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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히나]

Pervaded

W.Green 아이들 (@fpdl102)

 어쩌다가 수락했더라. 딱 100일만 해 달라고 해서? 특유의 분위기에 압도되어서? 올해 열아홉 된 풋풋한 대학생 히나타 쇼요는 심히 기계적으로 뻣뻣하게 다리를 움직이며 그 어떤 지인에게나 무슨 일 있었냐는 물음을 들을 것 같은 표정으로 자취방의 문을 열었다. 완전 구닥다리는 아니지만 낡기는 낡은 맨션. 문 닫히는 소리가 오늘따라 크게 들렸다. 그대로 히나타는 주말 아침이라고 늘어져라 잠을 퍼 자던 몸뚱이를 포근하게 덮어준 이불로 향했다. 이불을 걷고 그 밑의 매트 위에 눕는 것도 힘들어 이불 위에 아예 쓰러졌다.

 

 그대로 히나타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려 성인이 된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샀던 스마트폰을 꺼내 켰다. 오후 9시 40분, 10월 3일 토요일. 홈 화면이 뜨고 손가락은 연락처 앱과 카톡 앱 사이를 헤매다 카톡 앱을 선택했다. 노란 화면 속 갈색 말풍선 속 노란 글씨가 지나간 뒤 히나타의 손가락이 마저 움직인 것은 상태 메시지를 바꾸기 위함이었다. ‘새로운 작은 거인'-히나타의 별명-의 상태 메시지는 오늘로 바뀌어야만 했다. 바뀌어야만 하는 이유는 친구 목록을 내려서 'う'에 도달하고 다시 좀 내리다 보면 보이는 'うしじま わかとし'라는 아주 단순하고 직설적인 별명의 친구… 그래, 친구 때문이었다. 히나타는 조심스럽게, 그 친구의 상태 메시지를 읽었다.

 

 「오늘 1일」

 

 오늘 1일, 히나타는 그 상태 메시지를 보고 안 그래도 부풀어 있는 머리카락을 박박 긁어 더 부풀렸다. 아니, 머리카락이 한 덩어리인 것도 아닌데 부풀렸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으려나. 여하튼 히나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 본 고민들을 모두 합쳐도 모자랄 크기의 고민 때문에 안 그래도 납작하게 뉘어진 몸이 더 납작해질 것 같은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손가락은 일단 그 고민의 무게를 이겨내고 상태 메시지를 바꾸고 있었지만 다른 신체는 아예 이불과 함께 푹 꺼져버릴 것 같을 느낌을 받고 있었다.

 

 "오늘… 1… 일…."

 

 히나타는 うしじま わかとし의 것과 똑같이 상태 메시지를 바꾼 뒤, 한숨을 푸욱 내쉬며 스마트폰의 화면을 끄고 대충 근처 바닥에 둔 뒤 착즙기 들어갔다 나온 과일마냥 축 처진 몸을 열심히 꼼지락거려 밑에 깔려 있던 이불을 몸에 계란말이처럼 돌돌 말았다. うしじま わかとし. 그렇다, 고등학교 배구에서 전국 3대 스파이커로 불렸고 청소년 배구 국가대표였던 그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맞다.

 

 히나타 쇼요가 오늘 1일이라고 상태 메시지를 바꾸게 한, 히나타 쇼요의 첫 애인.

 

 

 

 "우시지마 와카토시 선수가 뺑소니를 당해 병원에 입원……."

 "왼팔 재활에는 적어도 반년의 시간이 들어갈 것……."

 

 밤중에 집 근처 편의점에 다녀오던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뺑소니를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적어도 한 달 전 일이었다. 1년의 3분의 2가 지나갔을 무렵. V프리미어 리그의 한 강팀의 에이스이자 차기 성인 국가대표로 강력하게 거론되어 온 인물인 만큼 배구 계는 난리가 났고 우시지마를 높게 평가하던 이들은 그 뺑소니 범을 잡아 죽여야 한다는 등 험한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왼손잡이인 우시지마 와카토시에게 있어서 치료에 한 시즌 가까이 되는 시간을 써야 할 정도의 왼팔 부상은 분명 심각한 문제일 것이었다. 어쩌면 그의 앞으로의 선수 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

 

 당시 도쿄의 한 대학교 배구부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히나타는 한때 우시지마와 맞섰던 선수로서 우시지마의 부상을 안타까워했다. 히나타 안의 우시지마는 1년, 2년, 심지어 10년을 치료에 써야 하는 부상이라도 하루 만에 훌훌 털어내고 일어날 인물인데 안의 사람은 안의 사람일 뿐이었다. 현실은 동심 파괴라고 하기는 뭣하고 상상 파괴를 실행했다. 그런데 웬걸, 그 우시지마의 고등학교 후배라는 놈은, 고시키라는 놈은 2주일 전 뜬금없이 카톡으로 단체 채팅방을 열고 이런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오랜만이다))

 ((고1 때 합숙 기억하지?))

 ((그 때 만난 애들끼리 밥이나 먹자))

 

 초대받은 것은 그 메시지 내용에 맞게 츠키시마, 킨다이치, 쿠니미, 코가네가와, 햐쿠자와, 그리고 히나타. 히나타가 먼저 뭐라고 하기 전 츠키시마가 네 선배 소식 들은 것 맞냐고 핀잔을 주었고 고시키는 우시지마상은 주변 사람들이 기력 없어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하실 것이라며 꼭 자기가 채팅방에 초대한 어느 두 사람을 콕 집어 말하는 듯한 답을 내놓았다. 10월 3일 저녁 7시 30분, 도쿄 규테키. 예약은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는 몸만 오면 된다는 실로 듬직한 선언까지 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하는 츠키시마와 쿠니미를 붙잡는 것은 코가네가와와 킨다이치 몫이었다.

 

 그래, 그 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건장한 남정네 7명이서 자기 몫으로 나온 쇠고기 스테이크를 썰며 와인 한 글라스 하자는 것보다는 단 한 개의 불판에서 구워지는 야키니쿠 쟁탈전을 벌이며 사케 한 사발 하자는 것이 더 설득력 있으며, 킨다이치가 쿠니미를 붙잡는 것은 몰라도 코가네가와가 츠키시마를 붙잡는 것은 어색하다는 것을. 아니, 약속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에 들어섰을 때 카운터의 직원이 자신을 보고 예약자의 이름일 고시키 츠토무도 아니고 히나타 쇼요님 맞으시냐고 물어올 때 알아차렸어도 늦지 않았었을 것이다. 그 직원이 안내한 예약석이 7명이서 앉기에는 너무나도 비좁은, 아니, 앉는 것이 불가능한 2인석인 것을 보고 알아차렸어도 늦지 않았었을 지도.

 

 눈치 없는 새끼. 천사 같은 9살 어린 여동생을 위해 고운 말 바른 말만 평생 입에 달고 살아온 내가, 카게야마나 할 법한 이런 속된 말을 스스로에게 쓰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 고시키, 츠키시마, 킨다이치, 쿠니미, 코가네가와, 햐쿠자와 모두에게 히나타는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보내 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그제야 히나타는 자신이 고시키, 츠키시마, 킨다이치, 쿠니미, 코가네가와, 햐쿠자와가 한통속이 되어 꾸민 상황에 놓여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시키 메시지만 보고 교통비와 생각한 음식 1인분 값과 비상금만 가져왔는데. 여기 설마 예약 받을 때 음식 종류와 양까지 예약 받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망상에 떨 때였다.

 

 "오랜만이군."

 "우시지마상?!"

 

 히나타가 생각하기에 병원에 있어야 할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환자 주제에 사복을 꽤 멋스럽게 빼 입은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히나타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잠깐, 왜 제 테이블에 앉으세요.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히나타는 우시지마가 묵묵히 자신을 마주하고 앉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웨이터가 와서 메뉴판을 건네주었고, 충격에 굳어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 히나타를 대신해 우시지마가 왼손 대신 오른손을 뻗어 그것을 받았다. 히나타의 긴장이 풀린 것은 우시지마가 받은 메뉴판을 그대로 건네준 후였고 히나타는 어색함을 이기기 위해 아무 말이나 던졌다.

 

 "주문은… 뭐로…."

 "네가 좋아하는 걸로 골라도 된다."

 "그래도…."

 "텐도가 돈을 많이 걷었다."

 

 아, 고시키 포함 그 6명이 꾸민 것이 아니었구나. 텐도상이 꾸민 거였나. 어쨌든 고시키가 텐도상의 지시에 따라 유사 유스 합숙 동기들을 데리고 나를 속였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야. 음? 히나타는 문득 우시지마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돈을 걷었다고? 히나타는 혼돈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우시지마는 복잡해 보이지만 복잡하지 않은 눈동자를 깜빡이며, 히나타가 주문을 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저런 눈 은근 거부하기 힘들어. 히나타는 일단 나중에 혼란을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주로 쓰는 손을 쓸 수 없는 우시지마를 최대한 배려해 웬만하면 한 손으로도 먹을 수 있는 피자와 파스타를 시켰다.

 

 생긴 것은 베리 웰던으로 익힌 스테이크를 호쾌하게 우그적우그적 씹어 먹게 생겼는데 우시지마는 히나타의 주문대로 나온 포모도로를 오른손으로 먹으니 불편하겠지만 호로록 잘 흡입했다. 달짝지근한 꿀을 찍은 고르곤졸라 피자는 씹을수록 맛이 났다. 히나타는 피자를 다 삼키기도 전에 사이드로 같이 나온 샐러드를 포크로 콕콕 찍어 입에 집어넣었고 이를 본 우시지마는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 것이 좋다고 말을 꺼냈다. 네, 마음 같아서는 이 일을 꾸몄을 텐도상을 포함한 참가자 일곱 명을 꼭꼭 씹어 먹고 싶습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씹어 부드럽게 만들기에는 히나타의 담이 썩 크지 못했다.

 

 "텐도는 돈을 걷었고, 고시키는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자리요?"

 

 그래서 분위기는 우시지마의 주도 아래 흘러가게 되었다. 입안에 가득 찬 피자와 샐러드를 꿀꺽 삼킨 뒤 히나타는 눈동자를 굴렸다. 대화를 하는데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 포크는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우시지마가 말하기를, 히나타에게 할 말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텐도를 포함한 시라토리자와 배구부원들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가장 먼저 답신을 준 것이 텐도였다. 그리고 그것이 고시키에게 전해졌는지 고시키에게서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메시지가 왔고 또 텐도가 부원들에게 걷은 돈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입금을 해 왔다고.

 

 "… 그래서, 하실 말씀이 뭔가요?"

 

 히나타는 우시지마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히나타가 아는 우시지마는 굉장히 솔직했다. 걸러내지 않고 말을 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겠다. 그런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기에 배구부원들에게 조언을 구했다는 말인가. 안 그래도 기름진 음식을 먹은지라 속이 메스꺼워지기 딱 좋은데 긴장까지 하니 위가 끓어오르기 직전이었다. 우시지마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 모습을 오이카와라면 신선하다고 놀렸겠지만 히나타는 놀릴 배짱도 없었을 뿐더러 있었더라도 몸 상태 상 그럴 수 없었을 것이었다. 우시지마는 마침내, 손에 쥐었던 포크를 내려두고 말을 꺼냈다.

 

 "계약 연애, 해 보지 않겠나."

 

 

 

 그 때 음료수가 없었던 것이 다행이었지. 만약 입안에 음료수가 있었더라면 분명 뿜어져 나와 우시지마상의 얼굴을 강타했을 거야. 히나타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을 상상하며 고개를 저었다. 우시지마는 딱 100일만 사귀어 달라고, 그 후에는 계속 사귀어 줘도 헤어져도 된다고 말했고 히나타는 왜냐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둘은 전화번호와 카톡 등 연락 수단을 교환했고, 식사를 마친 뒤 나오면서 우시지마가 모든 음식 값을 결제했다. 텐도가 걷어준 돈의 일부라고. 언제 써야 하는지도 알려줬단다. 그렇게 각자 집으로 향했다.

 

 정리를 해 보니 머리가 좀 맑아지네. 히나타는 눈동자를 깜빡였다. 계약 연애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레스토랑에서 제법 근사한 음식을 먹으면서 할 말인가, 그런 의문보다도 어쩌다 수락해 버리기는 했지만 왜 하필 자신을 대상으로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먼저 히나타의 머릿속에 스쳤다. 안타깝게도 고등학생 시절 좋지 않았던 히나타의 머리는 성인이 되면서 약간 개선되었을 뿐 근본적으로는 변한 것이 없어 주모자와 동참자들을 씹어주고 싶다는 생각은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서 없어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니, 혼란을 수습할 새도 없이 혼란이 사라져 버렸다고 표현하는 것이 좀 더 긍정적이고 올바르지 않을까.

 

 ((자고 있나, 히나타 쇼요?))

 "!"

 

 그 때, 스마트폰의 진동과 함께 경쾌한 소리가 나며 화면에 갈색 창 하나가 떴고, 히나타는 이불에 말아져 있던 팔을 꺼내 스마트폰을 집었다. 소리는 카톡 알림 음이었고 창은 카톡 알림 창이었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うしじま わかとし, 우시지마였다. 시각을 확인해 보니 오후 9시 45분, 보통 성인이 잘 시각은 아니었다. 이런 것을 새삼스럽다고 하는 것이겠지, 히나타는 스마트폰 화면을 다시 켰다. 정식으로 사귀게 된 것은 아니지만 일단 사귀게 된 것인데 처음 나누는 메시지가 이렇게 평범하다니. 형형색색의 하트 이모티콘이 난무하는 낯간지러운 메시지는 역시 드라마 등에서나 나오는 거였어.

 

 (안 자고 있어요.)

 ((오늘 1일이군.))

 

 아직 꾸미지 않아 배경에 있는 것이라고는 탁한 푸른색뿐인 채팅방에 들어가 보낸 짧은 메시지에 대한 답장은 의외로 빨리 온 편이었다. 현재 우시지마가 처한 상황을 알고 있는 히나타는 보통 다른 사람들에게라면 초조함이나 이상함 등을 느낄 몇 분의 기다림에는 별 느낌이 들지 않았으나, 1일, 메시지 속의 그 짧디 짧은 단어 하나에는 숨이 콱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겍, 무선 인터넷과 액정을 초월해 느껴지는 우시지마의 진지함이 목을 누르는 것만 같았다. 계약 연애가 이렇게까지 진지할 필요 있을까. 히나타는 기침하는 모양새를 표현하는 의성어를 메시지로 보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기특한 머리를 굴려 평범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네요. 1일이네요.)

 ((지금 집에서 뭐하고 있나?))

 (딱히 할 게 없어서 그냥 있어요.)

 ((그렇군. 심심하지는 않나?))

 

 심심하죠. 당연한 것을 묻고 있으시네. 고등학교 생활을 내내 배구로 보낸 히나타에게는 이렇게 가만히 누운 채 스마트폰으로 채팅을 하는 것이 성미에 결코 맞지 않을 것이었다. 아니, 할 것이 없는 사람이라면 분명 심심하다는 감정을 느낄 터였다. 하지만 히나타는 우시지마 안의 논리 회로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 대신, 우시지마에게 계속 평범하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택했다. 심심하죠.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이 있나. 딱히요. 얼마 간 적당히 건조한 메시지가 오갔고 그 랠리는 우시지마가 먼저 자겠다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끝이 났다.

 

 

 2일.

 

 주말 중에서도 일요일이라고 어제보다 한 술 더 떠서 아예 흐물흐물해질 정도로 잠을 잔 히나타는 밥 먹으면 늦은 아침 겸 이른 점심을 먹었다고 해야 할 시간에 일어났다. 냉장고 안에 있던 계란은 부엌의 간장, 랩을 씌워뒀던 찬밥과 함께 히나타에게 좋은 양식이 되어주었다. 역시 간장계란밥이 최고야. 그 때, 충전기에 꽂혀 있는 스마트폰이 어떤 알림 소리를 내면서 화면에 팝업창을 하나 띄웠고 히나타는 밥을 전부 먹은 뒤 스마트폰 화면을 대충 슥 보고 창들을 전부 지워버렸다. 아까 온 것은 소리로 볼 때 일반 메시지 같은데, 히나타는 일반 메시지를 읽었다.

 

 ((일어났나?))

 ((자고 있는 것인가?))

 ((봤으면 답장해 주기 바란다.))

 

 현재 시각 오후 1시 30분. 오전 9시 경에 온 첫 메시지를 시작으로 약 2시간 간격으로 도착한 우시지마의 메시지. 그리고 쌓여 있는 부재중 전화. 히나타는 어제 자신이 몇 시에 잤나 생각했지만 곧 주말이기 때문에 생체 리듬이 박살났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평일에 배구부 활동을 너무 열심히 해서 그렇다는 변명은 본인이 본인에게 하는 것인데도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았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히나타는 우시지마에게 죄송하다고, 방금 막 일어나서 이제 봤다는 내용의 일반 메시지를 보낸 다음, 전화도 해야 하나 생각하다 고개를 젓고 우시지마의 답장을 기다렸다. 링동. 기다렸다는 듯 쑥 도착한 답장에 히나타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괜찮다. 어제 늦게 잔 것인가? 늦게 자는 것은 좋지 않다.))

 (늦게 잔 것은 아니고요, 일요일이잖아요.)

 ((아, 그렇군.))

 

 히나타는 늦게 자는 것은 좋지 않다는 어렸을 적 부모님께 듣고는 했던 잔소리 같은 메시지에 봐야 하는 상대는 액정 너머에나 있는데 괜히 혀를 샐쭉 내밀었다가, 자신의 당당하다면 당당한 답장에 비하면 진짜 당당한 우시지마의 답장에서 새삼 느껴지는 수신자의 독특한 발화 체계에 혀를 찼다. 뭐가 '아, 그렇군'이에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편해지기도 했다. 제 친구들이라는 놈들은 보나마나 메시지로 꾸짖거나, 놀리거나, 충고를 했겠지. 충고하는 것은 앞의 둘에 비하면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두 번째를 닮아온 듯한 놀림조가 섞여 있을 것임을 감안해야 했다. 히나타는 새로 답장을 보냈다.

 

 (지금 뭐 하고 계세요?)

 ((병원에서 재활 훈련을 받다 잠시 쉬고 있다.))

 (아... 불편하지 않으세요?)

 ((어느 정도 나아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오른손으로도 식사를 꽤 잘 하셨지. 히나타는 우시지마가 재활 훈련을 받던 중이었다는 것을 통해 그가 심한 부상을 입은 몸임을 다시 깨달음과 동시에 커리어에 지장을 줄지도 모를 정도의 사건을 겪었음에도 아주 의연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것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람과 사귀면 든든하지 않을 수가 없겠어. 히나타는 자기 손바닥으로 제 뺨을 직접 때렸다. 히나타 쇼요 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네가 그 사귀는 사람이잖아. 아니, 이게 아닌데. 찰싹. 히나타는 다시 뺨을 때렸다. 나는 정식으로 사귀는 사람이 아니지. 링동. 새 메시지의 타이밍이 좋았다.

 

 ((점심은 먹었나?))

 (네. 간장계란밥이요.)

 ((저녁 같이 먹겠나? 맛있는 규동 집을 알고 있다.))

 

 규동. 히나타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밥 위를 맛있는 쇠고기 볶음이 덮고 있는 고운 자태의 규동을 떠올린 다음, 어제 우시지마를 배려하기 위해 시키지 않았던 쇠고기 스테이크를 떠올렸다. 메뉴판의 사진 상으로는 밥, 감자튀김, 샐러드가 곁들여져 있었지. 맛은 분명히 다르겠지만 쇠고기는 쇠고기다. 예나 지금이나 먹성이 좋고 고기를 좋아하는 히나타는 상상만으로도 솟구치는 군침을 꼴깍 삼킨 뒤 그렇다면 오늘은 제가 내겠다고 기세 좋게 답장을 보냈다가, 단호하게 자신이 내겠다고 칼같이 들어온 우시지마의 답장에 누가 낼 것이냐로 인한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결과는 우시지마의 스트레이트로 우시지마 승, 우시지마가 내는 것으로.

 

 

 10일.

 

 우시지마와의 계약 연애는 뜻밖에도 다른 연인들이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무난하게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거나 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재활 때문에 직장을 쉬는 우시지마가 대학교에 다니는 히나타를 찾아오는 것은 예사였다. 왜 이런 것들이 뜻밖이냐면, 연애를 주도하다시피 하는 우시지마는 극단적으로 말해 머릿속에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배구뿐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히나타가 아는 한에서는. 5일 때인가 6일 때인가 어떻게 이런 뜨는 식당을 알고 있냐고 물으니, 시라토리자와 배구부원들이 가르쳐 준단다. 신기하게 납득되는 이유에 히나타는 멋쩍게 웃었었다.

 

 그렇게 웃으며 지내기만 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크지 않지만 오밀조밀 피어났던 히나타의 웃음꽃이 오늘 생기를 잃고 시들시들해질 줄 누가 알았으랴. 오늘 유일하게 듣는 강의가 교수님 사정으로 휴강이었고 마침 우시지마가 메시지를 보내서 함께 데이트를 나가 분위기 괜찮은 집에서 소유라멘을 먹고, 바스락 소리가 나는 낙엽 가득한 거리를 걷고, 며칠 전 개봉한 최신 영화를 재미있게 관람하고 집에 들어온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그 다음. 우시지마가 웬일로 집에 왔다는 일반 메시지를 보내지 않아 혹시 카톡으로 메시지를 보냈나 확인하려고 오늘 온종일 쓸 일이 없어 켜지 않았던 와이파이를 켠 순간이었다.

 

 "… 하하."

 

 히나타의 귓가를 때리는 어마어마한 횟수의 카톡 알림 소리. 팝업 창을 뒤로 하고 본 카톡 앱의 한 꼭짓점을 차분하게 차지하고 있는 조그마한 오렌지색 말풍선 속 두 자리 숫자. 아, 소문났구나. 우시지마상과 사귄다는 거. 히나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깜찍한 배지 속 숫자가 증명한 만큼 메시지는 스마트폰에 랙이 걸리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쌓여 있었고 심지어 가장 위의 채팅방의 미리보기부터 차차 읽어보니 히나타가 아는 한 우시지마와는 연이 없을 사람들-켄마라든가-까지 메시지를 보냈다. 하하, 나츠, 이 오빠처럼 연하에게는 고운 말 쓰면서 동갑이나 연상에게는 안 고운 말 쓰는 이중적인 어른이 되지 마렴. 개판이네.

 

 예의 상 먼저 확인한 카라스노 배구부 채팅방은 난리도 아니었다. 쿠로오상에게 잔소리를 듣는 켄마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제정신이냐 보게-뒤에 이어진 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는 읽기 생략, 참 카게야마 너답다. 히나타, 혹시 술 취했던 것은 아니지? 네, 스가상. 술 취했던 것 아니에요. 와인 한 글라스, 아니, 한 모금도 입에 안 댔어요. 이 사건의 원흉들에 대한 분노보다도 며칠 전 벌어졌던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에 대한 곤란함이 골을 울렸다. 문득, 히나타는 이 채팅방 안에 그 원흉들 중 하나가 있음이 생각났고, 다음 메시지들을 대충 훑듯 읽어나가며 그 원흉도 메시지를 보냈는지를 찾았다.

 

 ((국대를 애인으로 두게 됐네 꼬맹이))

 

 보냈네. 히나타는 메시지를 읽자마자 이를 빠득 갈았다. 그 날 바로 전화를 걸어서 분노를 표현했어야 했는데. 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해 봤자 소용없었을 것인 일을 히나타는 후회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 170 중반이 된 키에 대해 진짜 작은 거인다워진 것 같다며 만족감을 표했었던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지금보다 한 10cm만 더 컸더라도 츠키시마를 포함한 동참자들의 뒷목을 넥 슬라이스로 칠 수 있었을 텐데-주모자인 텐도상은 윗사람이라 차마 치지는 못했을 것 같고. 아, 햐쿠자와는 200cm가 넘으니 좀 더 컸더라도. 히나타는 이제 자신 안에 있는 폭력성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타나카상, 아무래도 저는 해탈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기분으로 다른 채팅방들의 메시지들까지 읽으면 스마트폰을 가지고 서비스를 넣어버릴 것 같아 히나타는 얌전히 카라스노 배구부 채팅방의 알림을 끈 다음 새 메시지가 있는 다른 채팅방들의 알림도 껐다. 끈 알림들을 다시 켠 다음의 일이 두렵기는 했지만 이미 한 번 겪은 일이니 괜찮을 것이라고 히나타는 스스로를 달랬다. 설마 일반 메시지나 전화까지 동원하겠어. 그 와중에도 히나타는 저도 모르게 우시지마가 카톡으로도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는 것에 살짝 입을 내밀고 있었다. 먼저 메시지를 보내 볼까, 히나타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러니까 진짜 연인…

 

 ((미안하다. 버스를 잘못 타는 바람에 방금 집에 도착했다.))

 

 타이밍이 나빴네. 히나타는 얼굴을 찡그렸다가 자신의 이상한 생각을 했음을 깨닫고 일반 메시지로 온 우시지마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려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왜 타이밍이 나빴다고 생각했지. 꼭 스트레이트를 치려는데 없었던 블로커가 나타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우시지마의 메시지가 왔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알맞은 토스가 올라온 기분. 히나타는 평소 같지 않게 깊이 생각하다가, 복잡하게 따지지 말자는 생각으로 우시지마에게 괜찮다고, 버스 잘못 타셨다는 것 아셨을 때 놀라지 않으셨었냐고 답장을 보냈다. 우시지마의 빠른 답장이 기분을 좀 더 나아지게 만들었다.

 

 ((좀, 놀랐다.))

 (그러게 잘 보고 타셨어야죠.)

 ((그래야 했다.))

 

 '그래야 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 아니지 않아요, 우시지마상? 10일 동안 우시지마와 주고받은 메시지들을 떠올리며 히나타는 츳코미를 걸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보게, 그러니까 만자이의 보케 비슷하게 불리던 자신이 만자이의 츳코미가 될 줄은 몰랐다고 생각하며 몇 번 츳코미를 걸어 본 적은 있었지만 돌아오는 물음표 하나 뿐인 답장에 이마를 짚기만 했었다. 그런 고로 히나타는 우시지마에게 자신들이 사귄다는 이야기가 퍼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로 했다. 우시지마상은 그런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인식하지 못하실 테니까. 히나타는 내일 마저 문자하자며 먼저 대화를 마쳤다.

 

 

 21일.

 

 사귄지 22일째 되는 날은 연인들 사이에 반드시 기념해야 하는 기념일 중 하나라고 텐도가 그랬다고, 우시지마는 저녁에 히나타를 일반 메시지로 불러내 역으로 향했다. 웬일인지 강의를 질질 끌기로 유명했던 교수님이 강의를 일찍 끝내주어 느긋하게 우시지마상과 데이트를 할까, 생각했던 히나타는 우시지마의 왼손 못지않은 오른손의 힘에 끌려 예정에 없었던 기차를 타야 했다. 데이트를 할 생각은 있었는데요, 이런 식으로 할 생각은 아니었거든요. 툴툴거리는 히나타를 마시멜로 하나를 먹고 얌전히 있으면 또 마시멜로를 주겠다는 말을 들은 한 아이처럼 얌전하게 만든 것은 우시지마가 예매한 도쿄 디즈니랜드 티켓이었다.

 

 그래, 11월 22일을 좋은 부부의 날이라고 한다잖아. 그런 의미가 있으니 챙겨야 마땅하겠지. 22의 의미 중 하나를 떠올린 히나타는 더 얌전하게 있으면서 피곤한 눈을 붙이고 있기로 했다. 꿈속으로 빠져든 히나타는 자신이 '부부'라는 이미지를 연상했다는 것에 놀랄 수가 없었다. 우시지마와 정식으로 사귀는 것이 아니라고 사귄지 10일째 되던 날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내온 이들에게 해명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지를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는 히나타였다. 우시지마의 잘못이 아니니 우시지마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을 뿐. 어느 새 깊이 잠에 빠져들어 고롱고롱 숨소리를 내는 히나타를 우시지마는 조용히 그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 멀지 않은 거리다만."

 

 우시지마는 작게 속삭이듯이 중얼거리며, 오른팔을 뻗어 살짝, 히나타의 부스스한 곱슬머리를 손으로 쓸었다. 자신의 직모와는 대비되는 형상. 터널을 지나가는지 바깥에 확 어둠이 드리운 순간은 우시지마가 불편하지 않은 목을 움직이기에 짧지 않은 순간이었다. 멀지 않은 거리, 정말 가까운 거리. 반짝. 투박한 손길의 느낌에 깬 것인지 위로 살짝 굴려진 히나타의 다갈색 눈동자가 아래로 굴려져 있었던 우시지마의 녹갈색 눈동자와 마주쳤고 히나타의 붉어지는 얼굴이 우시지마의 망막에 선명하게 맺혔다. 우시지마가 한 것인지도 모르고 자신이 잠결에 우시지마에게 기댔다고 생각한 히나타는 화들짝 놀라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아니다. 불편해 보여서 내가 기대게 한 거다."

 "… 아."

 

 우시지마의 말은 너무 담담했다. 그 담담함은 히나타의 뽀얀 얼굴을 붉게 만들었고 우시지마는 그 얼굴을 눈으로 보며 곧 도착할 것 같은데 이제 일어나도 되지 않겠냐고 물었다. 히나타는 괜히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고, 우시지마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 후 계속, 히나타는 이번 역은 마이하마역이라는 안내 방송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나아가고 승강장에 발을 디디기까지 우시지마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거리나 TV에서 미녀들을 봤을 때도 심장이 이렇게 뛰지는 않았는데. 쿵쾅거리는 소리가 어디서 나는 것인지 뻔히 알면서 히나타는 소리의 원인을 부정했다. 점점 옅어지는 얼굴의 부끄러움의 붉은빛이 사랑의 분홍빛으로 변해갔다.

 

 두 사람을 재워준 숙소는 디즈니 리조트 오피셜 호텔은 아닌 굉장히 작고 소박한 여관이었다. 한 방에서 두 장의 요를 깔고 각자 따로 이불을 덮으며 자는 동안에도 히나타의 심장과 얼굴은 원 상태로 돌아올 줄을 몰랐다. 우시지마는 히나타와 진짜 연애를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기간이 정해진 계약 연애. 그런데 이렇게 두근거려도 되는 것일까, 지금 자신과 우시지마가 하고 있는 것이 정말 연애가 아닌지에 대한 의심이 히나타의 마음 속에서 물이 끓어서 나오는 증기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22일.

 

 투투데이였다. 결국 밤잠을 설치고 만 히나타와는 달리 우시지마는 푹 잠을 잔 듯 왼팔 대신 오른팔을 하늘로 쭉 뻗으며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그런 우시지마가 얄미워 히나타는 콱 우시지마의 오른쪽 어깨를 밀고 싶었지만-왼쪽 어깨는 부상당한 왼쪽 팔과 붙어 있으니까- 덩치 차이를 생각하면 수업 시간에 들어본 적 있는 듯 없는 듯 가물가물한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자신이 도리어 밀려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무엇보다 여관에서 제공한 가정 냄새 물씬 나는 아침밥을 먹고 디즈니랜드에 도착해 즐거움에 겨워 얄미움이고 뭐고 죄다 날아간 것이 결정적이었다. 멀리서도 보이는 신데렐라의 성은 대학생인 히나타도 춤추게 했다.

 

 “우시지마상! 저거 타러 가요, 저거!”
 “알았다.”

 

 도쿄 디즈니랜드의 메인 스트리트 U·S·A라고 할 수 있는 월드 바자, 그 곳의 유리 지붕 아래 빅토리안 양식의 미국풍 거리를 지나면서 히나타의 댄스는 더 격렬해졌고, 첫 라이드로 파이레츠 오브 더 캐리비안을 탄 다음부터 우시지마는 온갖 라이드를 전부 타 볼 기세로 뛰어다니는 히나타에게 끌려다니기 바빴다. 빅 썬더 마운틴, 헌티드 맨션, 스플래쉬 마운틴, 스페이스 마운틴…. 대학생 정도 되면 허세를 부려서라도 파이렛 쉽 같은 스릴 넘치는 놀이기구를 선호할 법도 한데 히나타는 그냥 다크라이드를 재미있게 즐겼다. 우시지마가 재미있냐고 물으면 재미있다고,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모습이 우시지마를 따라서 웃게 했다. 히나타처럼 해맑지는 않지만, 가식적이지 않은 티 없는 웃음.

 

 “빨리요, 우시지마상! 빨리요!”
 “아직 늦지 않았다, 히나타 쇼요.”

 

 드림 라이츠와 원스 어폰 어 타임이 시작되기 전 히나타는 완전히 작은 거인을 만나기 훨씬 전으로 되돌아갔다. 개구쟁이처럼 나무의 위아래를 왔다 갔다 하던 시절. 그러나 히나타가 어린아이로 되돌아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디즈니랜드는 동심을 위한 공간이니까. 또 드림 라이츠와 원스 어폰 어 타임은 디즈니 하면 떠오르는 아름다운 예술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 디즈니랜드의 대표적인 행사였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입에서 감탄사를 내뱉을 수 있을 만하다는 뜻이다. 아이가 부모를 보채듯 히나타는 우시지마를 보챘고 우시지마는 히나타의 괴물 같은 체력에 감탄하며-본인도 그것에 결코 뒤처지지 않는 체력의 소유자지만- 드림 라이츠 경로의 가장자리 중의 가장자리에 재빠르게 자리 잡은 히나타의 옆에 섰다.

 

 그러나 원스 어폰 어 타임 때는 히나타에게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퍼레이드 차량들을 오밀조밀 장식한 전구들의 반짝임이 히나타의 망막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새겨주고 완전히 사라진 후, 원스 어폰 어 타임까지 시간이 남아 있어 조금 더 돌아다니고 오자고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원스 어폰 어 타임은 디즈니의 여러 이야기들을 한 번에 감상할 수 있게 해 주는 시간이었다. 그 귀중한 시간을 도쿄 디즈니랜드에 오는 그 누가 놓치려 하랴. 시계를 본 히나타가 12시가 되어 마법이 풀리기 전 무도회에서 빠져나가는 신데렐라처럼 달려갔지만 신데렐라의 성 앞에는 꽃 찾은 벌떼마냥 사람들이 이미 모여 있었다. 보아하니 좋은 자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미 뺏겨 버린 것 같았다.

 

 “으아아아악!”
 “진정해라, 히나타 쇼요.”
 “하지만….”

 “저 정도 크기면 멀리에서도 보일 거다.”

 

 히나타에게 보쿠토가 씌였던 것인지, 히나타는 머리를 감싸쥐며 오버했다가, 급속히 풀이 죽어 다운되었다. 반대로 우시지마에게는 아카아시가 씌인 모양이었다. 스크린이 될 신데렐라 성이 저렇게 큰데 영상이 작을 리가 없다는 논리였다. 단순하셔서 좋겠네요, 우시지마상은. 히나타가 아는 사람들 중 독심술사가 있고 그가 지금 옆에 있다면 네가 생각할 것이 아닌데, 핀잔을 주기 딱 좋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미 쇼는 시작되려 하고 있었고 히나타는 우시지마의 옆에 서서 까치발을 하고 고개를 바짝 들었다. 우시지마는 그냥 고개를 살짝 드는 정도면 되었다. 진짜 170 중반을 넘겼어야 했어. 열흘 넘게 묵어 있었던 원망이 스물스물 올라오려 하고 있었다.

 

 “우오오오오-! 멋지다!!”

 

 남을 보고 단순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연 히나타가 할 생각이 못 되었다. 우시지마의 말대로 신데렐라 성의 크기만큼이나 영상 규모도 컸고 히나타는 올라온 원망을 과거의 자신에게 불만으로 터뜨리는 것을 잊고 금세 쇼에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각양각색의 매력을 지닌 여러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화려한 빛과 소리로 그려지며 시청각적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뿜어내는 모습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히나타는 한 번 감탄사를 질러준 후 한참 쇼를 바라보다가, 우시지마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볼 생각으로 옆에 있는 우시지마를 잠깐 바라보았다. 그러자 쇼가 아닌 히나타에게 시선을 줄곧 고정시키고 있었던 우시지마의 얼굴이 눈에 확 들어왔다.

 

 “왜 그러지? 쇼가 재미없나?”
 “아, 아닌데요!”

 

 어제도 그렇고 왜 이렇게 몸이 말을 안 듣지. 운동선수의 심장은 다른 사람들보다 2~3배는 느리게 뛰어야 한다는데. 딱히 찬바람이 분다던가 머리에서 열이 난다던가 하는 것도 아닌데. 갑작스러운 몸의 변화로 삑사리가 나올까봐 히나타는 재빠르게 목소리를 죽였다. 우시지마는 그렇다면 그렇게 보고 싶었던 쇼가 아닌 왜 자신을 보냐고, 대답을 할 수 없게 만드는 톤으로 물어왔고 히나타는 눈도 쉬어 줘야 하지 않겠냐며 말도 안 되는 답을 내놓았다. 그것을 납득하는 우시지마가 얄미워져 히나타는 바로 시선을 돌렸다. 나츠마츠리의 것보다 훨씬 시끄러운 불꽃이 투투데이 이벤트의 마지막을 알렸다.

 

 

 40일.

 

 포키와 프릿츠의 날, 통칭 포키 데이였다. 사귄지 며칠이 지나든 챙길 수 있는 기념일 중 하나. 강의가 없는 시간에 히나타는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상점가를 기웃거리며 진열대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막대과자들의 종류를 세었다-종류가 없는 프릿츠는 제외. 오리지널, 마일드, 극세, 딸기, 블루베리, 녹차, 카페라테…. 저 외국의 빼빼로라는 과자는 종류가 더 다양하다던데. 히나타는 1년 전 포키 데이에 츠키시마가 여자 동기에게 포키가 아닌 빼빼로를 받았다고 야마구치가 메시지를 보낸 것을 떠올렸다.

 

 그 때 히나타는 나도 빼빼로든 포키든 받아보고 싶다고 징징거렸는데, 하필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야마구치가 아닌 츠키시마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풉, 비웃는 모양새의 이모티콘과 함께 답장을 받았었다. 다시 태어나라. 히나타는 그 메시지를 삭제한다는 선택지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내년 밸런타인데이에 보자고 히라가나를 마구 갈겼고, 초콜릿을 받기는 받았는데 본명초코가 아닌 의리초코였다. 그러니까, 친구들끼리 의리로 주고받는 초콜릿. 그 날 츠키시마가 여자 동기들에게 초콜릿을 잔뜩 받았다는 야마구치의 메시지에 히나타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래, 네 친구 잘났다. 의리초코를 와작 씹으면서 험한 생각을 했을 뿐.

 

 “… 우시지마상….”

 

 문득, 히나타는 우시지마에 생각이 미쳤다. 며칠 전부터 히나타는, 이런저런 핑계들을 대며 우시지마와의 연락과 만남을 대폭 줄여왔다. 우시지마가 무슨 잘못을 한 것은 아니고, 투투데이 후 히나타에게 변화가 찾아온 탓이었다. 히나타가 우시지마를 생각하거나 만날 때면, 히나타의 심장과 얼굴은 각각 터질 듯이 뛰고, 빨개졌다. 그것은 배구부 활동 때 히나타가 공에 집중을 못해 얼굴로 리시브를 하게 될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에 히나타는 우시지마에 대한 생각을 안 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결론을 내렸고, 아웃 오브 마인드, 아웃 오브 사이트라는 생각으로 우시지마를 멀리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카게야마보다 낫기는 하지만 츠키시마나 야마구치, 야치에 비하면 형편없는 영어를, 그것도 영어 숙어를 떠올린 것이 무색하게, 히나타의 머릿속에는 계속 우시지마가 맴돌았다. 아무 잘못 없는 상대를 박대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었는지는 몰라도, 진짜 연애가 아닌 계약 연애임을 상기해도 연애는 연애라 그런지 소용없었다. 결국 히나타는 진열대에 있는 오리지널 포키에 손을 가져다 댔고, 더해서 우시지마에게 어울릴 것 같은 보라색 포장지와 초록색 리본까지 사 어렸을 적 나츠에게 줄 선물을 손수 포장하던 솜씨로 평범한 포키를 제법 멋들어진 선물 상자로 변신시켰다. 그리고 우시지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우시지마상, 오늘 포키 데이잖아요?)

 ((그렇군.))

 (오랜만에 만나시지 않으실래요?)
 ((좋다.))

 

 우시지마상 포키 데이를 아시는구나. 히나타는 우시지마의 주변인들 중 투투데이를 가르쳐 준 텐도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짝 감탄했다. 만날 시간과 장소는 오후 6시, 스타벅스.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로 걸어가면서 히나타는 그 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처음 우시지마상과 같이 갔을 때 우시지마상은 카페 아메리카노를, 나는 카라멜 마키아토를 시켰지. 한 번은 우시지마상이 카페 아메리카노가 어려우면 카페 라테를 마셔보는 것이 어떠냐고 하셔서 마셨다가 결국 시럽과 드리즐을 잔뜩 얹었고. 화악.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지자 히나타는 어떤 건물 외벽에 한 번 꾸욱, 얼굴을 댔다 떼고 다시 걸었다. 아웃 오브 사이트는 버리는 걸로 하자.

 

 “일찍 오셨네요?”
 “오랜만에 만나는 것 아닌가.”

 

 스타벅스에는 우시지마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시간 맞췄다지만 일반인보다 조금 빠른 히나타의 걸음걸이는 히나타를 6시보다 조금 더 빠른 시각에 오게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 아닌가. 히나타는 뜨끔한 마음을 뒤로 하고 선물 상자를 건넸다. 선물이에요. 우시지마가 받아들고 고맙다고 미소를 짓자 히나타는 다시금 아웃 오브 사이트는 버리자고 결심했다. 얼굴이 빨개지는 속도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 때, 우시지마가 자기도 선물이 있다고 상점 봉투를 건넸고, 히나타는 그 봉투 안에 모든 맛의 포키와 빼빼로 하나가 담겨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히나타의 입이 쩍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무슨 맛을 좋아할지 몰라 다 사 봤다. 빼빼로라는 과자도 있더군.”

 “…….”

 “비용은 텐도가 알려줬던 대로 걷힌 돈을 썼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

 

 그게 포인트가 아니에요, 우시지마상. 히나타는 자신의 입이 왜 벌어졌는지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한동안 봉투 안의 막대과자들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렇게 나를 위해주는 사람을 나는 그 동안 밀어냈던 거구나. 히나타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것이 정말 계약 연애가 맞는 것일까. 혹시 우시지마상은. 그러나 히나타는 곧 입을 닫고 고개를 저었다. 우시지마상 정도 스펙이면 여자들이 좋다고 달려들 텐데. 히나타는 스타벅스에 왔으니 커피를 마시자며 카페 아메리카노냐고 우시지마에게 물었고 주문대로 갔다. 카페 아메리카노 1잔, 바닐라 시럽 1펌프 넣은 카페 라테 1잔이요.

 

 50일.

 

 “벌써 반절이나 지났잖아?”

 

 이른 토요일 아침, 히나타는 스마트폰 속 플래너를 톡톡 치며 우시지마와 약속했던 100일까지 반절밖에 안 남았음을 실감했다. 앞으로 반절이 더 지나면 우시지마와 자신은 계약 연애를 끝내게 되는 것이었다. 히나타는 10일 때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내온 사람들에게 진짜 연애가 아니라 계약 연애라고, 100일 동안만 하기로 한 것이라고 해명했던 때를 떠올렸다. 니시노야와 타나카가 어쨌든 연애는 연애 아니냐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에 스가와라가 시끄럽다고 한 마디 보냈던 것은 덤. 그런 때도 있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구나. 히나타는 습관대로 우시지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만나실 거에요?)

 ((시라토리자와 올드보이 모임이 있어서 안 될 것 같다.))

 (알겠어요.)

 ((미안하다. 내일이라도 만나도록 하지.))

 

 그러실 것까지는 없는데. 히나타는 괜찮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스마트폰을 껐다. 생각해 보면, 우시지마상은 매 주 일요일, 반드시 해야 하는 재활 치료를 제외하면 내가 만나자고 했을 때 거절한 적이 없으셨어. 내가 한동안 우시지마상이 만나자고 했을 때 거절한 적은 있었어도. 우시지마상이 일이 있어서 나를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야. 하지만 고작 오늘 하루 뿐인데, 앞으로 더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늘 하루 뿐’인데, 허전하고 외로운 느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히나타는 어딘가 나갈 곳이 없는 몸을 데굴데굴 굴렸다.

 

 “… 우시지마상도 내가 일이 있어서 만나지 못한다고 하셨을 때 이러셨을까?”

 

 포키 데이를 기점으로, 히나타는 우시지마의 마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계약 연애 해 보지 않겠냐고 묻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을까? 우시지마가 평소 말하는데 필터링을 거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면 상대가 어떻게 반응하든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시지마는 상대의 반응에 그렇게 민감한 사람이 아니기도 했다. 히나타가 아는 한이기는 하지만, 히나타보다 더 우시지마에 대해 잘 알을 고시키의 우시지마에 대한 평가를 떠올리면 히나타가 아는 한 = 우시지마의 평소 모습이라는 공식이 성립하지 않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고시키가 어떤 녀석인지는 일단 빼고.

 

 한편으로는 히나타 본인의 마음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지금 자신은 우시지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연애 한 번 해 본 적 없는 히나타였지만 자신에게 새로이 생긴 우시지마에 대한 조건 반사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반응이라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최근 야마구치와 야치가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식에 자신과 우시지마가 계약 연애를 시작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카라스노 배구부 채팅방이 폭발했을 때, 어쩌다가 둘이 사귀게 되었냐고 묻는 타나카와 니시노야의 메시지에 야마구치와 야치는 사전에 짜기라도 한 듯 심장이 뛰고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 시작이었다고 대답했었다. 히나타가 최근 겪고 있는 반응을 통해 사랑을 깨달았다는 것.

 

 "… 모르겠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졌고 우시지마의 마음이나 자신의 마음이나 알 길이 없었다. 단지 심장이 뛰고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 사랑을 깨닫는 조건이라면 자신은 배구와 천 번은 연애했다. 아, 지금도 연애하고 있다. 물론 히나타는 배구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배구는 사람이 아니었다. 배구를 하다 사람과 연애를 해 보지 못 하고 죽을 수는 있어도 배구와 연애하다 죽을 수는 없다 이 뜻이었다. 그 말이 그 말이잖아 보게! 카게야마는 그렇게 말하겠지만 히나타는 카게야마보다는 아주 조금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이었다. 이렇게 인간적인 문제에 어려움을 겪을 때 답은 하나. 경험자에게 물어보는 것. 10일 만에 얻어낸 결론에 히나타는 스마트폰을 켰다.

 

 (야마구치, 사랑이 뭘까?)

 ((사랑?))

 (심장 뛰는 거와 얼굴 빨개지는 거 빼고.)

 

 야마구치와 야치는 여전히 알콩달콩 연애 중이었다. 카톡 상태 메시지가 매일 「오늘 n일」이라고 바뀌는 것-히나타와 우시지마도 그렇게 하고 있지만-은 기본, 배경 사진을 아마도 데이트 장소일 곳에서 둘이서 찍은 사진으로 해 놓는 것과 프로필을 붙이면 하나가 되는 사진으로 해 놓는 것은 옵션이었다. 야마구치는 주말에 뜬끔없이 날아온 히나타의 메시지에 꽤 당황했는지 바로 명확하게 답을 주지 못했다. 그것 외에는 모르겠다는 답이 오지는 않겠지 설마. 야마구치도 모르면 누구에게 물어봐야 해. 히나타는 조금 초조해져서 손가락으로 액정을 톡톡 두드렸다. 링동. 히나타의 우려가 씻겨나가는 답장이 도착했다.

 

 ((음, 상대가 내 삶에 스며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스며들어?)

 ((정말 깊게 스며들어서 그 사람이 없는 삶이 상상이 안 간다든가....))

 ((나, 히토카 없는 삶은 상상이 안 가거든.))

 

 우시지마상이 없는 삶이라. 깨알 같은 여자친구 자랑을 무시하고 히나타는 우시지마가 없는 삶에 대해 상상했다. 매일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우시지마에게는 꼭 시간을 내서라도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다. 우시지마가 어떤 상태인지 앎에도 불구하고 0.1초라도 좋으니 조금 더 빨리 답장이 오기를 바라게 되었지만 정작 자신은 우시지마의 메시지에 어떻게 답장을 보낼지 몰라 몇십 초는 가뿐하게 낭비했고 고민 끝에 보낸 답장도 마음에 들지 않아 괜히 스마트폰에 당연히 메시지 수정 기능이 없는 것을 원망했다. 평일에 모든 강의를 듣고 나오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우시지마에게 하루의 일상을 늘어놓지 않으면 입이 근질거렸다. 일요일에 우시지마가 재활 치료를 잘 받고 있는 것을 확인해야 안심이 되었다.

 

 “어?”

 

 히나타는 스마트폰을 툭 떨어뜨렸다. 정말, 우시지마상이 안 계시면 어떻게 되는 거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단지 계약 연애 전으로 돌아가는 것 뿐인데 왜 이렇게 상상이 안 되지? 떨어진 것은 스마트폰만이 아닌 것 같았다. 야마구치가 아직 메시지를 다 보내지 않았던 것인지 링동- 알림음이 심장 소리처럼 계속 울렸다. 얼굴에 올라오기 시작한 열은 우시지마에 대한 조건 반사와는 다른 종류의 열인 것 같았다. 야마구치, 그거 하나로도 충분히 답이 된 것 같아. 더 보내지 않아도 돼.

 

 83일.

 

 크리스마스이브였다, 히나타에게는 도쿄에서 처음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이브로,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히나타는 조금 설레는 가슴을 안고 일찍 눈을 떴다. 창문에는 성에가 끼어 있었고 성에를 쓱쓱 문질러 없애니 며칠 전부터 내리기 시작해 쌓인 눈이 녹지 않고 땅을 새하얗게 덮고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도쿄는 눈이 적게 오는 편인가. 수업 시간에 잠을 안 자 본 적이 없어 도호쿠 지방이 일본에서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 중 하나라는 것을 모르는 히나타는 창틀을 톡톡 건드렸다. 그 때, 따라라란- 전화가 울렸고, 히나타는 발신인을 확인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좋은 아침이다, 쇼요.”

 “좋은 아침이에요, 와카토시!”

 

 발신인은 わかとし. 히나타 쇼요의 연인 우시지마 와카토시였다. 히나타의 스마트폰 속에 저장되어 있었던 うしじま わかとし가 わかとし로 바뀐 것은 한 달 좀 안 된 일로, 평소처럼 함께 저녁을 먹던 중 무려 히나타가 연인끼리는 이름을 부르는 것 아니냐고 우시지마에게 물은 것이 시작이었다. 그 때까지는 우시지마가 대부분 먼저 히나타에게 큰 무언가를 해 주었는데, 포키 데이에 이어서 새로운 예외가 생긴 것이었다. 우시지마는 꽤 놀랐던 듯 하야시라이스를 뜨던 손을 멈추었고, 어디서인가-히나타 생각에는 60% 이상의 확률로 텐도- 그런다고 들은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쇼요, 우시지마가 먼저 운을 뗐고 히나타도 와카토시상, 운을 뗐다가 곧 와카토시, 새로 운을 뗐다. 그 후 서로 이름을 잘 불러왔다.

 

 “오늘 아버님 뵐 거에요?”
 “아직 계획은 없다만….”

 “오늘 내일 아니면 언제 뵙겠어요!”

 “… 역시 그러겠지.”

 

 며칠 전 우시지마가 해외에 있는 아버지와 오랜만에 연락했으며 조만간 시간을 내서 만나겠다고 말한 것을 기억해낸 히나타는, 우시지마가 아버지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하기로 했다. 크리스마스이브 및 크리스마스 당일 모두 연인들이 챙길 수 있는 기념일이었지만, 히나타가 설렌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라 도쿄에서 처음 맞이한다는 것 때문이었으니 상관 없었다. 우시지마는 생각해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히나타의 아버님과 좋은 시간 보내시라는 말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히나타는 통화 종료 시 잠깐 뜨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곧 시작 화면으로 전환되는 스마트폰 액정을 보고 스마트폰을 껐다.

 

 “아쉽지만 그래도 가족이 우선이겠지.”

 

 조금의 아쉬움을 히나타는 아침 식사 후 산책을 하는 것으로 달래기로 했다. 카라스노 배구부원들과 약속을 잡아볼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미야기에 있는 부원들-사와무라, 아즈마네, 니시노야, 키노시타, 나리타, 타나카-과 만나는 것은 무리일 것이고 도쿄에 있는 부원들-스가와라, 시미즈, 엔노시타, 카게야마, 츠키시마, 야마구치, 야치-도 다들 바쁠 것 같아 기각했다. 식사 후 주황색 코트와 며칠 전 우시지마가 사 준 까만 목도리로 무장을 하고 현관문을 여니 차가운 바람이 히나타의 얼굴을 스쳤고, 상점가에 나아가니 상점마다 리스가 달려 있고 앞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두고 있었다. 지금 쯤 와카토시도 집의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아버님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나.


 “쇼요?”

 “엑?”

 

 잠깐, 왜 와카토시 목소리가 여기에서 들리는 거지. 히나타는 낯설래야 낯설 수 없는 목소리에 선물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고 자신의 옆을 지나가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한 명은 와카토시고, 다른 한 사람은. 우시지마가 빠르게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아버지다. 헉. 히나타는 빠르게 허리를 숙였고 우시지마의 아버지는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와카토시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히나타는 다시 허리를 세우고 한겨울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그러셨냐는 말 대신 어디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행동 고개 끄덕이기를 사용했다. 우시지마가 많이 긴장한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부자연스러웠지만.

 

 “같이 점심이라도 먹을까요?”
 “네, 네?! 아, 그, 가족들 사이에 제가 끼어도 되는지요?!”
 “괜찮아요, 괜찮아.”

 

 이거 수락하는 것이 예의인가 거절하는 것이 예의인가. 히나타는 자신이 오늘 우시지마가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게 먼저 양보했던 것을 생각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만약 우시지마가 히나타에게 아침에 했던 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같이 먹으면 좋겠다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히나타는 남아일언중천금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단호하게 거절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새 히나타는 우시지마 부자 옆에 있었고 두 사람과 함께 쇼핑 센터에서 흘러나오는 캐럴을 들으며 선물을 산 뒤 레스토랑에서 포크 커틀릿을 썰었다. 우시지마의 아버지가 우시지마의 어렸을 적 이야기를 하면 우시지마가 아무 말 없이 다른 곳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 히나타에게 꽤 쏠쏠한 재미를 안겨주었다.

 

 우시지마 부자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무색해진 히나타의 양보가 더 무색해지게 저녁 식사 후까지였다. 일이 있어 일찍 출국해야 한다는 아버지에게 우시지마는 공항까지 배웅해 드리겠다고 말했지만 우시지마의 아버지는 괜찮다고, 재빨리 택시를 잡아 떠났다. 멀어지는 택시 뒤로 손을 흔드는 우시지마의 모습이 히나타의 눈에 들어오자 결코 길지 않은 부자 상봉의 시간에 끼어들고 말았다는 무거운 감정이 히나타의 마음을 짓눌렀다. 이를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우시지마는 아버지는 너와 같이 있는 동안 진심으로 기뻐하셨다며, 히나타를 다독였다. 하지만요. 히나타가 말하려는 것을 우시지마가 가로막았다.

 

 “너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셨다.”

 “네?”

 “나중에 어머니도 같이 만나뵀으면 좋겠군.”

 “…….”

 

 아버님이 나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셨다고. 어머니도 같이 만나뵀으면 좋겠다고. 히나타는 우시지마의 눈동자 안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이 어떤지 바라보았다. 확연하게 드러나는 양 뺨의 빛깔. 그 빛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것이 한 달하고도 사흘이었다.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도 알았다. 하지만, 우시지마의 마음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와카토시. 이 정도면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아니, 물어봐도 되는 것일까. 당신의 마음은 어떤가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눈송이가 하나 둘 떨어져 눈앞을 드문드문 가렸다.

 84일.

 

 크리스마스였다. 히나타는 어제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그러나 동시에 복잡한 심정으로 일어났다. 결국에는 물어보지 못하고 목구멍 속으로 삼켜버렸어. 와카토시의 표정이 입김에 가려진 탓이야. 그러면 자신의 얼굴도 입김에 가려져야 맞다는 것을 간과하고 히나타는 입을 비죽였다. 나는 무엇 때문에 와카토시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일까. 계약 연애 중이기 때문에? 이제는 한 달하고도 나흘이 되었다. 계약 연애이기는 하지만 연애는 연애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것인지, 아니면 계약 연애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진짜 연애를 하고 싶기 때문인지. 히나타는 헷갈렸다.

 

 “… 와카토시에게 나는 스며들어 있을까?”

 

 히나타는 야마구치와 주고 받은 메시지의 스크롤을 올렸다. 상대가 내 삶에 스며들었다고 생각하는 것. 히나타의 삶에 우시지마는 확실하게 스며들었다. 그러면 우시지마의 삶에 자신은 스며들었는가. 한 달 사흘 동안 히나타는 우시지마에게 자신이 우시지마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을 나름대로 어필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름을 부르자고 제안한 것은 그 일환이었다. 그런데 우시지마는 그 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한 발 앞서 자신에게 무언가를 해 주려는 것을 유지할 뿐이었다. 사실 그것은 변화가 없어도 좋은 것이지만, 자신의 변화에 상대가 반응이 없어 보인다는 것은 조금 속상할 일이었다.

 

 ((쇼요))

 “!”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하더니. 히나타는 우시지마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어제는 둘만의 시간을 보내지 못했으니 저녁에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자는 내용이었다. 둘만의 시간. 히나타는 액정으로는 볼 수 없는 눈을 반짝이며 그러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도쿄에서 처음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도쿄에서 처음 하는 크리스마스 파티. 히나타는 언제 슬펐냐는 듯 싱글싱글 웃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와카토시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네. 1일에 서로 교환한 것 중 각자의 집 주소는 없었다. 데이트를 할 때 어느 한 쪽이 상대를 데리러 가는 일도 없었고, 데이트가 끝났을 때 어느 한 쪽이 상대를 데려다 주는 일도 없었다. 좋게 말해 최소의 사적의 영역을 지켜왔다고 할까.

 

 “다음에는 내가 와카토시를 초대해야 하나?”

 

 오늘 와카토시의 집에 내가 가고 나면, 다음에 와카토시가 우리 집에 오고 나면 좀 무언가 바뀌는 것이 생길까. 히나타는 시계가 약속 시각을 가리키려면 한참 멀었음을 알고 스마트폰을 빙빙 돌렸다. 스마트폰에 단 고리의 바보짱 인형도 따라서 돌았다. 어제 쇼핑 센터에서 우시지마와 커플 아이템으로 맞춘 것이었다. 색깔만 다른 똑같은 모양. 우시지마의 자신에 대한 사랑은 자신의 우시지마에 대한 사랑과 똑같을까. 다시 마음 속에서 떠오른, 살짝 부푼 것 같기도 줄어든 것 같기도 한 의문을 가진 채 히나타는 아침을 먹을 준비를 했다. 냉장고에 뭐가 있더라. 일단 계란 있고….

 

 “와카토시! 저 왔어요!”
 “어서 들어오도록.”

 “늦어서 죄송해요.”

 “괜찮다.”

 

 우시지마의 집은 히나타가 살고 있는 맨션과는 다른 준수한 단독 주택이었다. 히나타의 집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고 덕분에 히나타는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 오는 길에 어젯밤 내렸던 눈이 전부가 아니었는지 다시 눈이 내렸던지라 히나타의 머리카락은 눈이 쌓인 새집마냥 하얗게 된 채 삐져나왔고 코트에 가려진 어깨도 슈가 파우더를 뿌린 오렌지 케이크의 일부로 보일 정도였다. 우시지마는 문을 열어주며 히나타의 머리와 어깨의 눈을 털어주었고 히나타의 손에 들려 있는 주황색 포장지와 파란 리본 조합의 선물 상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선물은 어제 받지 않았던가. 히나타는 선물 상자의 눈을 털며 말했다.

 

 “직접 만든 머랭 쿠키에요. 인터넷에 간단히 만드는 법이 있어서….”

 “직접 만들었다니, 손은 다치지 않았나?”
 “다칠 일 없었어요.”

 

 직접 만들었다는 말에 우시지마는 히나타의 손을 잡았고, 히나타의 말에 상처가 없음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서 집 안에 들어가니 파티에 걸맞게 제법 많은 음식들이 식탁 위에 차려져 있었다. 일식을 차릴지 양식을 차릴지 고민했는데 케이크와 차를 마시려면 양식이 좋을 것 같아 양식으로 차렸다고, 입에 맞았으면 좋겠다고 평소같지 않게 우시지마는 살짝 쑥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저 무엇이든 잘 먹어요. 히나타는 씨익 웃었고 우시지마가 직접 요리한 음식들을 맛보았다. 이것이 자취 1년과 자취 3년의 차이인가. 히나타도 요리 실력이 나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우시지마의 요리 솜씨는 상당히 훌륭했다.

 

 “맛있나?”

 “맛있어요!”

 

 맛있는 음식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법이었다. 히나타는 다시 밝게 웃었고 우시지마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식사를 하면서 둘이 나누는 이야기 소재는 대부분 크리스마스나 겨울에 얽힌 이야기들로, 크리스마스이브에 자는 동생 몰래 선물을 넣어놓고 나올 때마다 항상 조마조마했다거나, 크리스마스 선물로 배구공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편지를 쓴 기억이 있다거나,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언제 알았다거나 하는 소소한 것이었다. 분위기를 낸다고 전등을 끄고 양초를 켜서 분위기도 훈훈했다. 여기에 히나타가 인터넷을 보고 만든 머랭 쿠키의 달달함이 더해지니, 둘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와카토시, 저건 뭐에요?”

 “겨우살이 모형인데, 선물로 받았다.”

 “아아….”

 

 그러다, 히나타의 시선을 벽에 걸려 있던 겨우살이 모형이 끌었고 우시지마도 모형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리스도 아니고 겨우살이 모형을 선물로 주는 거지. 히나타는 선물을 준 것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히나타의 눈앞은 우시지마의 얼굴로 가려졌고 눈동자는 우시지마의 눈동자와 똑바로 마주쳤다. 깜짝이야. 다시 화끈 달아오르는 얼굴에 히나타는 괜히 눈을 빨리 깜빡였다. 우시지마는 한참 히나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히나타의 옆으로 몸을 옮겼고 히나타는 물러나지 않고 계속 눈만 움직였다. 우시지마의 입술이 열린 것은 두 사람의 얼굴 사이의 거리가 몇 센티미터도 되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 겨우살이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는 키스를 해도 된다고 하더군.”

 “… 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걸까. 우시지마는 히나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더 가까이 했고 히나타는 우시지마와의 거리가 측정할 수 없게 된 순간 고장난 논리 회로를 복구해냈다. 두 사람은 눈을 감았고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던 촛불이 겨우살이가 걸린 벽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두 그림자는 완전히 붙어 있었고 바깥에는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하는 첫 키스는 설탕 맛이 난다고 말해도 될까. 처음으로 가진 한 쪽 집에서의 둘만의 시간은 굉장히 뜨뜻하고 보드라웠다.

 

 

 90일.

 오미소카였다. 사와무라의 생일이기도 해서, 히나타는 아침 일찍 카라스노 배구부 단체 채팅방에 들어가 사와무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예전에 1학년들이었던 배구부원들이 졸업해 모든 배구부원들이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스가와라의 생일에 올드보이 모임을 겸해 파티를 열었는데, 그 후 생긴 전통이었다. 등번호 순서에 맞춰서 메시지를 보내기. 즉 히나타가 보내는 메시지는 사와무라가 메시지를 보내지 않으므로 9번째 되겠다. 스가와라는 연말이면 다들 내려올 것 같은데 카라스노 식당에서 모이는 것 어떠냐고 제안했고, 타나카와 니시노야, 히나타는 그거 좋은 생각이라고 움직이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선배들은 몰라도 너는 표나 예매하고 이야기하지?))

 (츠키시마 너!!)

 (미리 예매해 뒀다고!)

 

 츠키시마의 메시지에 히나타는 인증 사진까지 찍어 보내며 자신을 무시하지 말라는 의사를 표했고, 다들 히나타가 웬일인가, 놀라며 메시지를 보냈다. 사실 우시지마가 자신은 어머니가 내려오는 것 어떻겠냐고 계속 물어오셔서 이번 연말에는 내려갈 것이라고 말하길래 함께 내려가자며 예매한 것으로, 히나타 본인의 생각으로 예매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예매한 것은 예매한 것이라 히나타는 허세를 부렸다. 그럼 다들 잊지 말고 내려오라는 스가와라의 메시지를 끝으로 채팅은 끝났고 히나타는 기차를 타러 갈 채비를 했다.

 

 연말이라 고향에 내려가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도쿄역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시지마와 히나타의 손에는 가족들에게 줄 연말 선물 상자가 들려 있었다. 우시지마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것-아버지 선물은 택배로 부쳤다고, 히나타는 부모님과 여동생 나츠의 것. 도호쿠 신칸센을 타는 승객들을 안내하는 방송이 둘을 승강장으로 이끌었다. 둘이 나란히 걸어가는 것은 일단 연인이니까, 붙은 자리에 앉는 것은 붙은 자리를 예매했으니까 자연스러웠지만, 히나타의 눈동자는 부자연스럽게 신칸센이 달리는 동안 창문에 잠깐잠깐 비춰지고 사라지는 풍경 한 번, 우시지마의 얼굴 한 번에 위아래로 굴렀다. 우시지마는 별 움직임이 없었다.

 

 ‘똑같아….’

 

 첫 키스까지 해 놓고 이렇게 변화가 없어도 되는 건가. 히나타는 눈을 감고 좌석에 몸을 맡겼다.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난 후, 눈을 맞으며 집에 돌아온 히나타는 말 그대로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갔었다. 현관에 들어서 습관적으로 눈을 털고, 코트와 목도리를 바닥에 두고 그대로 매트에 드러누워 집에 잘 들어갔냐는 우시지마의 메시지에 답장을 못 하고 멍하게 하늘을 가로막고 있는 천장을 보다 눈이 감겨버린 밤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연말 선물을 사러 가자고 만난 우시지마는 변한 것이 없었다. 계속 다정하면 뭐해, 변하지 않으면서. 불만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몸이 한쪽으로 쏠렸다.

 

 “쇼요, 일어나라.”

 “으음….”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새 센다이역이었다. 우시지마의 어깨에 히나타의 머리가 올라와 있었고 히나타는 정신을 추스르며 고개를 들었다. 고향 집 방향이 다른 둘은 기차역 앞에서 갈라져야 했다. 각자의 일정 등에 대해 이야기하다 나중에 연락하자는 말로 끝을 맺은 뒤 우시지마가 먼저 버스를 타고 역을 떠났고, 히나타도 뒤에 오는 버스를 탔다. 선물 상자 위로 히나타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집에 가면 나츠와 부모님이 있겠지, 코치님은 사카노시타 상점에 계실까, 선생님은 학교에 계실까, 미야기의 선배들은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을까, 도쿄의 부원들은 달라진 것이 없을까. 고향에 오니 여러 생각들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그래, 그 후 집에 도착해서 나츠와 부모님께 선물을 드리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카라스노 식당에 가면서 와카토시에게 전화를 걸고, 카라스노 배구부원들과 함께 밥을 먹고 술을 잔뜩 마셨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왜 그 후로 기억이 없는 것일까. 쿵- 소리가 나고 누가 얘 데려가야 하지 않냐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눈꺼풀이 무겁고 온 몸이 눌리는 느낌이 들자 히나타는 몸을 뒤척였다. 겨우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 보니 머리 밑부터 발끝까지 이불로 덮여 있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지. 띵- 머리가 울리면서 몸이 제멋대로 기울어지는데 누군가에게 받쳐졌다. 우시지마였다.

 

 "많이 마셨군, 쇼요."

 "와카토시이이~?“

 

 히나타는 우시지마의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확인했고, 혀가 꼬인 줄도 모르고 팔자에도 없던 애교를 부렸다. 히나타의 몸은 더욱 기울어졌고 우시지마는 히나타를 자리에 반듯하게 눕혔다. 어쩌다가 이렇게 마셨나. 카게야마 녀석과 붙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요. 우시지마가 뭐라고 말하는지는 들리는데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사와무라 다이치가 네 전화로 애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데 데려가 줄 수 있겠냐고 연락하더군. 잠금화면 뭐 설정 안 해 놓은 것이 다행인가. 지금 자신이 말하는 것인지 생각하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 아까 했던 말에 대한 답, 지금 이야기해도 되겠나.”

 

 뭘 이야기하시려는 건데요. 저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제정신일 때 이야기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것보다 제가 아까 했던 말이 뭔데요. 히나타는 이불을 밀어내고 술기운이 잔뜩 올라 빨개진 몸을 우시지마에게 비볐고 우시지마는 그런 히나타를 단호하게 도로 눕히고 이불을 올려주었다. 알딸딸한 기분에 정신이 흐릿해지는데 다시 무거운 물체가 덮쳐오자 히나타는 정신을 잃어버렸고 우시지마는 히나타 옆에 누웠다. 우시지마는 히나타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고 히나타는 그 속삭임을 끝까지 듣지 못한 채 잠에 빠져들었다.

 

 “쇼요, 난 네가….”

 

 91일.

 

 새해 첫날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몰려오는 숙취에 히나타는 구역질을 느꼈고 누군가 옆에 대야를 밀어주자 바로 그 안에 속을 비워냈다. 몰려오는 공허함이 히나타의 머릿속 공허를 없애주었다. 아, 어제 타나카상과 노얏상이 쭉쭉 들이키라고 말씀하셨지. 주장이 말렸지만 카게야마 녀석에게 질 수 없다는 생각에 멈출 수가 없었고. 그 다음에는 어지러워서 쓰러졌는데 얼마 안 지나 와카토시의 목소리가… 비로소 복구되는 기억에 히나타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미쳤지, 미쳤어. 본인의 주량이 끽해야 와인 한 병밖에 안 된다는 것을 잊은 자의 비참한 말로였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야.

 

 “깨어났나.”

 “와… 카토시?!”

 

 히나타는 다시 눈을 비비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자신의 집에 있는, 자신이 쓰던 방이었지만, 왜 우시지마가 여기 있는 것인가. 우시지마는 어제 내가 너를 데리고 네 집에 오니 네 부모님이 미안하다고 했고 하룻밤 머물러도 되냐고 묻자 허락해 주셨다고 아주 친절하게 이야기해주었다. 혹시 몰라 일찍 일어나서 대야를 가지고 올라왔다는 말은 덤. 쿠로오상도 아니고 그렇게 친절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히나타는 미칠 것 같았다. 다른 쓰러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술 주량 내기는 카게야마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고, 와카토시는 집에서 잘 쉬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자신이 술 마시다 쓰러졌다는 연락에 나왔을 것이며, 자신은 온갖 주사를 부렸을 것이다. 그냥 죽어야지.

 

 “… 어제도 말했지만.”

 “네?”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우시지마가 말을 이으려 할 때 밑에서 히나타의 부모님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히나타는 우시지마에게 내려가자며 내려왔다. 어머니는 아들의 숙취 해소를 위해 꿀차를 내놓으면서 술 많이 먹고 집에 들어오는 것도 안 좋은데 남에게 데려와지는 것은 얼마나 더 안 좋겠냐는 등의 잔소리를 했고 아버지와 우시지마가 어머니를 말렸다. 잔소리 하나하나 모두 맞는 말들이라 히나타는 꿀차가 담긴 컵에 입을 박고 침묵했다. 어머니 말씀 하나 틀린 것 없지요. 우시지마가 더 말할 것이 있음을 까먹는 히나타의 기억력은 아무래도 향상이 필요한 것이 분명했다.

 

 우시지마는 집에 있는 가족들과 오조니를 먹으러 가 봐야겠다며 히나타의 집에서 나왔다. 생각보다 히나타가 일찍 일어났던 것인지 시계를 보니 오전 8시였다. 히나타의 부모님은 어제 아들 데려오느라 진짜 고생했다고 계속 미안해했다. 그 모습과 정말 괜찮다고 우시지마가 말하는 모습에 히나타는 고개를 푹 숙였다. 부모님께도 망신, 와카토시에게도 망신. 나츠에게까지 망신이 아닌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나츠는 어제 히나타가 집에 들어왔을 때 방에 있어 오빠가 무슨 꼴이 되었는지 몰랐을 것이고 지금은 겨울방학이라고 늦잠을 자고 있었다. 우시지마가 인사하고 가는 모습을 보며 히나타는 손을 흔들었다.

 

 ((아사히상 생일 축하드려요))

 ((생일 축하드립니다))

 

 들어와서 나츠를 깨우고 오조니를 먹은 뒤 카톡을 보니 다들 아즈마네의 생일이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히나타도 아즈마네에게 9번째로 메시지를 보냈고-역시 아사히가 보내지 않으므로- 아즈마네는 어제 모임에서 밥과 술을 마셨는데 또 그러면 부담이지 않겠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런고로 오늘 모임은 아즈마네 가에서 다과회를 갖는 것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아사히상 다도 배우시고 계신댔지. 히나타를 포함해 대부분이 색다른 생각이라며 칭찬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끝은 그럼 오늘은 오후에 모이자는 사와무라의 메시지가 맺었다. 따라라란-

 

 “와카토시?”
 “아까 하려던 말, 계속 해야 할 것 같다.”

 “!”

 

 진짜 그냥 죽어야지. 히나타는 방에 올라가며 머리를 박을 곳을 찾았다. 우시지마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는데, 키스를 했는데 왜 변한 것이 없냐고 했지. 그 말을 들은 히나타의 머릿속에는 스가와라가 언제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히나타 너는 술이 들어가면 아주 솔직해진다고. 네가 남을 진심으로 미워할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진짜 힘들었을 것이라고. 스가상, 다른 점으로 힘드네요. 히나타는 지금 당장 온 몸을 벽에 박아 벽과 일체화된 부조 작품이 되어도 모자라다고 생각하며 우시지마의 말을 계속 들었다.

 

 “미안했다, 쇼요.”

 “…….”

 “하지만 나는 너와 있을 때 한 번도, 너에게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99일.

 

 “내일이면….”

 

 히나타는 플래너를 확인했다. 그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100일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 줄 몰랐다. 큰 사건들을 하나 하나 엮어본다면 역시 시작은 우시지마에게 계약 연애 해 보지 않겠냐는 말을 들은 것이오, 끝은 일주일 전 도쿄에 다시 올라오기 전에 우시지마의 어머니를 뵈었던 일이라고 하겠다. 아즈마네의 생일 다과회에서 다도를 배운 것이 다행이었다. 어설프기는 했지만 우시지마의 어머니가 내놓는 말차를 예의 있게 받아 마시는 정도는 되었고, 우시지마가 말해주기를 어머니도 히나타를 마음에 들어했다고 하니까.

 

 “내일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히나타는 마음을 확실하게 정했고, 이제는 우시지마의 마음도 알 것 같았다. 100%는 아니지만 90%는 알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내일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 계속 사귀어 줘도, 헤어져도 상관 없다고 했다. 답은 정해져 있지만, 문제 형식은 객관식이 아니고 주관식인데다 서답형이 아니라 서술형이었다.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우시지마는 자신에게 계약 연애 해 보지 않겠냐는 말 한 마디를 하려고 시라토리자와 배구부원들 전체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했다. 자신도 그만한 노력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해도, 왜인지 성에 찰 것 같지 않았다.

 

 “으으….”

 

 지금까지 평범하게 잘 대화했으면서 이제 와서 이렇게 있다니. 아악! 분풀이 대상은 스마트폰밖에 없었다. 양심은 있어 어딘가에 치지는 못하고 손에 꽉 쥐고 휘두르기만 했다. 술 마셨을 때 솔직해지는 녀석이 왜 서운한 것만 털어놓고 좋았던 것은 안 털어놓은 거야. 과거의 자신은 실질적인 분풀이 대상이 못 됐다. 아니, 애초에 좋았던 것을 털어놓는다고 사귀자는 뜻이냐는 물음을 듣는다는 보장이 있나. 그 물음을 듣는다고 그렇다고 말한다는 보장이 있나. 바보짱 인형이 애처롭게 허공에서 날아다녔다. 진짜 어떻게 이 마음을 전해야 하냐고. 이 간단하게 말할 수 없는 마음을.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못 배길 것 같은 마음을.

 

 “와카토시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가 없는데.”

 

 야마구치가 했던 조언은 히나타의 연애관에 아주 깊숙하게 뿌리를 내렸다. 아침마다 메시지와 전화로 주고 받는 소소한 이야기. 강의가 끝나고 대학교 교문 앞까지 가면 보이는 190cm에 육박하는 인영. 한 번 우시지마의 더 강한 고집에 꺾인 뒤 다시는 펴지지 않았던 자신의 우시지마의 재활 치료를 보고 싶다는 고집. 마이하마역행 기차에서 처음 생긴 사랑으로 인한 조건 반사. 앞으로 있을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를 생각하게 만든 포키 묶음. 때아닌 우시지마 부자와의 시간. 첫 키스로 마무리된 도쿄에서의 첫 크리스마스 파티. 서로의 속마음을 알게 된 연말과 연시. 와카토시는 나에게 이만큼이나 스며들어 있는데. 어떻게 이 마음을…

 

 “!”

 

 히나타는 다시 한 번, 답을 얻었다. 남의 도움으로 얻은 답이 아닌 자신 스스로 얻어낸 답. 스마트폰이 쥐어진 손에 전율이 오기 전 히나타는 잽싸게 양 손으로 스마트폰을 쥐었다. 그럼에도 손이 떨리는 것은 피할 수 없었지만 손가락은 제법 차분하게 자판 위를 움직였다. 와카토시, 저는 연애하는 동안 매 번 저에게 질문을 던져 왔어요. 지금처럼 제 스스로 답을 얻은 것도 있었고, 남들의 도움을 얻어 답을 얻은 것도 있었죠. 몇몇 질문은 답을 얻을 필요가 없었어요. 하지만 딱 하나, 답을 얻지 못했고 답을 얻을 필요가 있는 질문이 있어요. 사실 답을 얻을 필요 여부는 당장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아요.

 

 (와카토시)

 (저는 당신에게 스며들어 있나요?)

 

 100일.

 

 저녁이 되자 히나타는 외출복을 차려입고, 까만 목도리를 둘렀다. 도쿄 규테키에 저녁 7시 30분, 2명 예약을 해 두어 나가봐야 했다. 우시지마가 오늘 있는 재활 치료는 미리 미루었다고 했었다. 스마트폰 고리에 달린 바보짱이 망가지지 않게 조심스레 옷 주머니에 집어넣는 히나타의 손길이 부드럽지만 힘이 있었다. 아침은 규동, 점심은 포크 커틀릿이었고 중간에 카페 라테를 한 잔 했다.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하면 카운터 직원이 히나타 쇼요님 맞으시냐고 물어올 것이다. 히나타는 스마트폰 속 일반 메시지를 한 번 확인한 뒤 바깥으로 나아갔다. 텐도나 고시키가 보낸 메시지는 없었다.

 

 "일찍 와 있었군.“

 "……."

 

 히나타는 아침에 전화로 우시지마와 약속을 잡을 때 예약 시간보다 조금 늦게 잡았다. 우시지마가 자리에 앉자 웨이터가 왔고 히나타는 포모도로 두 그릇, 고르곤졸라 피자 한 판을 시켰다. 우시지마는 히나타의 그런 단독 행동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히나타의 얼굴에는 평소와 같은 밝음보다는 우시지마와 같은 무거움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우시지마가 히나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 하루는 온전히 히나타의 하루여야 했다. 웨이터가 글라스에 물을 따라주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침묵 속 유일한 소리였다.

 

 “와카토시.”

 “…….”

 “이제 답을 해 주세요.”

 

 글라스에 물이 다 채워지자 히나타는 스마트폰을 꺼내고 일반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어제 히나타가 보낸, 당신에게 스며들어 있냐는 질문. 직접 만나 말해줘도 되겠냐는 것이 답이었다. 지금 요동치고 있는 심장 소리가 우시지마의 것인지 히나타의 것인지 누가 알까. 우시지마도, 히나타도 겉으로는 전혀 떨림이 드러나지 않았다. 녹갈색 눈동자와 다갈색 눈동자는 오직 하나만을 기다린다는 듯 고요했다. 아니, 다갈색 눈동자의 고요함이 주변에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더 와닿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심장 소리가 더 크지는 않겠지만, 분명한 것은 히나타가 우시지마의 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스며들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네가 없는 삶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우시지마의 답에 고조에 달하던 심장 소리는 잠시 멈추었고 원래 조용했던 숨소리마저 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우시지마는 시라토리자와를 졸업한 뒤, 바로 취직해 본격적인 성인 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히나타 쇼요에 대해 떠올렸다. 척박한 토양만도 못한 콘크리트에서 훌륭한 열매를 맺은 히나타 쇼요. 처음에는 그것이 머지않아 같은 코트에서 만나게 될 라이벌, 예를 들면 오이카와와 같은 선수에 대해 갖는 기대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곧 우시지마는 자신이 배구 선수 히나타 쇼요가 아닌 히나타 쇼요 자체인 히나타 쇼요에 대해 떠올린다는 것을 깨달았고, 원인은 기대가 아닌 다른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쇼요, 이제는 네가 답을 해 줄 차례인 것 같군.”

 

 이번에는 녹갈색 기다림이 더욱 짙어졌다. 기다림이 끝난 얼굴이 풀어져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럴 때 눈물이 쏟아지면 진짜 우스꽝스럽겠지. 틈을 노리고 새어 나오려는 눈물을 히나타는 참아냈다. 그래, 애초에 상대를 좋아하기 때문에 계약 연애든 진짜 연애든 해 보려고 하는 것 아니야.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연애 해 보자는 말을 쉽게 못하지. 다행이야, 와카토시의 마음이 나와 같아서. 아니, 내 마음이 와카토시와 같아져서.

 

 “그거면 충분해요.”

 

 계속 사귀어요. 우시지마의 얼굴에 지금까지 히나타가 봤던 것보다 환한 미소가 지어졌고 히나타는 우시지마의 옆에 앉았다. 우시지마는 히나타를 오른팔로 끌어안았고 히나타도 우시지마를 끌어안았다. 가벼운 키스가 두 번 이어졌고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음을 확인했다. 서로 자신의 입술이 상대 입술에 스며들게 키스를 한 것은 식사가 끝난 후, 각자 귀가하기 전 다시 한 번 서로를 끌어안은 후였다. 와카토시, 혹시 그거 아시나요.

 

 오늘은 1월 10일이라는 것을,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하다는 것을요.

 

 

 

 후일담.

 

 “왜 그 때 계약 연애를 하자고 하신 거에요?”

 "네가 나를 좋아하게 되기를 바랐다.“

 

 어느 날, 히나타의 물음에 우시지마는 시라토리자와 배구부원들에게 처음 자신이 히나타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던 때부터를 이야기해주었다. 그 때 정확히는, 히나타에게 할 말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우시지마는 말했는데 텐도가 끼어들어 무슨 말이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우시지마는 솔직하게 히나타에게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고, 시라토리자와 배구부 채팅방을 폭발시켰다. 다행히 채팅방이 날아가는 일은 없었고 텐도가 폭발적으로 쏟아낸 메시지가 화면을 일시적으로 도배했을 뿐이었지만 다들 충격이 컸는지 텐도를 제외하면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이 없었다.

 

 ((계약 연애라고 있는데 어때?))

 (그게 뭔가?)

 ((요즘 유행하는 것인데))

 

 기간을 정하고 사귀었다가 기간이 끝나면 깔끔하게 헤어지는 방식이야. 그 기간 동안에 상대 마음을 확실히 잡아 놓으면 그대로 연애로 이어지는 거지. 텐도는 책임지고 우시지마의 연애를 이어 주겠다면서 다들 어서 돈을 입금하라고 자신의 계좌를 당당히 공개했고 설문지를 만들어서 '와카토시군과 카라스노 10번의 연애에 동의하십니까?', '입금하셨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 아니오를 고르게 하고 '얼마를 입금하셨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까지 쓰게 했다. 설문 조사 결과는 모두가 우시지마의 행복을 위하는 것인지 전원 예. 시라부조차 동의했으니 우시지마가 히나타에게 말하는 것을 방해할 사람은 없었다.

 

 “100일이면, 너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못 말리는 분에 못 말리는 분이네요.”

 “그런가.”

 

 이야기가 끝나자 히나타는 틈을 놓치지 않고 우시지마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예측 못하셨죠. 쇼요. 히나타는 능글맞게 웃어 보였고 이에 질세라 우시지마는 히나타를 붙잡고 딥 키스를 했다. 와카토시, 비겁하잖아요. 뭐가 비겁하다는 것인지 모르겠군. 옆의 한 식탁 위에는 두 개의 잔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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