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히나]
연애의 기술
W.찰나 (@chalna_chalna)
“쇼짱. 5월 17일 토요일인데 혹시 약속 있어?”
평소와 다름없는 주말이었다.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오이카와의 멘션에 도착하자마자 현관에서부터 급하게 키스를 하며 서로의 옷을 하나씩 집어던지면서 침대에 다이빙. 가끔 침대까지 가지 못해서 쇼파나 바닥으로 뒤엉켜 쓰러질 때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몇 번을 리플레이해서 본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저장된 그 날의 기억은, 분명 침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두 번째 절정을 맞이한 직후였지, 아마.
“네에? 5월이면 세 달이나 남았잖아요.”
너무 울었나. 흘러나온 목소리가 조금 잠겨있었다. 목이 칼칼한 것이 내일 아침이면 분명 목이 쉬어있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침을 삼키는 목구멍이 까끌해 인상을 쓰자 오이카와가 옆으로 손을 뻗어 협탁 위에 있던 생수병을 건네주었다.
역시 센스 있어. 이래서 제가 매일 매일 새로 반해요, 오이카와상.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오이카와는 귀엽다는 듯 픽- 웃으며 땀으로 축축이 젖은 오렌지색 머리를 잔뜩 흐트러뜨려 놓았다. 그 모습이 또 새삼 잘생겨 헤헤거리고 웃었지. 생수병의 뚜껑을 열고 물을 막 한 모금 삼키려고 할 때였다.
“그 날이 내 결혼식이거든.”
“푸합!!!!!!!!”
입안에 있던 물을 오이카와의 탄탄한 가슴에 죄다 뿜어내었다. 앉은키가 조금만 더 컸다면 그 반반한 얼굴에 침이 섞인 물 싸대기를 날릴 뻔 했다.
“뭐, 뭐라고요?”
쇼짱, 이게 뭐야. 용가리도 아니고. 미간을 찌푸린 그는 협탁 위의 티슈를 뽑아 조각가가 빚은 것처럼 완벽한 가슴과 배를 쓱쓱 닦아내었다.
“나 결혼한다고. 올 거지?”
나 내일 아침에는 우유빵 먹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목소리 톤과 표정이었다. 길을 걷다가 지나가던 공사장에서 우연히 떨어진 벽돌이 머리를 직통으로 가격한 느낌이랄까. 입을 벌리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티슈를 픽픽 또 뽑아내었다. 쇼짱도 닦아야겠네. 입에서부터 흘러나와 턱을 타고 흐르는 물을 톡톡 닦아내는 손길이 무척이나 다정했다.
*
“그 새끼는 누가 봐도 개새끼였어.”
“야! 개한테 사과해. 그 새끼를 개랑 비교해? 개한테 모욕감을 주지마.”
고향 선배 사와무라의 말에 스가와라는 쥐고 있던 포크를 테이블 위에 탁-하고 내려놓으며 버럭 화를 냈다. 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벌써 몇 백 번, 아니 몇 천 번은 죽었을 거다, 오이카와는. 죽여도 죽여도 불사조처럼 되살아나셔서 뻔뻔하기 그지없던 낯짝으로 저 순진해빠지다 못해 미련해 터진 후배를 꾀는 걸 이미 10년 째 보아온 터였다. 옆에서 보는 사람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기도 하고, 답답해 미어터지기도 하고, 속상해 썩어 문드러져가건만. 정작 당사자인 히나타는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감을 못 잡은 채, 눈꺼풀에 소시지라도 얹은 양 퉁퉁 부은 눈으로 맥주만 홀짝대고 있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 새끼가 너 갖고 논거야.”
스가와라는 어금니를 아드득 깨물었다.
대왕님을 좋아하는 거 같아요. 몸을 배배꼬며 말할 때 두들겨 패서라도 말렸어야했다.
원래부터 사람 마음을 교묘하게 잘 이용하는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애를 폐인으로 만들어놓고 헌신짝 버리듯 할 줄은 몰랐다. 저게 사람의 가죽을 쓰고 할 짓이냐, 진짜.
오이카와는 번지르르한 얼굴만큼 말을 아주 잘했다. 딱 상대방이 오해하기 좋을 만큼.
처음 히나타가 오이카와에게 고백한 것은 아오바죠사이 3학년의 졸업식 날이었다. 오이카와가 도쿄에 있는 대학 배구팀으로 진학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후, 더 이상 제 첫사랑을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히나타는 성급하게 그에게 좋아한다 말했다. 그 때 그의 대답이 아주 걸작이었지.
치비짱. 너무 귀여운데… 어쩌지? 미야기랑 도쿄는 너무 멀어서.
거절을 할 거면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어야지. 연애 미숙자, 아니 연애 고자 수준의 히나타에게 그 말은 ‘장거리 연애가 아니면 괜찮다’라는 의미로 잘못 해석되어 받아들여졌다. 물론 우리의 히나타가 좀 심하게 낙천적인 것도 한 몫 했지만.
그 후로부터 히나타는 배구만큼 열심히 공부를 해서 기어코 오이카와를 따라 도쿄로 진학했다. 뭐 도쿄 아주 변두리에 위치한 대학이긴 했지만. 히나타의 부모님은 자신의 아들이 매일같이 읊조리는 오이카와 타령에 그를 아들이 존경하는 선배쯤으로 여겼는지, 오이카와가 공부랑 담 쌓은 우리 쇼요의 인생을 살렸다며 대학 입학식에서 눈물을 글썽거리셨다. 아닙니다. 그 악마 새끼가 히나타를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고요. 기뻐하시는 히나타의 부모님을 보니, 스가와라는 목구멍에서 팝콘처럼 튀어나오려는 말을 차마 뱉을 수 없었다.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게 당연하듯,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히나타는 또 다시 오이카와에게 고백을 했다. 그 때는 이미 오이카와에겐 여자 친구가 있었다.
치비짱이 너무 늦게 왔잖아. 기다리다가 너무 외로워서 오이카와상 다른 사람 만나버렸어.
히나타는 그 날 밤 2년만 일찍 태어나 같이 대학에 들어갔으면 제 사랑이 이루어졌을 거라며 가슴을 치며 꺽꺽대며 울었다. 스가와라는 그런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설명해주었다. 거절의 완곡한 표현이라니까. 그러나 뇌에 주름이란 게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단순한 히나타가 그걸 알아듣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히나타는 오이카와가 여자친구와 헤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망부석이 따로 없네. 열부상이라도 세워줘야겠어. 히죽이는 츠키시마가 얄미워 그 등짝을 스파이크 날리 듯 내리쳤지만 코가 빨개지도록 훌쩍이는 히나타의 얼굴을 보니 스가와라 역시 고구마 한 박스를 사이다 없이 먹은 듯 명치가 답답한 건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오이카와가 실업팀으로 스카우트 됐다는 기사를 뉴스에서 접했을 때 쯤, 히나타는 우연히 길에서 만난 이와이즈미로부터 오이카와가 최근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배구할 땐 하늘을 찌르는 자존감이 연애 쪽에서는 땅을 파도 찾아볼 수 없는 히나타는 그 날 당장 꽃단장을 하고 곧바로 오이카와에게 달려갔다. 최근에 헤어졌다는 그 여자 친구가 히나타가 두 번째 고백했을 때 사귀던 여자 친구가 아니라, 그 후 다섯 번째인가 여섯 번째였던 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쉽네. 지금은 누군가를 만날 타이밍이 아니라서. 프로 리그 적응 중이라 여유가 없거든.
그 땐 오이카와의 다리를 붙잡았었나.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제발 옆에만 있게 해달라고 갖은 진상을 부리며 울었었다. 이미 제법 얼굴까지 알려진 오이카와에게 카페에서 그런 짓을 했으니.
알겠으니까 일단 이것 좀 놔, 치비짱.
당황한 오이카와는 연락할 테니 기다리라고 얼버무렸고, 히나타는 그게 자신의 고백에 대한 오이카와의 OK사인이라고 받아들였다. 감격한 표정으로 스가와라에게 히나타는 말했었다. 오이카와상이 연락하겠대요. 이게 바로 결정적으로 히나타의 인생을 김밥처럼 둘둘 말아먹게 된 비극의 시작이었지.
“그 새끼는 너랑 사귀었다고 생각 안할걸? 그 후로 연락도 안했잖아.”
“아, 아니에요… 그 때 술 먹고 전화가 와서…”
그랬지. 울리지도 않는 벨소리가 환청으로 들릴 만큼 그의 연락을 기다렸건만, 그 후로 몇 달이 지나도 오이카와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의 소식을 아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의 sns와 인터넷 뉴스였으니. ‘미남 세터 오이카와 토오루 점프 서브로만 12점 득점’과 같은. 매일 밤마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메시지를 썼다가 보내지 못하고 지우는 걸 반복했다.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허벅지를 찌르며 꾹꾹 참은 것이 몇 달.
그리고 가을이 성큼 다가와 이불 밖으로 나온 발가락이 시리었던 그날 밤, 새벽 2시쯤.
좀 와 줄래? 보고 싶은데.
액정에 단 한 번도 뜬 적 없는 번호에 손이 달달 떨렸었다. 통화 속 그 목소리가 눈물이 날만큼 반가워 찡해진 코를 훌쩍훌쩍 들이마셨었지. 혹시나 그의 마음이 바뀔까봐 정신없이 옷을 꿰어 입고 택시를 타고 달려갔더니 술이 떡이 된 오이카와가 바 테이블에 엎드려있었다. 조심스럽게 어깨를 툭툭 치자 그가 고개를 들고 초점이 어긋난 시선으로 히나타를 바라보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대단하네, 치비짱은.
대단하다는 그 말이 마치 칭찬 같았다. 긴 시간 동안의 짝사랑을 드디어 알아주는구나 하며.
비틀거리는 오이카와를 부축해 그의 집에 도착해서 자연스럽게 몸을 겹쳤다. 처음은 뭐든 힘든 걸까. 상상했던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지만 귓가에 쇼짱- 하는 그 목소리가 달콤해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그 아픔마저 행복했었지.
“좋아한다는 말은 들어봤어?”
“아니요… 꼭 말로 표현해야만 아느냐고 오이카와상이…”
“그게 전형적인 나쁜 남자의 수법이잖아! 나중에 내가 언제 널 사랑한다고 말했냐면서 발뺌한다고!”
그, 그런가. 그럼 그 때 그 말도 발뺌하는 걸까.
쇼짱. 남자끼린 결혼할 수 없잖아. 결혼은 다른 사람이랑 해도 연애는 너랑 하면 되잖아. 안 그래?
사실을 근거로 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결론 도출이라 생각했는데.
“하아. 히나타. 너 충격 받을까봐 얘기 안하려고 했는데…”
벌컥벌컥 맥주를 단숨에 들이마신 스가와라가 잔을 테이블에 쾅하고 내려놓았다. 결심이 선 스가와라의 표정에 술자리 18번 화젯거리인 히나타의 삽질 스토리를 늘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듣던 츠키시마가 당황해하며 선배 그건 좀- 하며 말린다. 왜 무슨 말인데. 눈치 없는 카게야마가 궁금한 듯 의자 등받이에서 몸을 세웠다.
“그 새끼는 그냥 널 화장실처럼 생각한다고. 지 꼴릴 때 싸재끼는.”
평소 온화한 성격과 부드러운 말투로 엄마 역할을 하던 스가와라의 입에서 저런 상스럽고 거친 소리가 나올 줄이야. 말에 주먹이라도 달렸다면 이건 분명 KO감이었다.
멍하니 감자튀김을 찍던 포크를 툭 떨어뜨리며 눈을 껌벅대는 히나타를 보던 야마구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아니, 선배 말은… 하며 좀 더 유한 표현을 찾으려고 머리를 굴려보았으나 화장실이란 단어만큼 정확하게 히나타의 상황을 설명할만한 다른 표현을 찾기가 어려웠다.
후두둑 테이블 위로 떨어지는 눈물. 스가와라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저렇게라도 정신 차리면 좋으련만. 다들 입을 꾹 다물어버려 정적만이 감도는데 오직 흐느끼는 히나타의 울음소리만이 들려왔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 같은 츠키시마가 테이블 위에 있던 티슈를 뽑아 히나타에게 건넸으니. 초상집도 이보다 더 침울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10년 간 이어졌던 히나타의 대단한 삽질이 드디어 종지부를 맺었다.
…라는 엔딩이어야 했으나.
재미도 없는데 속편으로 질질 끄는 영화처럼 히나타의 첫사랑은 여전히 to be continued였으니.
창조주이신 신은 히나타 쇼요를 만들 때 한 가지를 깜박하고 넣지 않았는데 그게 바로 ‘포기’였다.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거지. 이대로 끝내면 히나타 쇼요가 아니었다. 그리고 깜찍하기도 하시지. 신은 넣지 않은 ‘포기’ 대신 ‘초긍정’을 선물로 주셨다.
밤새 술을 마시며 오이카와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울고, 갖은 이별 노래를 메들리로 부르던, 소위 지랄발광의 시간이 지나고 히나타는 드디어 결론을 내렸다.
“내가 오이카와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오이카와상이 날 사랑할 수밖에 없을 만큼 멋진 사람이 되면 되잖아.”
둔해빠진 카게야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게 맞는 거냐? 할 정도였으면 이건 누가 봐도 아니올시다-였다. 츠키시마는 진심으로 대단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박수를 짝짝짝 쳤다. 와우, 천잰데? 야마구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봐도 사귀고 싶은 남자가 될 거야!”
전국제패가 꿈입니다! 고등학교 배구부 시절의 그 패기를 이런 때에 다시 보다니.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콧바람을 쉬익쉬익 내뱉는 히나타를 보고 츠키시마는 혀를 쯧쯧 찼다. 멍청한 건 병이 아니라 약도 없어-하며.
오이카와 토오루의 결혼식이 딱 두 달 남은 시점이었다.
*
그리고 히나타는 마침내 그 곳에 도달하고 말았다.
시라토리자와 모델 에이전시에.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10층 건물은 고급스러운 자재로 마감이 되어 으리으리하다 못해 웅장한 느낌마저 들었다. 자동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은 TV에서 본 연예인처럼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멋지고 잘생겼다. 외모가 뛰어난 건 아니지만 딱히 못생겼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은 없는데… 왠지 저 속에 들어가면 우아하게 헤엄치는 인어들 속에 있는 한 마리의 오징어가 될 것 같은 기분이랄까.
긴장감에 지병인 설사가 시작되려는지, 아랫배가 살살 아파왔다.
안 돼, 히나타 쇼요.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순 없지! 마음을 굳게 다잡고 어깨를 쭉 폈다. 전장에 들어서는 장군의 비장한 심정으로 자동문을 통과하고, 파리도 미끄러질 듯이 반짝거리는 대리석 바닥으로 위대한 첫 발을 디디는데.
“어이, 꼬맹아. 견학금지거든.”
“허억!”
후드티의 모자 부분이 뒤로 힘껏 잡아당겨져 쾅-하고 기세 좋게 넘어지고 말았다.
우씨, 내 엉덩이! 엉덩이뼈가 조각 날듯이 아프다. 눈물이 찔끔 나서 원망스럽게 위를 올려다보자, 검정색 정장을 입은 보안 요원이 팔짱을 끼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자로 꾹 닫힌 입이 왠지 로봇 같은 느낌이랄까. 인정이라고는 코빼기도 안 보일 거 같다는 소리다.
“우시지마 와카토시상을 만나러 왔는데요.”
“대표님을? 약속했어?”
“아, 아니요...”
“대표님이 아주 한가한 줄 아나보네. 사전 약속 없이는 못 만나.”
“어떻게 잠깐이라도 안 될까요?”
“안 돼. 내가 너 같은 애들을 많이 봤는데... 대표님은 이렇게 막 쳐들어오는 팬들 딱 질색으로 생각하시거든.”
“아니, 팬이 아니라...”
“너처럼 무턱대고 쳐들어왔다가 경찰서에 끌려가서 부모님 찾아오시는 꼴 많이 봤다, 내가.”
아니, 지금 날 우시지마 스토커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정말 오해거든요! 10년간 우리 오이카와상보다 멋진 사람은 한 명도 못 봤는데!
좀 많이 억울해서 항변하려는데 유도리라고는 1g도 없어 보이는 보안 요원이 히나타의 팔을 잡고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아니, 어디 가서 FM대로 잘한다고 상이라도 받으셨나! 왜 이리 빡빡하셔! 바닥에 철퍼덕 앉아있던 그대로 끌려가는지라, 소매 쪽에서 당겨진 후드티가 말려 올라가 허연 배가 드러났고 등은 미끈한 대리석 바닥에 스치는 마찰 때문에 불이라도 붙은 듯 뜨거웠다.
“으악! 아저씨 이거 좀 놔 봐요!!!”
한 5미터쯤 그렇게 포대자루처럼 끌려갔을까. 이대로 누워서 퇴장당하는 건 명색이 3년을 산을 타고 등하교를 했던 체력왕 히나타 쇼요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거지!
히나타는 보안 요원에게 잡힌 팔을 힘껏 당겼다. 쑥- 하고 빠지는 팔. 이런 젠장. 팔을 빼고 보니 옷은 그대로 아저씨의 손에 꽉 잡힌 채, 몸만 빠져나왔다. 마치 탈피한 번데기 마냥. 안에 티셔츠라도 받쳐 입을 걸 그랬다. 원래부터 열이 많은 체질이라, 초봄의 날씨에 후드티 하나만 달랑 걸치고 나왔더니. 후드티가 벗겨진 지금은 불이 난 목욕탕에서 급하게 탈출한 사람마냥 상체에는 아무 것도 걸친 게 없었다.
갑작스럽게 가벼워진 무게감이 이상했는지 뒤를 돌아본 보안 요원이 웃통을 깐 채 로비를 가로질러 달아나고 있는 히나타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망할 꼬맹이! 거기 안 서?”
아저씨라면 서겠어요?
뒤를 돌아보니 자신의 후드티를 바닥에 패대기친 보안 요원이 무서운 얼굴을 하고 달려오고 있었다. 잡히면 진짜 경찰에 끌려갈 판이다. 근데 왠지 쌤통이네. 씩 웃으며 혀를 쏙 내밀어 보이고 전력으로 질주하는데,
퍼억-
퍽치기라 했던가. 갑자기 사람 치고 삥 뜯는 거. 아니면, 아즈마네상의 스파이크를 얼굴로 받은 느낌? 아니다. 그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충격이 안면과 몸에 전달되었고, 순간 눈앞이 빙글 돌고 번쩍 번개가 쳤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스르르 바닥으로 내려앉으려는데, 누군가가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아왔다.
“대, 대표님! 죄, 죄송합니다.”
대표님? 가쁜 숨을 헉헉 내쉬며 허리를 숙이는 보안요원의 말에 고개를 들어, 뒷목이 뻐근하게 당길 만큼 아주 한참 많이 들어 올려다보니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는 얼굴. 시내버스 옆면에, 지하철의 벽면에, TV나 잡지 속에서 늘 등장하는 인물. 하루에 단 한 번이라도 이 얼굴을 보지 않는 게 힘들 정도인, 현재 일본 내 가장 유명한 남자 모델이자, 모델 에이전시 시라토리자와의 대표, 우시지마 와카토시였다.
우와... 진짜 잘생겼네. 항상 2D로만 보던 얼굴을 눈앞에서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서 3D로 쳐다보고 있자니, 현실감이 없어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넌 누구지?”
저음의 목소리에서도 훈내가 폴폴 났다. 그 축구 선수 누구더라. 데이비드 베컴? 그 사람은 얼굴은 잘생겨도 목소리가 온통 삑사리 톤이라 참 인간적이던데.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키며, 몸매며, 목소리며. 삼박자가 어느 하나 부족한 점 없이 딱딱 들어맞을 만큼 완벽하니. 이런 남자가 현실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일본 전 남자를 대표해서 참 불공평하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대표님 팬입니다. 고등학생 같은데 얼른 돌려보내겠...”
“하, 학생 아니거든요!”
짙은 검녹색의 눈이 히나타의 얼굴을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메라를 씹어 먹을 카리스마라더니. 정말이었다. 알 수 없는 위압감에 히나타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사나이 히나타 쇼요! 칼을 뽑았으면 당근이라도 썰어야지! 당근이 아니고 양파였나?
히나타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우시지마상에게 배우고 싶습니다!”
칭찬이라고는 할 줄 모르던 카게야마가 이렇게 말했었지. 넌 은근히 센 상대한테 더 기가 안 죽더라.
“누가 봐도 사귀고 싶은 남자가 되고 싶어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눈이 일순간 당황스러움으로 흔들렸다.
중학교 시절, 히나타는 배구를 배우기 위해서 아줌마 배구단, 동네 배구팀 가리지 않고 어디든 끼어서 연습했다. 마찬가지로, 오이카와상이 자신과 사귀고 싶은 마음이 들만큼 멋진 남자가 되려면, 멋진 남자한테 배우면 되는 거였다.
전 일본 남녀가 뽑은 ‘사귀고 싶은 남자 1위’에게.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현재 5년 연속 그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을 뿐.
츠키시마가 봤다면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어떤 멍청이가 얼씨구나 하고 널 제자로 삼고 싶겠냐- 했겠지만, 미야기 배구 유망주 합숙 때 무턱대고 찾아가던 그 무대포 정신이 어디 쉽게 없어지겠냐 말이지.
도전적인 히나타의 눈을 보던 우시지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수한 모종에는 그에 알맞은 토양이 필요한 법이지. 척박한 땅에서 훌륭한 열매는 맺히지 않아.”
모종? 토양? 진지한 표정으로 농사 얘기를 꺼내는 우시지마를 히나타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돈도 많이 버시는 분이 투잡 뛰시나. 농부로.
“넌 우수한 모종이 아니고 그냥 잡초다.”
“에엑?”
“여길 찾아와도 훌륭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소리지.”
한 10초 쯤? 이해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러니까 지금 이 말은, 나는 지금 싹수가 노랗다, 이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니까 컴백홈 하라 이거지? 내가 우수한 모종인지, 잡초인지, 아니면 개풀인지 당신이 어떻게 안다고!
“제가 우수한 모종이 아니란 걸 어떻게 알아요?”
“3초다.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는 데 필요한 시간은. 넌 3초 안에 상대방을 반하게 할 수준은 아니군.”
우시지마가 에이전시의 대표직에 있는 것은 그의 존재 자체가 일본을 대표하는 훌륭한 모델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모델들을 키워온 안목 때문이기도 했다. 3초의 법칙. 그 짧은 시간 동안 상대방을 매료시키지 못하면 세계적인 모델로서의 기본 자질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것이 우시지마의 모델 선발 철학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감귤색 머리는 그 기준에 의하면 1차 예선 탈락이었다. 자신의 가슴쯤에 위치한 신장은 고작 해야 165. 팔 안에 있는 벗은 상체는 비쩍 말라 딱히 근육이라 할 만한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중성적인 느낌의 페이스는 꽤 귀엽다 할만 했으나 한 눈에 고개가 돌아갈 만큼 매력적이라 말하긴 어려웠다.
결론적으로 3초 안에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타고난 게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지.
히나타는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는 두꺼운 팔을 힘을 주어 천천히 떼어냈다.
“콘크리트 출신 잡초 히나타 쇼요입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저 눈빛을 히나타는 알고 있었다. 네트 너머로 자신을 보던 타 학교 선수들의 눈빛. 저 키로 미들블로커라니. 잘한다고 해봤자 얼마나 하겠어?
그러나 경기가 끝나면 다들 저를 다시 평가했다. 카라스노 10번 제법인데.
지금의 히나타 쇼요는 잡초일지도 모른다. 매력도 없고 연애도 서툰,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도 잡지 못하는.
그렇다고 그 잡초가 멋진 꽃을 피워내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 오히려 콘크리트 틈 사이로 잡초는 근성 있게 꽃을 피워낸다고!
단호한 검녹색의 눈을 또렷이 마주보았다.
“당신이 나한테 반하게 만들 겁니다!”
*
남자 반하게 만드는 법. 이성을 유혹하는 방법. 한 달 안에 고백 받는 법.
인터넷 검색 창에 한참동안 남사스러운 문장을 입력하던 히나타는 한숨을 내쉬며 노트북 자판에 머리를 처박았다.
미쳤지. 내가 그 때 미쳤었지. 이건 그냥 낚인 거다. 스포츠 만화에 나오는 중2병 걸린 주인공이 외칠 만한 손발이 오그라드는 농사 드립에 낚여서 같이 진지충이 되어버렸던 거지. 파닥파닥. 아주 월척이다, 월척.
짠내 나는 10년의 짝사랑이 강제로 마침표를 찍게 생겨 당장이라도 제 목에 동아줄을 걸게 된 판에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벼랑 끝에 몰린 라이온킹 심바의 심정으로 찾아간 곳이었는데. 그래, 내가 비법을 전수해주지- 라며 친절하게 손을 맞잡아줄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 그래도 대놓고 잡초니 어쩌구 저쩌구 지껄이며 사람 속에 불을 확 질러 놓을 줄은 몰랐지. 생긴 거 100분의 1만큼만이라도 성격이 좋았더라면. 입을 여니 싹퉁바가지가 아주 아작 나게 깨지도록 없으니.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죽을 만큼 간절한 산 사람 소원 정도는 들어줄 수 있는 거 아냐? 야박하기도 하지.
그래도. 아무리 눈알이 휙 돌아갈 만큼 빡치더라도 엄연히 주둥이 밖으로 뱉어야 할 말과 그렇지 않아야 할 말이 있었다. 반하게 만들겠다니. 그것도 한 달 안에 반하게 만들겠다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불을 하늘 높이 차올릴 만큼 쪽팔리는 이 말 한 마디 때문에 지금 히나타 쇼요 25년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닥뜨리고 말았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바지에 실수를 한 날과, 중학교 시절 축제 때 세일러문 여장을 한 날. 그 두 날보다 더 인생에서 빡빡 지워내고 싶은 그 날 그 자리에는 재수탱이 우시지마의 뒤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한 남자가 있었다. 빨간 머리를 삐쭉 세운 요괴 같은 남자가. 그는 한참 불꽃이 튀던 두 사람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저기 잡초군? 하며.
부모님이 저가 태어날 때 신사에서 직접 받아오신 귀한 히나타 쇼요라는 이름이 있건만. 잡초군이 뭐야, 잡초군이. 입술을 쭉 내밀고 구시렁대고 있으니 요괴 같이 생긴 남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건 어때? 우리 에이전시 최고의 모델 트레이닝에 참여하게 해줄게. 소수 정예로 선발된 우수한 인재들을 와카토시군이 직접 가르치는 거야. 여기서 잡초군이 되고 싶은 누가 봐도 사귀고 싶은 남자를 마구 생산해 낸다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몰라 눈을 껌벅이고 있자니 요괴 남자가 가슴팍에서 꺼낸 은색의 케이스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쓰윽 내밀었다. 텐도 사토리 시라토리자와 총괄 디렉터. 잘은 모르겠지만 이름이 금테로 새겨진 것이 굉장히 높은 사람인 것 같았다. 이걸 왜...? 멍하니 명함과 텐도 디렉터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자니 그가 허리를 굽혀 히나타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트레이닝이 끝날 때까지 와카토시군을 진짜 잡초군에게 반하게 만든다는 것. 만약 지키지 못한다면 수업료를 그대로 뱉어내야 할 거야. 어때?
고개를 15도 정도 끼익 비틀며 웃는 게 마치 ‘지금부터 게임을 시작하지’라는 대사가 유명한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아 호러가 따로 없었다. 그 영화 결말에 결국 다 죽고 끝났던가? 단번에 등 뒤로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말았던 것이었다.
뭔가 당한 것 같은 찝찝한 기분에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핸드폰으로 시라토리자와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자신이 참여하게 된 그 트레이닝의 비용이 무려 4년 동안 낸 대학 등록금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히나타 쇼요야.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온 거냐. 반하게 만들겠다니. 그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이건 파퀴아오에게 스파링을 하자고 한 것이나, 호날두에게 축구 시합을 하자고 한 것과 다름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 경기를 진다면, 당장 수업료를 지불해야하는데!
지금 상황에서 가장 믿을 만 한 건 스가와라나 사와무라 선배였지만 미야기에 계신 부모님 보다 더 과잉보호인 두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이 긴급 사태를 얘기해봤자 ‘우시지마가 누구냐.’라며 혼자 문명의 혜택을 못 받는 오지에 사는 자연인 같은 카게야마나, 선배에게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칠 야마구치 보다는 그래도 이성적인 츠키시마가 낫겠다 싶어서 전화했더니 한다는 말이 저를 닮아 아주 살 떨리게 재수가 없었다. 신장 하나 없어도 살만하다던데. 미리 팔아 놓는 게 어때?
히익. 신장을 팔라고? 정확히 신장이 어디에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배 어딘가를 가르고 장기를 빼간다니.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다.
이렇게 되면 선택지는 하나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시지마를!
완전 소중한 신장을 지키려는 듯 히나타는 자신의 배를 꼬옥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인터넷 서점에서 ‘연애의 기술’이라는 얄궂은 제목의 책을 장바구니에 담아 넣었다.
*
Chapter 1. 밀당을 하라.
들고 다니기에 쪽팔릴 만큼 핑크핑크한 표지의 책 첫 페이지 읽자마자 히나타는 눈을 또록또록 굴리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밀당이라니.
“히나타! 왜 이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연습실 바닥에 앉아 책을 열었다 덮었다 하는 히나타 앞에 쭈그리고 앉으며 리에프가 물었다.
하이바 리에프. 히나타와 동갑인 그는 요즘 간간히 런웨이에 서기 시작하는 신인 모델이었다. 러시아 혼혈이랬던가. 녹색 눈의 이국적인 마스크 때문인지 벌써부터 여자들 사이에서는 팬덤이 형성되는 모양이었다.
시라토리지와 모델 트레이닝에 참가한지 벌써 삼일 째. 기본 190이 넘는 모델들 사이에 들어갔을 때의 그 기분이란.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 반반하게 생긴 녀석들은 저를 보고 빙 둘러싸고는 넉살 좋게 아는 척을 해왔더랬다.
니가 홀딱 벗고 우시지마상한테 달려들어 유혹하겠다 했다는 그 꼬맹이?
안 그래도 저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형아들에게 포획당해 삥 뜯기는 중딩이 된 분위기이건만. 팩트이긴 하나 어감이 야릇하게 변한 소문을 들으니 억울함에 절로 눈꼬리가 축 처졌다.
아니 그게 아니라! 바, 바지는 입었는데… 목이 꺾여라 위를 쳐다보며 소심하게 항변하자 저를 바라보던 십여 개의 얼굴이 푸핫 하고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너 되게 재밌다. 큭큭.
그리고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변하는 자신을 보고 유달리 크게 웃던 리에프는 어느새 가장 친한 애가 되어있었다.
“리에프. 너 말야… 밀당할 줄 알아?”
“에? 그런 걸 왜 해?”
“아니… 다들 썸 탈 때 그런다던데…”
자신감이 없는지라 말꼬리가 축 처졌다. 썸을 타봤어야 밀당을 하는지 마는지 알 텐데. 지난 10년간 지구를 돌아도 몇 바퀴는 돌았을 만큼 돌진하는 무쏘마냥 앞으로 쭉 밀기만 했던지라. 도대체 당긴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런 거 안 해도 사귀자는 여자가 줄을 서는데.”
의아해하며 대답하는 게 지 자랑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있는 사실 그대로를 얘기하는지라 화도 못 내겠다. 됐다. 너한테 물은 내가 바보지.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나 모델감이요 하고 태어난 너랑 내가 같겠냐. 입술을 삐죽 내밀고 앉았더니 어느새 다가온 후타쿠치가 리에프의 뒤통수를 생수병으로 퍽 내리친다.
“야 아가리 안 닫냐. 넌 말하는 게 아주 건방져.”
“아 진짜 후타쿠치상 왜 그래여! 나만 미워해!”
“니 얼굴보면 왠지 막 줘 패고 싶거든.”
후타쿠치가 발로 리에프의 엉덩이를 세게 까자 리에프가 눈물을 글썽인다. 아 진짜 일본 싫어. 우씨, 예의 따위 좆까! 한 살 더 먹었다고 이렇게 폭력 써도 되는 거야?
후타쿠치는 귀찮다는 듯 씩씩대는 리에프를 발끝으로 틱 밀어내고는 히나타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꼬맹이. 이 형님이 밀당하는 방법 가르쳐주랴?”
되게 가볍고 건들거리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친절한 형이었어.
감동받은 눈으로 바라보니 그가 씩 웃는다.
“공짜는 아니고.”
눼에에… 그럼 그렇지. 불만스럽게 입술을 부우 내밀자 후타쿠치가 볼을 쭈욱 잡아당긴다. 요게 어디서 건방지게- 하며.
기어코 돌아오는 주말에 맥주를 쏘기로 약속을 받아낸 후 후타쿠치가 알려준 밀당의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일주일 간 쭈욱 먼저 연락하다가 갑자기 잠수타기.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고 확신한 상대가 연락을 뚝 끊으면 엄청 애가 탄다나 뭐라나. 이걸로 자기 친구 중에 덩칫값 못하고 낯가림이 엄청 심한 애가 애인을 만들었다했다. 이름이 아오네 어쩌고였는데.
어쨌거나 밀당이란 걸 한 번 해볼까나.
히나타는 핸드폰을 들고 결심한 듯 메시지 창을 열었다.
지난 3일 간 우시지마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핸드폰으로 이상한 메시지를 수신 받았다. ‘오늘 오후에는 비가 올 예정이니 우산을 챙기시기 바랍니다’라는 일기 예보나 ‘일어나서 마시는 물 한 잔은 위장병 예방에 뛰어난 효과가 있습니다’라는 정보 제공성 메시지는 그래도 읽을 만했다.
그러나 ‘이 글은 1799년 영국에서 시작되어 존 크리스토퍼라는 자에게 복권이 당첨되는… 당장 100명에게 보내세요’라는 메시지나, 링크를 클릭했더니 새끼 고양이나 강아지가 재롱을 부리는 메시지는 우시지마에겐 수신 차단이 시급한 스팸 메시지와 다름없었다.
“무슨 일 있어?”
점심 식사로 하이라이스를 함께 먹던 텐도가 구겨진 우시지마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메시지를 보고 있을 뿐이다.”
“엥?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어?”
“그건 아닌데 도무지 의도를 모르겠군.”
미간 사이를 잔뜩 좁히고 핸드폰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우시지마. 오호라. 뭐가 우리 와카토시군의 신경에 거슬린 거지? 호기심을 원동력으로 삼는 텐도의 우시지마 전용 이상 상황 감지기의 안테나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위잉위잉.
“누가 보낸 건데 그래?”
“히나타 쇼요다.”
“오호!”
텐도는 요즘 에이전시에서 가장 큰 화젯거리인 오렌지색 머리의 잡초군을 떠올렸다.
“잡초군이 와카토시군에게? 뭐라는데?”
“지금 보낸 건 오늘의 운세군.”
“지금 보낸 거라고? 그거 말고도 또 있다는 거야?”
“오전에는 올바른 양치 방법 동영상을 보냈었어.”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우시지마는 숟가락 가득 하이라이스를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평소와 다름없이 속내를 읽기 힘든 얼굴로 돌아간 우시지마를 보며 텐도는 고개를 옆으로 까닥이며 히죽 웃었다. 야릇하구나, 야릇해.
우시지마는 요즘 조금 이상했다. 그 이상하다는 수준이 다른 사람들이 봐서는 전혀 알기 어려울 만큼 미세해, 10년 넘게 알고 지낸 동창이자 사람의 마음을 잘 간파하는 텐도만이 겨우 알아챌 수 있을 정도라 그렇지.
고등학교 졸업 전에 먼저 모델로 길거리 캐스팅이 된 우시지마는 사생활이 깨끗하다 못해 속세를 떠난 스님 같이 청렴했다. 일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원체 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기도 하거니와,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자신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그 우직한 성격이 더해져서 텐도가 아는 한에서는 제대로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일단 젊고 신체 건강한 남자로서 하룻밤을 보낸 상대는 종종 있었으나, 그것마저 참 인간미 없이 뒤처리가 어찌나 깔끔한지 삼류 잡지에 스캔들 하나 난 적이 없었다. 평소 거짓말을 하지 않는 우시지마 자신 역시도 ‘귀찮은 건 질색이다’ 하며 선을 딱 그어 말한 것을 보면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휴지 조각 마냥 흔하디흔한 연애 한 번 하지 않았음이 틀림없으니.
그런 우시지마의 평온한 일상에 짜잔하고 등장한 잡초군.
잡초군에 대해서 우시지마는 평소와 다른 행태를 보였다. 우시지마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수산물 도매 시장에서 생선 등급을 매기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모델로서 우수한가 그렇지 않은가. 사업 파트너로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 감정이란 눈곱만큼도 들어가지 않은 잣대를 쑥쑥 들이밀었던 냉정했던 그 우시지마가 트레이닝에 처음 참가한 잡초군을 본 소감으로, ‘히나타 쇼요를 보면 화가 나는군’이라 말할 줄이야. 금방처럼 잡초군이 메시지를 보낸 의도를 파악하려 든다는 것은 남들의 감정에 차가울 정도로 무신경하던 우시지마의 생각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뭐 처음 잡초군이 와카토시군과 팡! 하고 충돌했을 때부터 이상했지. 평소라면 그냥 넘어갈 상황에서 진심으로 화를 내다니. 정작 본인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래서 그런 재밌는 제안을 했던 걸.
텐도는 락교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털어 넣고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뚝뚝 꺾자 무엇을~? 마음을요~ 산산이 부숴 무엇을~? 정신을요~”
크고 멋진 소나무가 된 우수한 모종, 와카토시군. 잡초군은 와카토시군의 마음과 정신을 어떻게 꺾고 부술까?
흥미로운 일이 펼쳐질 것만 같은 기분에 꽤 오랜 시간동안 텐도의 콧노래는 끝날 줄을 몰랐다.
등 뒤로 땀이 주륵 흘렀다. 장을 폭발시키는 스위치라도 누가 누른 듯 아랫배가 꾸르륵 소리를 냈다. 살살 아파오는 배. 히나타는 이마를 찌푸렸다.
모델이라고는 건담 프라모델 밖에 몰랐던 히나타가 참가하고 있는, 팔자에도 없는 모델 트레이닝 커리큘럼 중 가장 싫은 것이 바로 이 워킹 수업이었다. 거신병이 걸린, 물론 일본인 평균 신장에 아주 조금 못 미치는 자신의 기준에서, 멀대처럼 걸어야하는 것이 고역이었고, 무엇보다도 우시지마가 직접 지도를 하기 때문이었다.
“고시키. 턱을 더 끌어당겨.”
“후타쿠치. 등이 굽었다.”
아니, 그냥 걸으면 되지 뭐 이렇게 까다로워! 자신의 차례가 점점 다가오자 히나타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져 갔다. 고등학교 시절, 수업 시간에 카게야마의 등에 숨어 메론빵을 까먹었던 것처럼 리에프의 널찍한 등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데, 둥둥-하는 제 3세계에서나 들을 법한 음악 소리에 맞춰 리에프가 런웨이로 올라가버렸다. 조명 아래 한 마리의 사자처럼 멋지게 걸어가는 리에프를 바라보던 우시지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다음 순서인 히나타에게로 향했다.
히익- 이마를 뚫어버릴 것 같은 강렬한 시선에 히나타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눈빛으로 런웨이를 씹어 먹어야한다더니. 이건 씹어 먹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갈아 마시겠다는 수준이잖아. 긴장감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꼬맹이 뭐해. 니 차례야. 머리를 삐쭉 세운 킨다이치가 뒤에서 히나타의 등을 쑥 밀어버렸다. 강제로 출발한 다리가 꼬여 넘어질 뻔 한 걸 겨우 균형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참 친절하네, 망할 자식!
데뷔 임박 정예 멤버만으로 이루어진 프리미엄급 트레이닝 아니랄까봐, 대충 마룻바닥에서 하면 될 연습에 진짜 런웨이를 갖다 놓았다. 바닥에서 키만큼 높고 긴 단상 위를 걷는 기분이란. 중국 무술 영화에 나오는, 절벽끼리 연결하기 위해 대충 밧줄로 묶어 만든 흔들다리 위를 걷는 느낌이랄까. 한 마디로 겁나 떨린다는 거지. 달달.
히나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배웠던 것을 떠올렸다. 어깨 넓이의 보폭으로, 시선은 정면으로. 그래도 운동신경이랑 유연성은 누구한테도 뒤처지지 않는 지라, 워킹이 처음보다 제법 나아졌다. 처음엔 오른손과 오른발이 같이 나가서 리에프에게 로봇이냐 하며 비웃음을 샀었지만.
레이저처럼 따라 붙는 시선에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무표정한 그 얼굴을 보자니, 왠지 복부에 바람이 솔솔 통하기라도 하듯 서늘하다. 헉. 신장... 내 신장! 벌써 트레이닝에 참가한지 일주일, 밀당을 하기 위해 메시지를 보낸 지 5일 째 되는 날이었다. 우시지마는 단 한 통의 답장도 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이미 자신의 번호 따위 차단되었을지도.
신장을 사수하기 위해 그의 마음을 얼른 사로 잡아야하는데.
또록 눈을 굴리자, 빨려들 것만 같은 검녹색의 눈과 마주했다. 문득 어젯밤에 읽은 책의 내용이 떠올랐다. chapter 2. 시선의 마법. 눈을 지그시 마주쳐 상대에게 당신을 인식시키세요. 상대방에게 당신을 강하게 각인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눈을 마주보는 것입니다. 분명 그는 당신이 보내는 시선의 마법에 강렬하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마법이라잖아, 마법. 지금은 노력을 넘어선 요행이라도 붙잡아야 할 긴박한 타이밍이었다. 히나타는 저 호그와트에 사는 안경 쓴 해리에게 힘을 빌려 달라 속으로 외치며 우시지마를 향해 강렬한 시선을 보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 같은 시선이 자신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훑고 있었다. 분명 옷을 입고 있는데도 발가벗은 기분. 금세 목뒤로 뜨거운 열기가 올라왔다.
보통 서로 눈을 마주치면 누구 한 명이 고개를 휙 돌리기도 하는데 둘은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점점 눈싸움의 경향으로 발전해나가자, 히나타는 의심이 들었다. 진짜 이걸로 상대가 반하게 만들 수 있는 거야? 싸우자는 거 아니고?
그러나, 연습시합이건, 정규 대회건, 상대팀에 지기만 하면 분통이 터져 밤에 잠을 못 이룰 정도의 승부욕을 가진 히나타는 갑작스럽게 발발한 이 눈싸움의 승자 자리를 절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옆으로 시원하게 뻗은 눈매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앞으로 걸어가는데,
“어이 꼬맹이 조심해!”
“으악!”
뒤에서 워킹을 하며 걸어오던 킨다이치의 다급한 목소리와 동시에 히나타의 발이 공중에서 헛돌며 런웨이 아래 바닥이 눈앞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아! 턴을 했어야 했는데! 저 재수지마 때문에! 단상 끝에서 턴을 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몸을 날린 꼴이 되어버렸다.
몸에 느껴질 고통을 예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아, 이건 그 때 그 냄새. 그 체온.
“형편없군.”
그리고 그 목소리.
꾹 감은 눈을 천천히 떠보니, 우시지마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다운 선의 얼굴.
“자세도 시선처리도 모두 최악이다.”
재수탱이! 울컥해서 멱살이라도 잡으려는데 몸이 무언가 이상했다. 겨드랑이 아래로, 무릎 뒤로 묵직하고 단단한 팔에 자신의 몸을 받쳐진 채 공중에 붕 떠 있었다.
여어. 공주님 안기네.
저 형이 진짜! 분명 후타쿠치의 목소리였다. 후타쿠치의 말이 끝나자마자 와하하- 하는 웃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어떻게든 빠져나오려는데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우시지마가 팔에 힘을 주었다. 운동이라면 꾸준히 해왔는데. 뭐야 이 힘의 차이는. 사실 모델 아니고 진짜 농부 아니세요? 쌀가마니 좀 많이 날라보신 거 같은데. 억울한 눈으로 쳐다보니 우시지마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히나타만이 들을 수 있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용건 없는 메시지는 사양이다. 질리는군.”
한겨울 뼛속까지 얼려버릴 것 같은 찬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
봄이라지만, 밤에는 역시 아직까지 춥다. 히나타는 어묵 국물을 후루룩 들이마시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시라토리자와 에이전시 근처에 위치한 이 포장마차는 근방에 있는 여타 술집에 비해서 저렴한 편이라 퇴근 후 한잔 걸치러 온 직장인들에게 꽤 인기가 있는 곳이었다. 밀당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대신에 술을 사라던 후타쿠치와 부르지도 않았는데 사은품 마냥 딸려온 리에프. 세 사람이 앉아있는 허술한 플라스틱 테이블 위에는 이미 빈 맥주병과 청주병 대여섯병이 널려있었다.
“그래서 꼬맹이. 내가 가르쳐준 밀당 작전은 성공했어?”
후타쿠치가 입에 털어 넣은 잔을 테이블 위에 탁-하고 내려놓으며 물었다. 취할 때까지 마시고 그 술값을 히나타가 내기로 했는데, 이건 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아니 술 붓기다. 생긴 것도 소싯적에 좀 노신 것 같은 분이 술까지 아주 잘 잡수시니 이건 뭐 대놓고 양아치네. 얇은 지갑을 만지고 있자니 속이 쓰려 괜히 후타쿠치를 심통이 난 얼굴로 흘겨보며 툴툴거렸다.
“아니요. 완전 효과 없던데요.”
“어쭈 꼬맹이. 주둥이 안 집어넣어?”
“에엑! 아파요!!”
“우우 폭력선배~”
후타쿠치가 한손으로 히나타의 양뺨을 잡고 좌우로 흔들자 리에프가 엄지를 바닥으로 내리며 야유를 보냈다. 후타쿠치는 안주로 나온 땅콩을 집어다가 리에프의 얼굴을 겨냥해 하나씩 하나씩 휙휙 던졌다. 진짜 한 번 맞아볼래?
엉? 하며. 아, 진짜 하지마여! 리에프는 그걸 또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며 잘도 피한다.
바보 콤비의 코미디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데도 왠지 기분이 가라앉았다.
질리는군. 며칠이 지났는데도 마치 혐오스러운 것을 본 사람처럼 자신을 내려다본 우시지마의 눈빛이 머릿속 어딘가에 콕 박힌 것처럼 잊히어지지 않았다.
뭘까. 질린다는 게.
“상대에게 언제 질려요?”
투닥대는 두 사람이 일순간 동작을 멈추고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히나타는 꾹 잡고 있던 글라스잔에 있던 술을 마저 꿀꺽꿀꺽 삼키고는 소매로 입가를 쓰윽 닦아냈다.
“애인 사이 말하는 거야?”
“굳이 애인이 아니라도...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상황이라든가...”
후타쿠치가 몸을 고쳐 앉으며 팔짱을 꼈다.
“흠... 상대방이 너무 들이댈 때?”
“......”
“뭐랄까. 이런 생각이 든다고. 쟤가 저렇게까지 노력하는 걸 보면 사실 난 우주최고 이케맨인 거 아닐까? 더 예쁜 애랑 사귈 수 있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이 들게 되면 그 관계는 보통 오래 못 가더라고. 상대방이 나에게 맞춰주려는 모든 행동이 질리기 시작하지. 그 노력이 부담스럽거든.”
한 마디로, 좋아해서 너무 잘해주는 게 오히려 상대방의 기를 살려줘서 오히려 자신을 하찮게 여기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우와, 후타쿠치상 쓰레기네여.”
“어이! 대부분의 남자가 그렇거든!”
후타쿠치가 버럭 화를 내자, 리에프가 흐응~ 하며 잠시 손가락으로 턱을 툭툭 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도 대놓고 너무 좋아-라고 얼굴에 쓰여 있는 애는 별로야. 매력 없어. 막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이런 마음은 안생기거든.”
“그렇지. 이미 잡아놓은 물고기한테 굳이 신경 쓸 필요 없잖아?”
그렇군요. 히나타는 비어있는 자신의 잔에 청주를 콸콸 쏟아 부었다.
지난 10년 간 오이카와상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전력으로 좋아한다는 자신이 이미 낚은 물고기처럼 보였을까. 눈치 없이 미끼를 더 달라고 힘차게 팔딱대서 내가 부담스럽고 질렸을까.
그런데... 특별한 것 없는 내가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었나.
코끝이 시큰했다. 눈앞이 희뿌예져서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코를 훌쩍 들이마셨다.
“꼬맹이 왜 그래? 너 차였냐?”
겉으로는 생양아치이나 속은 물러터진 연두부 같은 후타쿠치가 당황해하며 히나타를 쳐다보았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너무나 오랫동안 해왔던 사랑이라 어디서부터 설명해야할지 몰랐다.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잇새로 고르지 못한 숨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 술만 계속 꾸역꾸역 들이켰다.
그리고 얼마 후.
“아니 누가 저 좋아서 그러는 줄 아나… 엉? 내 말이 틀려요? 우씨…”
우씨. 그래 그 재수 없는 자식 성이 우씨지. 우시지마.
“그래. 꼬맹이 니가 그 놈 안 좋아하는 거 알겠으니까 이제 좀 가자.”
후타쿠치는 한숨을 깊게 쉬며 의자에서 떨어질 듯 말 듯 오뚝이처럼 좌우로 몸을 흔들고 있는 히나타의 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러나 꿈쩍도 안하는 몸.
진상도 이런 개진상은 오랜만이었다. 생긴 건 유순하게 생긴 애가 꽐라가 되니 똑같은 말을 무한 반복하며 집에 안가겠다고 떼를 쓰니. 마을 어귀에 있는 정승 마냥 자리에 우뚝 앉아서 버티고 있는 걸 보며 후타쿠치는 다시는 얘랑 술은 안 마시리라 굳게 다짐했다.
“근데 신장이… 내 신장이 소중해서… 그게 없으면 배가 추울 거 같아…”
갑자기 신장이라니 무슨 소리래. 리에프는 배를 감싸 안고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은 히나타 앞에 있던 어묵탕을 옆으로 치워주었다. 이미 오렌지색 앞머리 일부가 어묵탕에 빠져 칙칙한 주황색으로 변해가고 있긴 했지만.
“그래! 신장마저 잃을 수는 없어! 사랑도 신장도 다 지키고 말거야!”
“아 씨발 깜짝이야!”
잠들었나 했더니 어느새 고개를 쳐들고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쾅치는 소리에 후타쿠치가 욕을 내뱉었다. 절대 집에 안가겠다던 히나타는 큰 결심을 한 것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눈이 풀려 시선이 어디 멀리를 바라보고 있고 자꾸 헛다리를 짚으며 겨우 서있긴 했지만.
매고 온 백팩에 겨우 팔을 꿰는 것을 성공한 히나타는 미련이 없다는 듯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천천히 포장마차를 벗어났다. 챕터 쓰리. 챕터 쓰리… 하고 중얼대며.
남겨진 두 사람은 황당하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참동안 멍을 때리던 후타쿠치가 눈을 번뜩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저 진상 꼬맹이 새끼… 제일 많이 처먹고 계산도 안하고 튀었어.
낯선 음악소리에 우시지마는 눈을 떴다.
한밤중에 울리기에는 쓸데없이 경쾌한 멜로디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낯설기는 했지만 분명 거실 인터폰에서 울리는 벨소리였다. 사람을 집에 초대하지 않는지라 거의 들은 적 없는 소리이긴 했지만. 자신의 멘션을 아는 사람은 텐도 정도였으나 이 시간에 그가 연락 없이 찾아올 리는 없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협탁 위 디지털시계를 보니 2:27이라는 숫자가 깜박대고 있었다.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려 슬리퍼를 신고 거실로 향했다. 끈덕지게 이어지는 벨소리를 멈추려고 인터폰 화면을 확인하는데, 북실북실한 오렌지색 털이 온통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꿈틀꿈틀 대며 털이 움직이는 기이한 장면이 이어지더니 갑자기 쿠웅 하는 소리가 들리고 털이 화면 아래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야, 아파라… 울먹이는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전달되었다. 그러더니 다시금 감귤색 털이 쑥 나타나더니 그 아래에 있던 허연 얼굴이 비춰졌다. 인터폰을 게슴츠레 바라보는 초점이 나간 댕그란 눈.
정말 성가시군. 우시지마는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히나타 쇼요.”
스피커에 대고 이름을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가운 기색을 비친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다. 자꾸 비틀대는 걸음 탓에 코를 인터폰에 처박고는 히나타가 말했다. 슈욱슈욱 콧바람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 와! 우시와카다! 우시와카!!!
“취했군.”
- 눼에 눼에~ 한 잔 했슴돠- 문 좀 열어줘요~
“너무 늦었다. 돌아가.”
- 아 진짜 빡빡하시네~ 그럼 저 여기서 노래 부를 거예요.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여기 산다네~~
뭐가 그리 신나는지 고래고래 큰 목소리로 음정 박자를 무시한 노래를 부르는데 당장이라도 이웃에서 현관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 것만 같아서, 아무리 단호한 우시지마라도 문을 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열린 문 사이로 자신의 어깨에 겨우 닿을 만한 히나타가 붉어진 얼굴로 서있었다. 알싸한 술 냄새를 폴폴 풍기며. 히나타의 등 뒤로 묵직한 현관문이 철컥-하고 닫혔다.
“무슨 일이지?”
“할 말이... 있어서요...”
“이 시간에 찾아올 만큼 중요한 할 말이 있단 말인가.”
조금은 불쾌하다는 시선으로 내려다보자 겨우 균형을 잡고 서 있는 히나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혀가 꼬여 부정확한 발음과는 달리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처음 만난 그 날처럼 도전적이었다. 발그레한 뺨과 묘하게 젖은 눈. 금방 100미터 달리기를 전력으로 완주한 선수처럼 알 수 없이 상기되어 있었다.
히나타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는 양 검지로 눈꼬리를 길게 쭈욱 늘렸다.
“우수한 모종에는 그에 알맞은 토양이 필요한 법이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부러 낮춰서 말하는 게 분명 자신을 흉내 내는 것이었다. 의미를 알기 어려워 미간을 찌푸리니 히나타가 이내 씨익 웃으며 우시지마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우수한 모종이 아닌 잡초에겐... 선택할 길이 하나 밖에 없네요.”
감귤색 정수리가 가까워진다고 했더니 고개를 뒤로 꺾어 눈을 마주한 히나타가 우시지마의 티셔츠 멱살을 잡아챘다. 술의 힘일까. 작은 체구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운 힘에 우시지마는 순간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석양을 닮은 색의 눈동자가 바로 코앞이었다. 고르지 못한 뜨거운 숨결이 우시지마의 얼굴에 닿아오고 있었다.
“노력하는 수밖에.”
맞닿은 입술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자신의 입술을 핥는 혀의 서툰 움직임과 멱살을 잡은 작은 손의 떨림. 우시지마는 꾹 감겨진 히나타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응시했다.
여태까지 만난 키스 상대 중 가장 미숙하였다. 참으로 어설프기 짝이 없는 입맞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평온하게 제 속도를 유지하던 심장 박동이 미묘하게 빨라진 것은 아이러니였다. 알 수 없는 갈증이 일었다. 한 번 안은 적이 있던 마른 허리의 위치를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손을 뻗어 허리를 휘감고 다른 손으로 손 안에 들어오는 작은 뒤통수를 성급히 끌어 당겼다. 달콤한 향이 나는 입술을 열고 말캉한 혀를 잡아채자 으응-하는 젖은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혀가 서로 엉키며 찰박대는 물기어린 소리가 한참동안 이어졌다. 미친 듯이 질주하려는 경주마를 붙잡아 둔 줄이 뚝-하고 끊어져 버린 듯, 우시지마는 가는 선의 목덜미를 향해 거칠게 이를 세웠다.
그러나 그의 폭주는 이내 멈추고 말았다. 팔에 더해지는 무게감. 쇄골을 간질이는 고른 숨결. 제 팔에 안겨 고롱고롱 기분 좋게 코까지 고는 결백하다는 얼굴.
우시지마는 중얼거렸다. 어이가 없군.
흐트러진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일순간 차갑게 식은 공기에 관자놀이 부근이 지끈지끈 당겨왔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히나타 쇼요는 이해하기 힘든 존재였다.
제멋대로 찾아와 반하게 하겠다고 선언해놓고서는, 정작 자신 앞에서는 잔뜩 위축된 채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의도를 알 수 없는 메시지 폭탄을 보내 놓고서는 워킹 연습에서는 공격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기도 했다. 그리고는 갑작스럽게 한밤중에 찾아와 도발적으로 입을 맞추기도 하는.
온실 속 화초의 우수한 모종만을 보아오던 그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잡초는 낯설었다. 어떻게 다뤄야할지 어떤 꽃을 피워낼지 알 수 없어 긴장감을 유발하면서도 계속해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일종의 스트레스랄까. 그래서 히나타를 보면 화가 나는걸까.
일관되지 않은 행동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소모한 정신적 에너지가 그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질리는군. 히나타에게 했던 말의 뒤에는 생략된 말이 있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생각에 사로잡힌 내 자신이.
지금 자신의 침대를 제 집 침대마냥 편하게 드러누워 자는 얼굴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순진무구한 앳된 소년의 얼굴이었다.
히나타 쇼요. 너는 도무지 알 수가 없군.
무거운 피로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
변기통을 부여잡고 히나타는 다시 한 번 웩- 하며 속을 게워냈다. 어제 먹었던 것은 이미 입 밖으로 다 쏟아낸 것 같은데. 입이 쓴 걸 보니 멀건 위액이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아 죽겠다, 이 놈의 숙취. 밤새 위장을 누군가가 물어뜯어 놓은 것처럼 너덜너덜해진 기분이었다.
문 밖에 있던 리에프가 문을 발로 쾅쾅 찼다.
“괜찮냐? 등 좀 두드려줄까?”
“아니, 괜찮... 우웩-”
“윽. 드러운 놈...”
더럽다면서 왜 남의 등을 두드려준대. 쟤가 아직 일본말을 제대로 못 배웠나보다.
다시금 올라오는 구토감에 눈물이 찔끔 났다.
“좀 있음 우시와카 워킹 수업인거 알지? 늦으면 죽어. 대충하고 나와.”
심드렁한 리에프의 말에 히나타는 정말 울고 싶어졌다. 지금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간, 우시지마 와카토시.
이게 다 그 망할 chapter 3 때문이었다.
부드러운 촉감의 이불이 잠의 끝자락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더랬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조금만 더-를 마음속으로 외고 있는데 낮은 목소리가 평화로운 분위기를 순식간에 반전시켰다. 이제 그만 일어나지 그래.
온몸의 털이 쭈뼛 서고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어젯밤의 기억이 밤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깜박대는 불빛처럼 드문드문 떠올랐다. 그 우시와카의 이, 입에 바, 박치기를… 차마 입맞춤이나 키스란 표현은 못 쓰겠다. 그럴 단어를 쓸 만한 사이가 아니잖아. 흑.
몸을 침대에서 일으킴과 동시에 재빠르게 최대한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차마 그 얼굴을 볼 수 없어 무릎 위에 올린 자신의 꽉 말아진 주먹만 쳐다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침묵은 금이라고 했던가. 금이 아니라 주금이겠지, 죽음. 죽음 앞에서 아재개그나 떠올리는 자신이 조금 한심스러웠지만 그것보다 정말 목숨이 오가는 상황인지라 절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신장 하나 안 떼려다가 골로 가게 생겼다.
망할 놈의 챕터 쓰리!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원흉인 챕터 쓰리. 형광펜에다가 빨간 볼펜으로 별 다섯 개까지 쳤는데. 배신도 이런 배신이 없다.
은근한 스킨십은 그의 심장을 뛰게 합니다. 그가 예상하지 못한 스킨십을 시도해보세요. 친구였던 당신을 이성의 범주로 옮겨주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절호의 기회는 개뿔! 저승 직행 열차 우선 탑승권 획득의 찬스겠지! 그 책 ‘연애의 기술’이 아니라 ‘데스노트’ 아니냐. 흑. 미야기에 계신 부모님이 떠오르며 미처 유서를 남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눈물이 찔끔 나려는데 안 그래도 낮은데 한겨울 얼음장 같이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의외의 대답에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우시지마가 싸늘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서있었다. 풍겨오는 분위기가 오싹했다.
히익! 그러니깐 그게...
밤에 불쑥 찾아온 거, 갑자기 막 주둥이를 들이민 거, 꽐라가 되어 남의 집에 누워 잔 거?
어떤 것부터 사과를 해야 할지 몰라 에.. 그게... 하며 우물대고 있으니 그가 휙 등을 돌리며 말했다.
불쾌하군.
경멸하는 얼굴. 거실로 향하는 우시지마의 뒷모습을 보고선 그대로 정신없이 가방을 들쳐 매고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 인공 마냥 도망쳐 나왔더랬지.
하아…
이대로 변기통을 통과해서 밖으로 탈출하고 싶다. 왜 그 니모를 찾아라 처럼.
그러나 위액만이 위장 밖으로 탈출시켜 달라 아우성 칠 뿐이었다.
우웨엑-
“보건실에서 좀 쉬는 건 어때? 우시와카한테는 내가 잘 얘기해줄게.”
리에프는 혀를 쯧쯧 찼다. 어제 그렇게 달리더라니. 쯧쯧.
재활의학과 전문의 쿠로오 테츠로는 시라토리지와에서 일하는 것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모델 에이전시에 의사를 채용한 건 업계 최초의 일이었다. 모델의 신체적 균형과 컨디션을 중요시 하는 우시지마의 의견을 반영해 체형교정 및 기본 진료를 담당할 의사를 상주시키기로 했고, 그 자리를 쿠로오가 맡게 되었다.
매일 죽을상을 하고 찾아와 관절약을 처방 받아가는 노인 환자가 아닌 아름다운 신체와 외모를 가진 젊고 탱탱한 모델들을 상대할 수 있다니. 신의 직장이 따로 없군.
뼛속의 골수까지 게이인 그에게 이 곳은 자신의 욕구를 채우며 돈까지 벌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이미 많은 모델 지망생들이 그의 배아래 깔렸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돌고 있었는데, 엘리트이자 잘생기고 매너까지 완벽한 마성의 게이인 그의 명성을 힘입어, 이는 소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팩트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래서 술병이 나셨다?”
고개를 끄덕이는 꼬맹이의 울상인 얼굴을 보며 쿠로오는 제대로 입맛을 다셨다. 부들거리는 오렌지색 머리에 앳된 얼굴이라니. 동그랗지만 끝이 새침하게 올라간 눈이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딱히 취향이란 게 없어 만인을 평등하게 사랑하는, 그래서 바람둥이란 소리를 듣는 쿠로오였지만, 그간 평균 180 이상인 애들만 잡숫다가 한 품에 쏙 안길 것 같은 꼬맹이를 보니 입에 침이 고였다. 마치 평소 먹기 힘든 별미를 마주한 기분이랄까.
“오야오야… 일단 한 번 볼까?”
청진기를 귀에 걸고 꼬맹이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으레 병원의 진찰 순서를 떠올린 꼬맹이는 입고 있던 후드티를 쇄골까지 끌어올렸다.
꼴깍. 쿠로오는 침을 삼켰다. 참 오랜만에 보는 선명한 핑크빛 유두. 하얀 피부 위에 콕콕 찍힌 게 앙증맞았다. 이 맛에 내가 의사한다니까.
“소리 좀 들어봅시다.”
씨익 웃으며 부러 청진기를 유두에 대자 금세 단단해지는 게 보였다. 아, 반응 좋고. 차가운 금속의 촉감에 매끈한 가슴과 복근이 움찔댔다. 소년과 청년의 중간쯤이라 할 수 있는 신체 발육. 가느다란 선의 몸에 붙은 마른근육이 언뜻 봐도 탄력이 있어보였다. 갸릉갸릉 목을 긁는 소리를 내며 한줌에 잡힐 것 같은 허리를 잔뜩 휘는 모습을 상상하니 아래가 묵직해져왔다.
“아이고. 위장이 난리가 났네.”
“계속 토해서요...”
“고생이 많겠어, 우리…”
차트를 곁눈질로 보았다. 히나타 쇼요. 만 25세.
“...히나타 쇼요군이. 제대로 못 먹을 텐데 수액 좀 맞고 가요.”
“감사합니다.”
숙취가 꽤 심한지 조막만한 얼굴이 헬쑥했다. 왠지 침울해 보이는 표정.
“연애가 잘 안 되나봐?”
“예옛?”
“보통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술을 들이붓지는 않지.”
말간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빙고. 로또라도 사야하나. 쿠로오는 최대한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참 사랑이란 게 내 뜻대로 안 되는거라… 힘내요, 히나타군.”
큰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오르는 게 보였다. 처음 본 사람의 어쭙잖은 위로에 감동한 듯 코를 훌쩍이는 게, 주변에 요 꼬맹이의 사랑을 응원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즉, 아주 쓰레기 같은 놈을 좋아해서 주변인이 도시락 싸들고 따라 다니며 뜯어말리고 있을 확률이 99.9%라는 거지.
이런 케이스는 굉장히 성공 가능성이 높은 케이스라 할 수 있다. 뭐, 연애상담 하던 친구가 어느새 애인이 된다는. 쿠로오는 고개를 떨구고 애써 눈물을 참는 히나타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꼬옥 붙잡았다. 놀란 듯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꼬맹이의 촉촉이 젖은 속눈썹이 사랑스러웠다. 쿠로오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도와줄까.”
입 안 가득 침이 고일만큼 달달한 향이 나는 사탕발림에 히나타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텐도는 요즘 에이전시 내에서 도는 흉흉한 소문과 우시지마의 저기압인 텐션과의 연관성의 유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 중이었다.
둘이서 뭘 하는지 안에서 신음소리가… 어휴~ 못 볼 꼴 볼까봐 보건실 문을 못 열겠다니까요.
입이 가볍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테루시마 유우지가 어찌나 열을 올리며 혀를 내두르는지. 혀에 한 피어싱이 금방이라도 빠질 것만 같았다.
소문이란 게 늘 사실보다 뻥튀기된다지만. 저 둘 사이에 뭔가 있긴 한가보다.
잘 돼 가는 줄 알았더니 복병이 있었네. 닭벼슬 머리를 한 능청스런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텐도는 앉아있던 회전의자를 빙글 돌렸다.
이제 어떡할 거야, 와카토시군. 이러다가 잡초군을 저 닭벼슬이 쑥 하고 뽑아버리겠는데?
텐도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소년점프보다 흥미진진하단 말이지.
족히 2미터는 되는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스케줄표를 대충 훑어보던 텐도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포토포즈 시간이라. 구경이나 하러 가볼까.
한치의 오차도 없이 사선으로 잘려진 앞머리가 그의 완벽주의 성향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시라부 켄지로, 포토 포즈 강사 겸 포토그래퍼. 곱상하게 생긴 얼굴과 달리 차가운 성격과 험한 말투 때문에 모델 연습생들 사이에서의 별명은 ‘걸레 문 엘사’.
“야. 니가 꽈배기야? 그렇게 사지를 꼬면 멋진 줄 알지?”
애송이 새끼가 지 몸 하나 제대로 못 가누면서. 가차 없이 뚝 떨어지는 독설에 팔다리를 배배 꼬고 포즈를 취하던 고 시키가 금세 눈꼬리를 축 늘어뜨린다. 어제 밤새 연구한 포즈인데.
“고시키. 몸이 전반적으로 굳었어.”
한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우시지마가 입을 열었다. 시라부의 지도는 냉정하면서도 정확해 따로 덧붙일 말이 크게 없는지라 우시지마는 자신의 의견만 전달하는 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시무룩한 표정의 고시키가 스크린 앞에서 내려오자 상의를 탈의한 채 블랙진만 입은 리에프가 긴장된 얼굴로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이번 회 차 수업의 컨셉은 블랙&화이트. 연습생들이 스스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의상과 포즈를 연구해서 발표를 하는 시간이었다.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한 얼굴로 포즈를 취하는 리에프를 응시하는 우시지마의 옆으로 텐도가 슬쩍 다가섰다. 가파르게 깎아내리는 느낌의 옆얼굴이 역시나 매력적이다. 일하는 와카토시군의 얼굴은 멋지다니까.
“멍청한 자식! 조명을 전혀 활용 못하고 있잖아!”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시라부의 벼락같은 지적에 리에프가 입을 삐죽 내민다. 난 안나 같은 스타일이 좋거든여. 혼잣말이었건만. 스크린 앞을 떠나는 리에프의 등 뒤로 칼 같은 눈빛이 퍽퍽 꽂혔다. 쳇. 귀까지 밝으셔.
다음은, 히나타 쇼요. 명단이 적힌 파일을 내려놓으며 시라부가 호명했다. 쭈뼛쭈뼛 대며 스크린 앞에 서는 히나타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려는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긴장감이 어린 눈으로 시라부의 눈치를 살폈다.
“뭐야, 저거. 크크큭.”
텐도가 킥킥대며 히나타를 가리키자, 다들 일제히 와하하 하고 겨우 참았다는 듯 틀어막은 입에서 손을 떼고 일제히 웃기 시작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되는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연습생들을 바라보던 히나타는, 곧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져서는 후타쿠치를 향해 분통을 터뜨렸다. 우씨!!! 어쩐지 이상하다고 했어!!!
히나타가 준비한, 아니 아마도 후타쿠치의 질 나쁜 장난에 넘어가서 입게 된 옷은 자신의 것이라기에는 한참 사이즈가 큰 와이셔츠였다. 허벅지의 반쯤 오는 기장의 셔츠 아래엔 셔츠만큼 시리도록 하얀 벗은 다리가 곧게 뻗어있었다.
무슨 소리야 건방진 꼬맹이. 이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의상이라고! 남친 셔츠 몰라? 후타쿠치가 능청스럽게 둘러댔으나, 그 역시 얼마나 웃었는지 얼굴이 시뻘개 진 채, 눈가에는 눈물까지 맺혀있었다.
때 아닌 웃음 폭탄에 시라부의 얼음 왕국에 아버님댁에 하나 놓아드려야 할 보일러라도 땐 듯 훈훈함이 감돌았다. 딱 두 사람, 당장 입에 문 걸레를 연습생들 주둥이에 처넣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는 시라부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히나타를 응시하는 우시지마만 빼고.
“여기가 놀이터야? 닥쳐 다들. 히나타 넌 얼른 시작해.”
시라부의 불호령에 순식간에 스튜디오가 얼음 마법이라도 부린 듯 얼어붙었다. 윽, 엘사 아니랄까봐.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긴장이 되는지 히나타는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셔츠 옆자락에 땀으로 젖은 손바닥을 문질렀다. 리에프가 섰을 때 꽉 차 보이던 스크린이 지금은 대형 극장이 되어있었다. 시라부가 촬영 준비를 마치고 히나타에게 신호를 보냈다.
심호흡을 하느라 크게 들썩이는 몸. 망설임이 어렸던 눈동자가 일순간 바뀌었다. 모양 좋은 무릎 뼈가 굽혀진다 했더니 순식간에 작은 몸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제 키 만큼 뛰었을까. 활처럼 뒤로 젖힌 몸, 탄력이 느껴지는 마른근육의 생동감 있는 움직임, 중력을 거스르는 자의 고양된 표정.
찰칵찰칵. 0.1초 단위로 이어지는 셔터소리가 시라부의 흡족한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당장 하이패션 잡지에 실어도 무방할 작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름답군.
낮게 터져 나온 탄성을 텐도는 놓치지 않았다. 검녹색 동공에 가득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새를 담은 그의 표정은 10년 지기 친구 텐도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꿈을 꾸는 표정이랄까.
요즘 우시지마상 사진이 아주 좋아요. 눈빛이 좀 더 깊어진 느낌이에요. 얼마 전 잡지 촬영을 담당했던 포토그래퍼의 말이 떠올랐다.
어느새 땅에 착지한 히나타가 고요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수십 개의 눈동자에 당황해하며 서있었다.
“어디서 배운 포즈지?”
“자신 있는 게 점프밖에 없어서… 배구를 했었거든요.”
마주 잡은 두 손을 꼼질거리며 히나타가 대답하자 시라부는 다시 카메라를 잡았다.
“한 번 더 부탁해.”
신선한 피사체. 시라부의 예술가적 욕심에 발동이 걸렸다. 다시 한 번 힘껏 뛰어올랐는데 후타쿠치가 무심히 중얼거린 소리가 히나타에게 들려왔다.
여. 팬티 보인다.
당황한 듯 공중에서 퍼덕거리던 히나타는 그대로 바닥으로 처박혔다. 쿠웅.
“아흣-”
쿠로오는 일종의 인내심 테스트를 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마를 찌푸리고 눈물을 글썽이는 꼬맹이의 붉은 입술 사이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단순히 근육이 놀란 것으로 진단 내린지 오래건만 이 야릇한 신음소리와 아파하는 얼굴이 묘하게 중독성이 있어 쿠로오는 발바닥의 길이가 자신의 손바닥 길이보다 한참 모자란 자그마한 발을 연신 주물럭대고 있었다.
“아, 아파요…”
“발목 쪽 근육이 놀란 거 같은데… 여기도 한 번 볼까?”
세운 무릎 뒤로 하얗게 드러난 허벅지를 아까부터 몰래 훔쳐보며 침을 삼키던 쿠로오가 기어코 손을 미끄러트렸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친 셔츠라니. 이건 뭐 깨끗하게 씻고 온 토끼가 스스로 접시 위에 올라가 다소곳하게 앉는 것과 다를 바 없잖아. 잡아먹어주세요- 하며.
히익- 부드러운 살결을 손바닥으로 쓸자 꼬맹이가 놀라며 숨을 들이킨다. 리트머스 종이도 아니고. 금세 핑크빛으로 달아오르는 몸이 역시나 감도가 좋아서 쿠로오는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좋은데.”
“네에?”
“아, 허벅지 쪽은 다행히 아무 이상이 없다는 소리야.”
감상에 심취하다보니 무심코 속마음을 뱉어낼 뻔 했다.
“깁스 같은 걸로 고정시킬 정도는 아니고 최대한 조심해서 움직여. 되도록이면 걷지 말고.”
“네…”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는 게 애처로우면서도 귀엽다. 비단 지금 순간만 그런 게 아니라 쿠로오가 히나타에게 느끼는 감정은 늘 그러했다.
연애 상담을 핑계로 히나타의 지고지순 짝사랑 스토리를 1편부터 완결편까지 듣고 난 쿠로오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은, 첫째. 사랑스런 꼬맹이의 사랑을 10년간 받아온 그가 부럽다. 둘째, 아이러니하게도 꼬맹이를 내치는 그의 태도가 납득이 간다라는 것이었다.
이 꼬맹이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평생을 바쳐 사랑하게 되겠지.
그건 자신같이 설렁설렁 인생을 사는 보헤미안에게는 일종의 사형 선고였다. 자유로운 영혼의 목이 댕강 날아가는. 내 자신의 정체성이냐 아니면 사랑이냐. 양립할 수 없는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역시 전자였다.
그래도 당장 눈앞의 이 예쁜이를 가지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하겠지. 그 남자도 역시. 그에게 결혼이란 어쩌면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발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우시와카 쪽은 잘 되고 있어? 신장은 아직 무사하고?”
“아니요… 흑… 이제 일주일 남았는데…”
짝사랑을 반하게 만들겠다고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에피소드는 참 꼬맹이다워 피식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힘이 들었더랬다. 배를 꼬옥 감싸고 신장이 떼일 위기에 처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직접 정확한 신장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뒷목에서부터 쭈욱 손가락을 세워 척추를 훑으며 잘록한 허리까지 내려와서 그 부근을 손끝으로 꾸욱 눌러주었더랬다. 여기랑 여기. 양쪽에 두개가 있지. 진득한 손길에 목덜미가 달아오르는걸 보는 게 꽤 즐거웠는데.
연애의 기술이란 책에서 본 전략은 죄다 엉터리였다. 전략이 엉터리였기 보다는 그걸 히나타가 잘못 적용했다는 게 맞는 거겠지. 밀당을 하려면 은근한 메시지를 보냈어야지, 오늘은 운세 따위를 보냈다니. 그러나 쿠로오는 그걸 굳이 고쳐주지 않았다. 자신에게 득 될 게 없는 일을 하는 자선 사업가 스타일은 아니거든.
“진짜 신장을 팔아야 하나 봐요…”
땅을 파고 지구 반대편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한숨을 내쉬는 꼬맹이가 사랑스럽다. 우시지마를 도통 이해 할 수 없다. 연애에 서툰 이 허접 꼬맹이가 얼마나 귀여운데.
그래. 이 타이밍이면 말해볼만 하다. 그 트레이닝비 내가 내줄게. 대신 나랑 사귈래? 하고.
우울한 듯 꼼지락대는 제 발 끝을 쳐다보는 히나타. 푹 숙인 뒷목덜미를 보드라운 감귤색 머리카락이 덮고 있었다. 이끌리 듯 손을 뻗자, 손가락을 감아오는 곱슬머리의 간질거리는 감촉. 낯선 손길에 놀란 듯 자신을 바라보는 꼬맹이의 말간 얼굴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끝이 둥근 귀여운 코에 자신의 코가 닿을 때 쯤.
아이고. 이렇게 노골적이어서야.
쿠로오는 한 쪽 입꼬리를 올렸다.
히나타의 등 뒤쪽 유리벽면 위로 낯익은 인영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이 자신을 노려보는 그, 우시지마가. 마치 분노한 짐승의 눈빛.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고만.
야차가 따로 없는 그 얼굴을 보니, 뜨겁게 달아올랐던 열기가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얼굴에 뭐가 묻었네.”
쿠로오는 곧 닿을 것처럼 가까운 히나타의 얼굴에 후-하고 바람을 불었다. 히나타가 얼굴을 찌푸리며 묻는다. 앗, 진짜요?
진짜긴. 금방 너 먹힐 뻔 했어, 나한테.
“그럼 그렇지.”
“네?”
대답대신 쿠로오는 싱긋 웃었다.
천하의 우시지마라도 말이지. 요렇게 예쁜데 안 빠지고 배기나. 정작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쿠로오는 아쉬운 듯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고지를 눈앞에 두고 하산하는 느낌이다.
근데... 이 상황 왠지 꼬맹이가 열을 올리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봤던 그 책에서 봤던 기술 같은데?
연애의 기술 chapter 4. 때론 질투가 사랑의 진단시약이 된다.
쿠로오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큐피트가 된 것 같아 기분이 더럽단 말이야.
*
히나타는 심호흡을 하고 조용히 문고리를 돌렸다. 대표이사실이라는 팻말 때문 탓일까. 어찌된 것이 다른 문에 비해 훨씬 무거운 것 같았다. 천천히 열린 문 사이로 드러난 사무실 안의 모습은 주인을 닮았다. 고급스러운 마호가니의 가구들과 시원하게 도시의 전경을 보여주는 전면 창. 그리고 그 창 너머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우시지마의 뒷모습. 여자들이 업히고 싶은 등짝 1위에 랭크된 넓은 등이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꿈적도 않고 우뚝 서있었다.
“저기...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건 그가 평소보다 왠지 기분이 더 나빠 보였기 때문이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는 탱탱하게 잡아당긴 실과 같은 긴장감이 있었다. 잘못하다가는 툭- 하고 끊어질 것만 같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자, 슬로우모션처럼 천천히 그가 돌아섰다. 햇빛을 등에 지고 있는지라 명확하게 그의 표정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혹시 하, 할부는 안 되나요?”
“......”
“트, 트레이닝 비용이요…”
몇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저 재수지마는 날이 갈수록 어찌된 판인지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이 점점 더 살벌해졌다. 등 뒤로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은 오싹함에 뒤를 돌아보면 늘 그가 뚫어질 것 같은 시선을 자신에게 쏘아대고 있었다. 이건 반하게 할 확률보다 차라리 살인을 당할 확률이 높아보였다. 그렇다고 신장을 파는 건 싫다! 절대! 그래서 끙끙대며 머리를 굴려서 낸 결론이 이거였다. 그래, 할부가 있지! 이렇게 비싼데 24개월, 아니 36개월 할부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어? 시라토리자와라면 잘 나가는 에이전시인데 그렇게 쩨쩨하게 굴지는 않겠지.
“그건 포기하겠다는 의미인가?”
낮은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있었다. 우시지마의 눈에 알 수 없는 분노가 서려있었다.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전달되는 노기에 히나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역시 하, 할부는 안 되는 걸까?
우시지마가 천천히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왠지 도망가야 할 것 같은데, 차가운, 아니, 뜨거운가. 온도를 가늠하기 힘든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발이 바닥에 붙어버린 듯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머스크 향. 지기 시작한 석양의 빛이 완전히 우시지마에게 가릴 만큼, 그가 다가왔다. 왠지 숨이 막혀왔다. 마주한 검녹색의 눈에 빨려들 것만 같았다. 크고 두꺼운 손이 머리 위로 떠올랐다. 때리려나! 눈을 질끔 감았으나, 이내 그의 손이 자신의 목덜미를 잡아왔다.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놀라서 몸이 뻣뻣하게 굳어 가는데, 엄지손가락이 느릿느릿 가늘게 떨리는 목젖을 꾸욱 눌렀다.
“셔츠 단추는 항상 두 개 정도의 여유를 두도록. 너의 쇄골은 꽤 곧은 편이거든.”
셔츠 단추 두 개가 우시지마의 손가락에 의해 풀렸다. 드러난 쇄골이 뻗은 방향으로 우시지마의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 왠지 숨을 쉬기 힘들어 히나타는 겨우 입 밖으로 숨을 토해냈다. 우시지마의 반대쪽 손이 히나타의 마른 등에 닿아왔다. 눅진하고 뜨거운 손길. 히나타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세우며 피하려했지만, 이내 그가 쇄골을 더듬던 손으로 강하게 허리를 끌어당겨왔다. 당황해서 맞닿은 가슴을 손으로 밀어보았지만 벽을 미는 감각이 돌아올 뿐이었다. 그래, 처음 만났을 때 여기에 부딪히고 별이 보였지.
두근두근.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심장소리가 맞닿은 가슴 사이로 울리고 있었다.
우시지마의 뜨거운 숨결이 귀에 닿아와 히나타의 목덜미가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한참 등을 어루만지던 손이 매끈한 옆구리를 거쳐 거침없이 엉덩이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뭐, 뭐하는 거예요!”
엉덩이를 꽉 쥐어오는 손길에 온몸을 버둥대며 빠져나가려는데, 음산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여길 몇 명이 스쳐갔지?”
뭐, 뭐라고?
히나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저 재수지마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그 날 밤도 그래서 온 거 아니었나?”
분명 저 뻔뻔스런 낯짝을 후려치고 화를 내야할 사람은 자신인데. 분노로 뒤덮인 깊은 검녹색의 눈에선 알 수 없는 슬픔이 있어 히나타는 어떤 말을 꺼내야할지 확신이 없었다. 겨우 입술을 비집고 나온 말.
당신 정말 최악이야.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힘없이 중얼대는 히나타의 목소리에 우시지마는 끝내 등을 보였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술집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히나타를 보고 츠키시마는 쯧쯧 혀를 찼다. 가진 것 중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거라고는 사지밖에 없는 멍청이가. 코가 시뻘건 게 이미 오기 전부터 질질 짜고 있었던 것 같은데 또 어떤 바보짓을 했을지.
아니나 다를까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츠~키~시~마~ 하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른다.
“왜. 신장 뗐냐?”
“아니, 아직... 근데 곧 떼야할 거 같아.”
“그거 때문에 질질 짜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아니, 그것도 그건데...”
훌쩍이며 문법을 싸그리 무시한 문장을 나열하는지라, 이해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그러니까 그 우시지마인가가 너를 아주 못살게 군다?”
“그렇다니까. 내가 언제 막 헤프게 하고 다녔다고! 나한테는 온리 오이카와상 뿐인데!”
츠키시마는 테이블 위에 있던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 개비 빼어 물었다가, 실내 금연임을 깨닫고 다시 집어넣었다. 얘랑 얘기할 때는 담배가 막 절로 땡긴다. 하도 답답해서 니코틴으로 좀 뚫어줘야 제정신으로 앉아있을 수 있을 것 같다.
“넌 걔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몰라. 그냥 내가 싫은가보지.”
데자뷰가 따로 없네. 이 대화를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수백 번을 해왔던 것을 과연 이 멍청이는 알고 있을까?
히나타가 단세포의 멍청이이긴 해도 인간관계 능력이 그다지 떨어지는 애는 분명 아닌데, 이상하게 연애에 관해서는 거의 백치와 다름없었다. 단지 미련 터지게 10년 넘게 인간쓰레기 오이카와를 좋아해온 것 때문에 연애 고자라 불리는 건 아니었다. 자신을 향해 사랑의 오오라를 풍기는 인간들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의도치 않게 철벽을 쳐대는 것이 연애 고자라 불리는 더 큰 이유였다.
타고난 근본이 되바라진 애는 아니라, 남들에게 참 친절한데 그게 상대방의 오해를 사기 시작하면서 주로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히나타의 행동을 자기 구미에 맞춰 저 좋을 대로 해석한 상대가 적극적으로 구애를 해오는데, 히나타는 그걸 등신같이 알아채지 못했다. 실망한 상대방이 히나타에게 제멋대로 상처받고 폭언이나 상처를 주는 패턴.
입 아프게 길게 설명해봤자 뭐 자신에게 이득 되는 건 하나 없으니 굳이 츠키시마는 히나타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언제까지나 이 멍청이의 연애 뒷바라지를 할 수는 없었다. 오늘을 바로 그 이유를 설명해주는 D-day로 삼기로 결심하고 츠키시마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을까 이 돌대가리가.
“너 오이카와상이 먹튀 했을 때 기분이 어땠어.”
“무, 무슨 소리야! 먹튀라니!”
“맞잖아. 너 실컷 갖고 놀고선 결혼한다고 튀었잖아.”
“아직 결혼 안했거든? 그리고 갖고 논 거... 확실한 거 아니잖아.”
논점을 흐리는 걸로 치면 이 멍청이가 세계 1위다, 분명. 예시로 오이카와를 드는 게 아니었다. 츠키시마는 맥주로 목을 축이고는 다시 질문을 시작했다.
“널 분명 좋아하는 것처럼 키스했던 사람이, 다음 날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기분이 어떨 거 같아?”
“완전 화나겠지!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근데 그 사람이 이제는 널 포기하겠다고 하면.”
“우와, 완전 제멋대로네! 뚜껑 열리지!”
“그래, 그거.”
“으, 응?”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이해하려면 한참이 걸릴 듯 했다. 내일 출근을 위해 이 멍청이를 상대하느라 소모한 체력을 보충하려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서는 게 상책이다.
“그 우시지마인가가 널 좋아하나보지.”
“에엑?”
화들짝 놀라며 온몸을 부들 떠는 게 역시나 연애 고자답다. 전혀 눈치 못 채고 있었군. 동그랗게 뜬 눈에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피곤하다, 역시. 츠키시마는 뻣뻣하게 굳어가는 승모근을 주물렀다.
“니가 사라.”
신장 안 떼도 될 거 같은데 그 정도는 니가 사야지.
옆에 가지런히 접어두었던 자켓에 팔을 끼운 후, 츠키시마는 넋을 놓고 앉아 있는 히나타 앞으로 계산서를 툭 집어던졌다.
*
히나타는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요새 스트레스가 심하다 했더니 기가 약해졌나. 헛것이 보였다. 다시 한 번 눈을 크게 떠보아도 100미터 멀리서도 재수 없는 기운이 느껴지는 반반하게 잘생긴 모습을 한 환영은 사라지지 않았다.
“히나타 쇼요.”
심지어 환청까지. 진짜 보약이라도 한 첩 지어먹어야 할까봐.
“데리러 왔다.”
“에엑?”
벤츠남이라더니. 진짜 벤츠를 끌고 온 그는 우시지마 와카토시였다. 눈을 끔벅대고 사태 파악을 위해 잠시 멈춰있는데 이윽코 여기저기서 빵빵하고 클랙션이 울려댔다. 아침 출근 시간에 이 좁은 골목에다가 그 큰 차를 세워두면 어떡해요!
도덕과 양심이라면 어릴 때부터 신호등 하나 빨간불에 건넌 적 없는 히나타인지라 멀뚱히 서있는 우시지마의 팔을 잡고 차로 밀어넣었다.
“이웃에 민폐예요! 일단 타요!”
아직 조금 절뚝거리는 자신의 다리를 보고 우시지마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히나타의 성화에 못 이겨 운전석에 올랐다.
묵묵히 앞만 보고 운전하는 우시지마의 모습을 보며 히나타는 왠지 자꾸 며칠 전 츠키시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시지마가 나를 조… 좋아…
“히나타.”
“조, 좋아! 히익!”
“왜 그러지?”
큰일 날 뻔 했다. 히나타는 제 입을 두 손으로 꾹 틀어막았다.
머리 되게 좋은 제 친구가 말하길 당신이 나를 좋아한대요. 진짜예요? 차마 물을 수 없어 어색하게 손을 휘저었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아무리 똑똑하다지만 이번엔 츠키시마가 틀린 게 분명하다. 좋아할 리가. 지금 이대로 새우잡이 원양어선에 나를 판다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인데.
잠시 침묵하던 우시지마가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게 있다.”
“네?”
“왜 누가 봐도 사귀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거지?”
고요한 눈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보았던 것과 달리 잔잔한 밤 호수 같은 눈. 왠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츠키시마 탓이다. 괜한 말을 해가지고. 그런데 이 사람은 왜 갑자기 이게 궁금한 걸까.
“오랫동안 좋아하던 사람이 결혼을 해요. 그래서…”
“그렇군.”
아니, 아직 말 안 끝났는데. 창조주도 아니고 시작도 끝도 자기 마음대로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아침 출근 시간의 교통 정체는 역시 최악인지라 이 삐까번쩍한 비싼 차도 별수 없이 도로에 갇힌 채 제 속도를 내지 못했다. 아무리 벤츠라해도 차의 실내 공간이야 버스가 아닌 이상 뻔해,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옆을 슬쩍 올려다보니 여전히 인간미 없이 완벽하게 잘생긴 얼굴이 있었다.
우시지마가 널 좋아하나보지.
츠키시마의 말이 머릿속에 벌이라도 들어있는 듯 윙윙 끊임없이 맴돌아, 괜히 뜨거워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연신 해댔다.
“트레이닝비는 필요 없다.”
“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말.
뭐, 뭐야, 진짜 원양어선 행인가? 아니면 며칠 전 성희롱에 대한 입막음의 대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그를 쳐다보았으나 꾹 닫힌 입술은 끝까지 열리지 않았다.
이유가 궁금했으나 괜히 그의 기분을 거스르게 해서 마음을 휙-하고 바꿔 버릴까봐 히나타는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게 조용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휴우. 어쨌거나 내 신장을 지켜냈어! 혹시 나중에 딴말할 수 있으니 녹음을 해뒀어야 했는데- 뒤늦게 생각이 떠올랐으나 이미 차는 목적지에 도착한 후였다.
에이전시로 갈 줄 알았더니 낯선 장소의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히나타는 조금씩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여, 역시 그건 그냥 해본 말이었나. 인신매매가 보통 이런 으슥한 곳에서 이뤄지던데. 덜덜.
주차를 마치고 시동을 끈 우시지마가 조용히 히나타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하면 사귀고 싶은 남자가 되는지는 나도 모른다.”
“에엣?”
“오늘 내 옆에서 보고 니가 알려주었으면 좋겠군.”
그러니까 이건, 키무라 타쿠야가 자기가 왜 잘생긴지 당췌 모르겠으니 다른 사람이 왜 자기 보고 잘생겼냐고 하는지 알려달라는 거랑 같은 거잖아! 뚱딴지도 이런 잘생긴 뚱딴지가 따로 없네. 도무지 이게 말인지 방구인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게 혼자서 세상 진지해, 히나타는 어색하게 하하-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곳은 건물 8층에 위치한 촬영 스튜디오였다. 시라토리자와에 있는 것보다 몇 배나 더 큰 규모와 장비들을 보니 왠지 긴장이 되었다. 바쁜 듯이 움직이던 스텝들이 우시지마를 알아보곤 일제히 반갑게 인사를 했다.
“헤이헤이헤이 우시지마!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 잡지사의 지면 촬영이라 했다. 담당 포토그래퍼는 패션 쪽에는 문외한인 히니타도 알만큼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름이 보쿠토 코타로랬나. 회색으로 염색된 머리카락을 삐죽 세운 것이 역시 패션 종사자다웠다.
“촬영 컨셉 미리 받아봤지? 뭐 우시지마라면 걱정 없지만. 하하핫”
그 근엄한 우시지마의 등을 팡팡 내리치다니. 친화력이 엄청난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아니면 심각한 눈치 바보거나. 보쿠토는 우시지마 뒤로 몸을 숨기듯 서있는 히나타를 보고는 고개를 쭉 뺐다. 부엉이 같은 눈과 마주치자 그가 씩 웃는다. 까꿍- 하며.
“요 귀여운 꼬맹이는 누구야?”
“꼬, 꼬맹이 아닌데요…”
당신들이 지나치게 큰 거라고! 난 일본 남자 평균보다 조금 작을 뿐이라니까.
“견학하러 왔을 뿐이다. 의자 하나 준비해줬으면 좋겠군. 다리를 다쳤거든.”
우시지마는 보쿠토 앞을 가로막아서며 말했다. 우시지마 뒤로 꼬맹이가 쓱 가려져버리자 보쿠토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알았다고, 우시지마. 쟤 네 것이라는 거.
요즘 업계에서 우시지마의 분위기가 어딘가 변했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요 꼬맹이가 원인이었고만.
오늘 촬영이 무척이나 기대되는 보쿠토였다.
역시 세계적인 모델이 맞았다. 그동안 에이전시에서 리에프나 후타쿠치와 같은 모델들을 보아왔지만 이렇게까지 압도적인 카리스마는 느끼지 못했는데.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숨죽이고 우시지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 카메라 셔터가 찰칵대는 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을 만큼 모두 우시지마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그의 타고난 매력.
이건 사귀고 싶은 걸 넘어서 떠받들어야 할 거 같은데. 높은 단 위 화려한 장식으로 된 의자에 앉은 황제폐하의 느낌? 패왕색이란 이런걸까.
수전에서 나오는 물로 손을 씻으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조금 상기된 두 뺨.
오늘 우시지마는 좀 많이 이상했다. 보쿠토의 바로 옆, 가장 우시지마가 잘 보이는 자리, 아니 우시지마가 가장 자신을 잘 볼 수 있는 자리에 앉혀두고서는 수시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 잔잔한 시선이 이상하게도 간지러워 몸이 배배 꼬일 것만 같았다. 촬영 틈틈이 스텝들이 준비해 놓은 따뜻한 커피와 쿠키 등을 손수 가져다주기도 했으며, 촬영 시간이 길어지자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좀 늦어지는군.’ 하며 미안해하는데 여태껏 제가 알던 그 재수탱이가 맞는지 눈을 몇 번을 부비고 다시 보았더랬다.
우시지마가 자신을 진짜 좋아해서 저러는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저런 사람이었는데 몰랐던 건지. 전자이든 후자이든 이상하게도 심장이 콩콩 뛰어 결국 화장실로 피신오고 말았다. 계속 있다가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킬 판이었다.
문득 스가와라 선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히나타, 열 번 싸가지 없이 굴다가 한 번 잘해주는 걸 좋다고 헤헤 거리면 어떡해. 약속을 잡으면 만나기 몇 시간 전에 돌연 취소해버리기 일쑤인 오이카와상이 모처럼 펑크를 내지 않았다며 기뻐하는 저를 보고 그랬었지.
오이카와상… 그러고보니 한동안 오이카와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소중한 신장 한쪽을 지키기 위해서 고군분투했고, 우시지마의 눈치를 봐야 했으며, 적성에 맞지 않은 모델 트레이닝까지. 머리만 기댔다고 하면 지하철이든, 에이전시에서든, 집에서든 자기 바빠 오이카와상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오이카와상 결혼식이 얼마나 남았지? 한 달 남았나. 몇 번이고 악몽 속에서 보았던 그의 결혼식 장면. 멋있었다, 턱시도를 입은 모습이. 지금 거울에 비친 저 남자처럼.
으, 으으응?
“쇼짱. 오랜만이네.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는걸.”
훽 뒤를 돌아보자 턱시도를 입고 팔짱을 낀 진짜 오이카와 토오루가 서있었다.
“오, 오이카와상?”
“뒷모습이 낯익다했더니, 역시 쇼짱이었구나.”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반반한 얼굴. 결 좋은 밤색의 머리카락까지도. 분명 오이카와였다.
귀신이라도 본 듯 몸이 얼어붙은채 서있으니 그가 피식 웃는다. 겨우 입술 사이로 질문이 비집고 나왔다.
“여, 여긴 어쩐 일로…”
“웨딩 촬영.”
“아... “
생긋 웃는 얼굴. 10년간 그토록 좋아했던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가슴 한쪽 구석이 저릿했다. 결혼한다는 폭탄같은 얘기를 듣고 정신없이 그의 집에서 뛰어나온 후, 다음번에 만나면 반드시 당신을 내게 반하게 만들겠다고 결심했었는데.
턱시도를 입은 당신 앞에 전 좀 많이 초라하네요.
“연락은 왜 안 했어? 기다렸는데.”
“그, 그게…”
“보고 싶었어.”
아무렇지 않은 듯 그가 감귤색 머리카락을 찬찬히 쓰다듬는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부드러운 밤색의 눈이 다정했다.
“허니문 다녀와서 같이 온천이라도 갈까?”
같이? 오이카와가 말하는 ‘같이’가 누굴 의미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고운 얼굴과 달리 배구공을 만지는 까칠하고 단단한 손이 뺨에 닿아왔다. 너무 익숙한 촉감에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시선을 아래로 떨구자 천천히 오이카와의 입술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이래도... 되는 거야? 츠키시마의 말처럼 남들보다 한참이나 사고 능력이 떨어지는지라 입술이 닿기 전에 결론에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히나타.”
저음의 목소리. 오이카와의 어깨 너머로 방금 전까지 눈부신 조명 아래에 있던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었다.
“우, 우시지마상!”
“우시지마?”
오이카와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델 우시지마? 유명하신 분이 남 재미 보는데 무슨 일로?”
“당신이 히나타가 좋아한다는 그 남자로군.”
저 짜증나는 모델씨가 쇼짱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오이카와는 급격하게 기분이 다운되는 것을 느꼈다.
“당신은 정말 멍청하군.”
“뭐?”
오이카와의 이마에 핏대가 서는 게 보였다.
지금 국가대표 엘리트 세터한테 멍청하다고 한 거야?
“저 아이에 대해 전혀 모르는군. 안다면 지금처럼 함부로 대할 순 없겠지.”
“무슨 헛소리야!”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군.”
아득 어금니가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이카와상의 얼굴은 고등학교 배구부 시절 라이벌에게 한 번도 이기지 못한 후 은퇴했을 때의 표정이었다. 무척이나 분한 듯한.
눈앞에 펼쳐진 드라마 같은 상황에 히나타는 말을 잃고 멍하니 서있었다. 저벅저벅. 오이카와를 스쳐지나온 우시지마가 히나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굴에 띠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마치 나츠가 눈에 하트를 그리며 보던 유치한 로맨스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같다는 생각이 들자, 히나타의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내가 드디어 미쳤나봐.
트레이닝 때 시라부가 찍은 사진이 시라토리자와 에이전시 건물 벽면에 전면으로 걸렸다.
히나타가 남친 셔츠를 입고 날아오른 사진이. 사진 아래에는 ‘Find your Wings’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날아오르는 하얀 새라니. 시라토리자와란 이름과 너무 잘 어울리잖아. 텐도는 새로운 옥외 광고가 마음에 드는지 연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광고로 시라토리자와의 인지도 및 호감도는 더욱 상승했다. 밀려드는 일이 그걸 반증했다.
그리고, 건물 옆면 전체를 덮은 광고 속 주인공은 의도치 않게 이슈가 되어 얼떨결에 신인 모델로 데뷔하게 되었다. 처음 사진이 걸린 날 히나타는 대표이사실로 쳐들어와 우시지마의 멱살을 잡으며 씩씩댔더랬다. 트레이닝비를 받지 않는다는 게 모델료로 대신 하라는 거였냐며.
또 한 가지 시라토리자와에서 화젯거리가 있다면.
“이건 빼도록 하지.”
“아니 이걸 빼면 도대체 뭘 쓰란 건가요!”
좀처럼 우시지마의 말에 거스르는 법이 없는 시라부가 인상을 구기며 언성을 높였다.
“너무 자극적이야.”
대체 어디가 자극적이란 말인가. 여자 모델도 아니고 남자 모델에게 상의 탈의는 흔히 있는 일이건만. 시라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화내봤자 결국 저 고집불통 상사를 이길 재간은 없다.
이로써 신인 모델 히나타 쇼요의 포트포리오는 얼굴과 손 외엔 살색을 찾아보기 힘든 사진만 실리게 되었다. 시라부가 존경해마지 않던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정함은 어디로 갔는지. 자신이 잘 나가는 모델이자 일본을 대표하는 모델 에이전시의 대표이사인 걸 잊은 건지, 우시지마는 히나타와 관련된 건 하나부터 열까지 손수 다 챙겼다. 참 한가하시지.
완전 사랑의 바보로구나~ 텐도는 특유의 음정으로 우시지마를 향해 비죽거렸다.
그래도 뭐 해피엔딩일까나.
잡초군이 연애의 고자라면, 와카토시는 사랑의 바보였다. 자신의 감정에 둔하기 짝이 없는 저 바보가 잡초군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은 지금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건 뭐 큐피트가 단 한 차례의 실수 없이 과녁의 정중앙을 뚫고 양궁의 민족 대한민국을 꺾고 올림픽 10회 연속 금메달을 딸 확률이랄까.
잡초군이 와카토시군의 집에 들이닥친 날, 그러니깐 한밤중 술에 취해 와카토시군의 집 주소를 묻는 잡초군에 친절히 답해준 날, 잡초군은 그곳에 실수로 깜짝 선물을 놓고 왔더랬다. 바로 잡초군이 바이블로 삼던 ‘연애의 기술’ 책을. 와카토시시군은 그걸 잡초군의 엉덩이를 잡고 폭언을 퍼부은 날, 우연히 침대 아래에서 발견했고.
책을 읽고 나니 히나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되더군.
담담한 어조로 와카토시군이 말했었지. 뿐만 아니라 그 허술한 전략에 낚여 화만 버럭내던 자신이 사실 잡초군에게 완전히 빠진 것임도 알게 됐고.
뭐 여차저차 해서 두 바보들이 연애한다는 소리.
어디 나사가 하나 빠진 듯 구는 와카토시군도 꽤 재밌으니 이걸로 된 거 아니야?
*
목덜미에 간질이듯 닿는 입술의 감촉에 히나타는 푸흐흐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잠의 기운이 끈적끈적한 잼처럼 달라붙어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노곤한 몸을 감싸 안은 건 자신보다 두 배는 더 넓은 우시지마의 가슴. 신인이긴 하지만 간간히 촬영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몸에 잔뜩 흔적을 새기면 어쩌라는 건지. 자신이 만들어 놓고선 그게 또 사랑스럽다는 듯이 일일이 하나하나 입을 맞추고 있다. 분명 직업 정신을 어디다가 팔아먹은 게 틀림없다. 그것도 급매로.
“뭐하는 거예요?”
조금 갈라진 목소리에 그가 어깨에 묻었던 입술을 이마로 가져간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따뜻한 온기의 입술.
“내 잡초를 가꾸고 있었다.”
“엑? 나 아직 잡초예요?”
불만스럽게 입을 부우 내밀자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춰온다. 잔잔한 검녹색의 눈이 따뜻하게 시선을 맞춰왔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잡초였으면 좋겠어. 나만 알고 싶군. 이렇게 사랑스럽다는 걸.”
낯 뜨거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막상 말한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듣는 사람은 온몸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니. 이건 불공평하다.
제멋대로 뻗은 감귤색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그의 손길이 천천히 등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하자, 히나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본 건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여있던 색이 바랜 핑크빛 표지의 책.
그래서 이 책의 결말이 어떻게 났더라.
기억을 떠올리려 했지만 점차 사고를 마비시키는 감각에 실패하고 말았다. 검은색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묻으며 히나타는 가빠오는 숨을 가누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연애의 기술 final chapter. 실패해도 괜찮다.
여기에 나온 모든 기술이 실패한다 해도 걱정 마세요. 당신이 멋진 꽃을 피워낼 것임을 알아챌 운명의 상대는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