배열하고, 곳곳에 짧은 글들과 이모티콘까지 넣으니 처음 해보는데도 썩 괜찮은 결과물이 나와 좋아할 다이치의 얼굴을 생각하니 며칠 전부터 두근거렸다.
평소처럼 뒷정리가 끝난 후에는 소파 위에서 티비를 보며 일과를 공유하는 시간을 보내려 앉아있는 다이치에게 히나타가 뒤에 뭔가를 숨기고 다가온다. 기대감이 가득한 눈빛에 도대체 뭘 준비한 건지 머리를 굴려보지만, 딱히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커플링은 이미 했고. 핸드폰 고리도 맞췄고. 요새 필요한 것도 없었는데. 뭘 준비했을까.
"500일 동안 감사했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두 손으로 공손히 쭉 내밀어 바치는 책에는 큼지막한 500이라는 숫자와 함께 히나타와 다이치가 신년 행사에 유카타를 입고 찍은 사진이 보인다. 오늘따라 할 말을 잃을 때가 많네. 책을 받아들이며 한 페이지씩 살펴보니 울컥한다. 이건 같이 갔었던 온천 여행에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찍었던 사진. 그 위에는 나중에 꼭 같이 다시 오자고 마음먹었던 후지산의 풍경. 다음 장은 놀이동산에서 싫다는 다이치에게 히나타가 씌워준 머리띠를 하고 찍은 사진들을 스티커 사진처럼 편집했다. 100일에 해줬던 이벤트도, 자주 가는 단골집의 익숙한 단골 메뉴도, 처음 이사 왔을 때 짐을 다 푸르고 기념으로 찍었던 모습도, 유치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면 꼭 해야 한다 해서 결국 걸었던 사랑의 자물쇠까지. 마지막 장엔 세상의 달콤한 말은 다 모은 듯한 편지까지 적어져 있다.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니 다이치의 표정이 바뀌는 걸 지켜보던 히나타가 옆에 앉아 익숙하게 기댄다.
"우리 여기 다시 가요!"
"그래. 노천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니, 이번 크리스마스는 여기서 보낼까?"
"네!!! 예약될까요?"
"지금 하면 될 거야. 내일 알아볼게."
"이 사진 다이치 엄청나게 잘 나왔어요!!"
"내가 보기엔 네가 더 잘 나왔는데?"
"여기도 또 먹으러 가요!"
사진에 하나씩 코멘트를 달며 책을 훑으니 밤이 깊어진다.
"사랑해, 쇼요."
"나도 사랑해요."
사랑을 속삭이며 꼭 껴안은 두 연인은 안정감과 지속성이 있는 관계에서 오는 견고한 믿음과 사랑에 감사하며 내일도 오늘처럼 행복하기를 바라며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