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히나]
Be Slowly
W.테링 (@theregia_HQ)
자그마한 눈동자와 몇 번이고 마주쳤다. 사냥감을 끈적히 좇는 남자의 눈은 옆 테이블에 앉아 술잔을 홀짝거리며 곁눈질을 하고 있는 히나타 쇼요에게 꽂혔다. 그래, 너도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거지. 경력 차이가 확연히 나는 두 배우가 한 자리에 있는 건 모리야마 감독의 덕이다. 영화감독인 모리야마 감독은 그 시원하고 털털한 성격에 스태프들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그 사람의 영화에 보쿠토와 히나타는 조연 배우들로 발탁이 났고 뭐 때문인지 화합을 중요시하는 그는, 모든 스태프들에게 고기와 맥주를 배불리 먹이는 것을 좋아했다. 부담가지지 않아도 돼, 허허 웃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집에 돌아가겠다는 제 소신을 말하기 위해 슬며시 손을 든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모리야마 감독의 눈빛이란. 보쿠토 씨는 우리 감독님이랑 처음 일해보시죠? 감독님 회식 불참 엄청 신경 쓰세요. 다른 덴 다 괜찮은데 회식에 왜 저리 집착을 하시는지. 하긴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보쿠토는 음향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모리야마 총 감독은 회식을 좋아하고 나리시타 음향 감독은 하이볼을 좋아하고 저기 앉은 히나타 쇼요는 참 섹시하네요. 술잔을 꼭 쥔 채 꼼지락 거리는 손가락이 아주 잘 보인다. 저런 애랑 사귀면 감사합니다하고 절을 해야지, 등신처럼 차버리니. 대본 속의 쿠라모토는 저처럼 멋있는 남자가 되긴 그른 것 같았다. 그러니까, 모리야마 감독의 영화에서 보쿠토 코타로와 히나타 쇼요는 헤어진 연인 쿠라모토와 하라히 역을 맡게 됐다는 거다. 회의실에서 그 말간 얼굴을, ‘연애 경험이 적은데, 헤어진 연인의 연기를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보쿠토 선배님께서 지도해주세요.’라고 말하며 분홍색 꽃이 피던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보쿠토는 저 얼굴에 붉은색 꽃이 피어올라 끝내는 오물거리는 입에서 뭉쳐진 흥분이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야말겠다고 다짐했다. 아, 또다시 히나타의 눈이 보쿠토와 부딪혔다. 이제 슬슬 말을 건넬까 고민하는 보쿠토의 시야에서 히나타의 눈이 사라졌다. 오이카와 토오루. 어디 가서 외모 한 번 꿇린 적 없는 오이카와가 커다란 손으로 히나타의 눈을 가려버린 탓이다. 당황해 꼭 다무는 입술은 쿠로오가 들이민 새우튀김에 앙, 하고 열렸다. 보쿠토는 그 이름처럼 야생의 감이 남아있는 남자다. 제 친구인 오이카와와 쿠로오가 저와 같은, 혹은 저보다 더 깊은 눈을 가지고 히나타를 바라보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감이 있다는 얘기다. 보쿠토는 제 머리를 긁적였다. 오이카와와 쿠로오는 학창시절부터 꽤 머리를 잘 굴렸던 반면 보쿠토는 오직 본능이었다. 난 재들한테 머리로 못 이겨. 보쿠토는 제 팔을 한 번 들여다보았다. 전 애인들이 좋아라했던 멋진 남자 보쿠토 코타로의 몸. 머리로 안 되면 몸으로 승부해야지.
3차를 끝으로 스태프들은 하나 둘, 택시를 타거나 근처 사는 동료에게 업혀 집으로 돌아갔다. 정신 멀쩡한 소꿉친구 셋은 저들끼리 아직 할 얘기가 있다며 근처 호프집으로 들어가 생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웬만해서 술을 즐기지 않는 것까지 닮은 세 사람은 술이 고팠는지, 어떤 얘기를 하기 위해 술의 힘을 빌리려는지 한참을 술잔만 노려다 보았다. 어쩌다 마주친 셋의 얼굴이 붉었다. 웃음이 비죽비죽 나왔다.
“그런데 너 히나타 얼굴 빤히 쳐다보더라. 왜, 걔 얼굴에 뭐라도 묻었니?”
“아니, 걔 예뻐서.”
순간 오이카와의 손끝이 멈췄다. 쿠로오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히나타 누가 봐도 예쁘지. 그리고 우리 셋 다 히나타를 바라보는 눈빛이 끈적한 것도 알지. 어쩌면 우리 세 명 보다 더 많을 수도 있고. 승자는 누구일까.
“히나타 말이야, 평소에 네 애기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 성숙한 분위기가 멋지다면서.”
“켁, 우리 꼬맹이 사람 보는 눈 좀 길러야겠네. 요 부엉이가 어디가 성숙해. 성숙한 걸로 치면 오이카와씨 아냐?”
“어, 네가 우리 셋 중에 제일 어린애 같다.”
쿠로오의 말에 보쿠토는 낄낄 웃었다. 쿠로오와 오이카와는 입꼬리만 당겼다. 한 번 열린 쿠로오의 입에선 끊이지 않고 히나타의 이상형이 줄줄 나왔다. 걘 생긴 것도 귀여운데 좋아하는 음식은 또 간장계란밥이야. 동물도 되게 좋아하는데 정작 동물원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대. 갇혀있는 동물들이 안타깝다나, 히나타답지 않아? 오이카와와 보쿠토는 쿠로오의 입에서 나오는 정보들을 가만히 귀담아 듣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쿠로오는 몇 년 전 예능에서 히나타와 호흡을 맞춘 적이 있었지. 그 때부터 지금까지 연락을 했었구만.
“쿠로쨩, 우리한테 친절하게 꼬맹이의 이상형을 알려주는 이유가 뭐야?”
“왜, 꼬마가 자기 이상형이랑 잘되면 좋잖냐.”
“진심은?”
“우리 셋 다 같은 생각하고 있는 거 뻔히 알면서 뭘 물어.”
그렇지. 우리 셋 다 같은 눈으로 히나타를 바라보고 있지. 오이카와와 쿠로오가 술을 입안에 털어놓는 동안, 보쿠토는 여유롭게 술잔을 들었다.
대본 리딩이 끝난 제 3 회의실은 어수선했다. 모두 수고했고 다음 회의에 보자. 모리야마 감독의 말에 회의실의 긴장이 조금 녹았다. 배우들이 옆에 앉은 이들과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에 히나타는 대본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회의실의 의자가 하나둘 비는 틈에는 탁자에 머리를 처박았다. 뭐가 그리 신경 쓰이는지, 옆에 앉아 은근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보쿠토도 눈치를 못 챈 채였다. 이렇게 있다간 날이 새도 입맛만 다셔야할 것 같아,
“히나타?”
“으갹, 보, 보쿠토 선배님, 아직 안 가셨어요?”
네가 옆에 있는데 어떻게 가겠니. 다름이 아니라, 제 얼굴보다 큰 대본에 파묻히듯 열중하는 히나타가 재밌기도 하고, 귀여워서 엉덩이를 떼야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평소에는 순둥순둥, 둥그렇기만 했던 눈초리가 집중을 한다고 뾰족해지다가, 연기를 한다고 축 늘어지는 게 흥미로워서. 집중을 한다고 작게 중얼거리는 작은 입이, 연기를 한다고 크게 벌여지는 작은 입이 사랑스러워서. 끔찍이 아끼는 후배이자, 실력 좋은 뮤지션인 케이지에게 히나타 쇼요를 테마로 작곡을 의뢰해볼까. 아니다, 그럼 히나타를 그 녀석에게 보여야 하잖아. 경쟁자가 한 명 더 늘어나는 위험은 사양이다. 그럼 직접 글을 적어보는 건 어떨까. 원고지 몇 장이든, 히나타 쇼요로 가득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선배님?”
한참동안 말이 없는 보쿠토를 바라보는 눈빛이 둥글다. 그래, 우리 예쁜 쇼요가 뭐에 그리 신경을 쓰고 있었어?
“아까 모리야마 감독님이 지적하신 것 때문에 그래?”
대본 리딩 내내, 모리야마 감독은 히나타의 연기를 지적했다. 감정이 붕 뜨는 느낌이라나. 히나타는 제 연애 경험 부족을 잘 알고 있기에 입술만 깨무는 수밖에. 어릴 때부터 아역배우로 활동을 해 촬영장, 집을 반복하는 생활을 하다가 아주 가끔 어쩌다 학교에 출석하는 그런 쳇바퀴 같은 삶에 여자친구든, 남자친구든 존재할리 만무했다. 연애 경험이 없으니 이별 경험도 없다. 경험의 부재는 곧 연기에서 감정의 부족함으로 들어났다. 이별의 아픔이란 거, 머리론 이해가 잘되는데 막상 표현하려고 하면 잘 모르겠어요. 히나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가 나설 차례다. 보쿠토는 큼, 큼하고 목을 몇 번 다듬었다.
“그럼 히나타, 우리 사귈래?”
“네?”
“그 뭐냐, 계약 연애라고 하나? 뭐 그런 거. 촬영까지 시간이 좀 남았잖아? 그때 동안 우리 질릴 때까지 사랑하고 촬영이 가까워지는 날에 헤어지는 거야. 연기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생각해도 참 개소리다. 옆에 쿠로오라도 있었으면 배까지 까뒤집고 미친 듯이 웃었을 신박한 소리. 이건 좀 아닌가. 보쿠토는 입맛을 다셨다. 히나타가 당황하면 농담이었다고 어물쩡 넘어가면 되겠지. 이상한 선배라고 찍힐 걱정은 저 구석에 밀어놓는다.
“좋아요!”
보쿠토 코타로가 살면서 가장 많이 들어본 말은 단연코 ‘너 참 단순하다.’. 보쿠토는 제가 생각해도 단순한 사고회로를 가지고 있는데 히나타는 저만큼 혹은 더 단순한 사고를 추구하는 가보다. 사고 체계까지 비슷하다니 이정도면 운명 아냐?
“좋아, 자기야. 오늘 저녁에 우리 집으로 와. 자고 가도 돼.”
옛말에 쇠뿔도 단김에 뽑으랬다. 보쿠토의 집 주소를 받아들고 순수하게 반짝거리는 두 눈을 마주하자니 양심통이 일었으나 그보다 붉은 입술에 시선이 고인다. 성급하게 다가가면 놀라 도망쳐버릴 지도 모른다. 오늘은 천천히 얘기나 해봐야지.
초인종이 울린다. 집에 애인을 초대한 게 한, 두 번이 아닌 보쿠토는 여유로운 모양새로 문을 열었다가 얼어붙었다. 자고가기로 해서 옷을 이렇게 많이 가져왔나, 싶었다가도 히나타의 자그마한 손에 한가득 들린, 마트 로고가 커다랗게 박힌 봉투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저 무거워 보이는 걸 들고 왔어? 보쿠토의 시선이 봉투에서 떼어지지 않자 히나타가 방싯 웃었다.
“제 역할, 하라히 취미가 요리더라고요. 그렇다면 분명 애인한테 요리 해줬을 거라 생각해서 오는 길에 마트 들렸어요! 저도 요리는 자신 있거든요. 보쿠토 선배님 파스타 좋아하세요? 편히 쉬고 계시면 제가 맛있게 해드릴게요!”
“보쿠토 선배? 예쁜아, 우리 사귀는 거 잊었어?”
얼떨결에 부엌까지 당도한 히나타와 함께 봉투에서 식재료를 꺼내던 보쿠토가 히나타의 손끝을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자그마한 손에서 올라오는 온기가 좋다.
“참, 그랬죠! 뭐라고 불러드려야 좋을까요?”
“코타로.”
“엑, 선배님의 이름을 그렇게 막 불러도 돼요?”
“괜찮아, 어서 불러봐.”
“코타로.”
“이걸로 하자, 최고네. 쇼요, 자기야. 난 말 잘 듣는 애인인데 편하게 있으라는 말을 듣기 싫네. 같이 하자.”
히나타는 저처럼 음식을 빠르고 많이 먹는 편이었다. 팬과 보울에 가득 찬 파스타와 샐러드를 보고 남은 음식은 냉장 보관을 해야 하나, 고민을 했었다. 결과적으로 그 수많은 음식은 두 사람의 뱃속으로 사라졌으니까 참 쓸 데 없는 고민이었다. 자그마한 게 햄스터처럼 볼을 빵빵히 부풀리며 먹는 게 신기해서 가만 쳐다보니 시선을 눈치 챈 히나타가 민망한 듯 물을 들이켰다.
“그, 제가 밥을, 아침밥을 안 먹어서요. 선배님, 코타로 집에 온다고 생각하니까, 아니! 그! 다이어트 해서요! 네,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사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아서 파스타를 입에 우겨 넣었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함께 만든 음식을 그 위에 올려다 두고, 보쿠토의 두 눈을 마주볼 수 없을 것 같아서. 코타로 선배님은 집안에서 편한 옷차림으로 계셔도 그, 뭐라고 해야 하나. 섹시함이 뚝뚝 떨어진다. 검은 니트가 저렇게 야한 옷이었나. 아니, 니트 보다 그 안에 있는 보쿠토의 근육이 굉장해서 미칠 것 같다. 단단하고 듬직해 보이는 팔근육이라든지. 여하튼, 시선을 어디 둬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다 코타로가 너무 야해서 그래요. 식탁을 내려다보니 제몫의 파스타는 이미 반이나 사라진 후였다. 보쿠토의 건 그대로.
“체하겠다, 천천히 먹어.”
보쿠토의 손이, 단단한 손이 볼에 닿았다. 묻었다. 작게 중얼거리듯 흘려버리며 볼에 묻은 토마토 소스를 닦아주고는 보란 듯 제 입가로 가져가 핥는 그 모습에 숨이 멎어버렸다. 이러다가 얼굴이 터지는 거 아닐까. 얼굴이 심장이라도 되는 양 잔뜩 뜨거워져서 맥박이 울린다. 얼굴이 벌개진 히나타가 포크를 다시 집어들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 보쿠토는 히나타의 접시를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든 말든, 히나타의 맹렬한 시선은 보쿠토에게 꽂혀있다. 그렇게 쳐다보면 부끄러운데. 마음속으로 실실 웃으며 포크를 들어 파스타를 돌돌 말았다. 우리 히나타 얼굴이 파스타보다 더 빨갛네.
“자, 아-.”
입이 자그맣게 열리다가 곧 파스타를 먹는다. 파스타를 오물오물 씹는 멍한 표정.
“히끅, 끅.”
“괜찮아?”
심장이 너무 떨려 죽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되는 순간 딸꾹질이 시작 되었다. 히나타의 딸꾹질에 놀란 보쿠토가 옆으로 다가와 진정하라고 등을 쓸어주는데 그 손길이 너무 끈적거리는 것 같아서, 딸꾹질이 그치기커녕 더 거세게 끅끅거린다. 한참이 지나서 딸꾹질은 멎었으나 얼굴은 새빨개진 채다. 푹 숙인 고개에 귀가 빨갛다. 옆에 앉은 보쿠토의 시선을 피하나 손은 꼭 잡았다. 거봐, 쇼요도 나한테 관심이 있다니까? 역시 내 감은 최고야.
“설거지는 내가 할게. 쇼요는 앉아있을래?”
“저도 도울게요!”
“안 돼. 내가 애인한테 설거지 시키는 사람으로 보여? 요리도 쇼요가 거의 다했잖아. 설거지하겠다면 1분마다 뽀뽀할거야.”
뽀뽀할거야, 이 한 마디에 또 딸꾹질하는 거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얼굴이 빨개진 히나타는 얌전히 의자에 앉아 설거지를 시작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아까도 생각했지만, 코타로 근육 굉장하구나. 설거지를 한다고 움직이는 등근육이, 검은 니트를 입어서 더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 같아서. 한 번 안아보면 안되나? 사귀는 사인데. 침이 꼴깍 넘어간다. 따악 한 번만 안아보고 싶어. 보쿠토는 등 뒤에 닿는 따끈한 온기에 그만 손을 멈춰버렸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선명한 오렌지색일 머리카락이 등 뒤로 부드럽게 닿는다.
“쇼요?”
“이렇, 이렇게 있는 건 괜찮죠, 코타로?”
“괜찮고말고요, 쇼요.”
닿아있는 따뜻한 체온이 사랑스럽다. 자신의 등과 맞닿은 히나타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여실히 느껴진다. 이런 게 행복인가. 지금 히나타는 보쿠토에게 행복 그 자체다. 코타로는 이런 향수를 쓰는 구나. 히나타는 보쿠토의 너른 등에 좀 더 얼굴을 묻는다. 시원하고 코타로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향수 냄새. 가슴이 두근두근 거려. 근육도 되게 단단하고. 따뜻하고. 뭔가 잠이 솔솔 오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하지, 코타로가 너무 좋아.
보쿠토는 샤워를 마치고 따끈한 김을 뿜으며 나오는 히나타를 불렀다.
“머리 닦아줄게.”
씨익 웃는 모습에 히나타도 덩달아 웃음을 터뜨리곤 보쿠토의 벌어진 다이 사이로 앉았다. 보쿠토는 히나타의 목덜미에 얹힌 아주 조금 축축한 타월을 잡아들어 히나타의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아내었다. 혹시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니까. 제 머리를 닦아내듯이 벅벅 닦아내었단 어디가 부서질 것 같았다. 조심스레 물기를 털어내는 동안 히나타는 얌전히 제 무릎을 모아 앉아 있었다. 어느 정도 물기를 닦아내자 머리카락이 보송보송해졌다. 머리카락이 평소처럼 몽실몽실 해 질만큼 열심히 닦았으니 이제 감기 걸릴 위험은 줄어든 셈이다. 조금 욕심 부려도 되겠지. 보쿠토는 오른손은 계속 히나타의 머리 위에 두며 왼손은 슬쩍 목덜미 아래로 내렸다. 힉, 히나타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히나타는 몸을 살짝 돌려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쇼요, 자기야. 여기로 올라올래?”
보쿠토의 손길에 끌려 앉혀진 곳은 보쿠토의 무릎 위였다. 항상 반짝이던 황금빛 눈. 히나타는 그 위로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보쿠토가 눈을 감는다. 히나타도 보쿠토를 따라 눈을 감았다. 입술이 부딪히다가 떼어졌다가, 다시 부딪힌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말랑말랑해. 숨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 히나타도 보쿠토의 목을 손으로 훑었다. 맞닿기만 했던 입술 사이로 뜨거운 게 들어온다. 기분이 이상하다. 질척거리고, 뜨겁고, 야하다. 온몸이 간지럽다. 떨어진 입술 사이로 달큰한 숨이 새어나온다. 히나타는 제가 어느새 소파에 누워 있는지 모른다. 시선이 얽힌다. 보쿠토는 히나타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 금색 시선에 매일수록 히나타의 얼굴은 점점 붉어진다. 보쿠토는 잔뜩 붉어진 히나타의 볼에 제 손을 얹어본다. 보쿠토의 시선은 뜨거운데 손은 차갑다.
“침대로 갈까.”
온 몸을 관통하는 듯 낮은 목소리에 히나타는 그만 고개를 끄덕인다. 침대에 가는 시간조차 목이 마르다. 보쿠토는 성급하게 히나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춘다.
“내가 없어도 네가 날 기억할 수 있게 네 몸에 날 새겨줄게. 쇼요, 네가 좋아하는 곳을 알려줘.”
입술이 닿는 곳마다 뜨겁다. 이러다 데이는 거 아냐? 실없는 생각을 하며 보쿠토는 히나타의 살결을 입에 머금었다.
“어서 말해줘, 쇼요. 어디가 좋아?”
히나타는 멍한 표정으로 머리를 탈탈 털었다. 두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아 침대로 몸을 던졌다.
“어, 어젯밤에 그러니까, 으아아!”
어디로든 숨고 싶었다. 팔을 버둥거리자 잡히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결국 보쿠토의 집에 있는 동안 그렇고 그런 짓만 잔뜩 해버렸다. 부끄러워서 어떻게 살지. 두근거리는 심장을 따라 눈꺼풀도 꾸벅꾸벅 잠긴다. 그러고 보니 잠도 못 잤네. 뒤늦게 깨달은 피곤이 몰려온다. 자면 심장도 진정할 거야. 눈을 질끈 감았다. 쇼요. 눈이 번쩍 뜨인다. 어젯밤 내내, 자신을 부르던 달큰한 목소리가 생각난다. 목덜미에 닿았던 뜨거운 숨결까지도. 코타로가 보고싶다. 히나타는 제 감정에 솔직하다. 보쿠토가 다시 한 번 저를 안아줬으면 좋겠다. 아니, 그냥 보쿠토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밤 11시. 보쿠토가 잘 시간은 아니다. 사귀는 사이니까 전화 정도야 괜찮겠지. 보고싶어요, 이 한 마디만 하면 되었다. 그럼 보쿠토는 웃어줄 거고, 그리고… 모르겠다. 히나타의 오른손은 전화를 건지 오래다.
[응, 자기야.]
목소리만 들어도 그 밤이 생각 나 얼굴이 뜨거워진다.
“코타로.”
[응, 쇼요.]
“보고싶어요, 코타로랑 같이 있고 싶어요.”
전화기 너머의 보쿠토가 낮게 웃는다.
[어떻게 해줄까?]
“우, 우리집에 오실래요?”
[주소 보내줘. 바로 갈게, 사랑해.]
사랑해, 라는 그 단어가, 아니. 보쿠토의 목소리가 너무 뜨거워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두 귀가 후끈하다. 이불에 얼굴을 묻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부끄러워, 몰라. 그냥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아. 거울을 흘긋 바라보자 쨍한 머리카락보다도 더 붉은 얼굴. 얼굴뿐만 아니라 온 몸이 더워져서 창문을 살짝 열었다. 시원한 밤공기가 들어왔다.
얼굴을 식히고 지저분한 집안 꼴이 보여 서둘러 하나 둘 치웠다. 이불까지 얌전히 개어놓자 초인중이 울렸다. 뭐라 인사하면 좋을까. 어서오세요? 날씨가 춥죠? 퍙범하게 어서오세요가 나을 것 같았다. 문을 열고 건네려던 히나타의 인사는 목구멍너머로 삼켜졌다. 보쿠토가 곧장 히나타의 입술을 덮쳐온 탓이다. 뜨겁고, 달콤하다. 언젠가 여행에서 먹었던 초콜릿 퐁듀. 그런 맛이 나. 보쿠토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제 목도리를 풀어버리자 히나타도 보쿠토를 도와 코트를 벗겼다. 닿아오는 보쿠토의 입술을 살짝 깨물며 그의 등근육을 손으로 쓸어내리자 보쿠토가 낮게 웃는다.
“이런 거 하고 싶었어?”
턱 선에 입맞춤이 내려앉는다.
“응, 하고 싶었어요. 자꾸, 자꾸 생각이 나서 잠도 못자고-”
뒷말을 알겠다는 듯 보쿠토가 입을 다시 맞춰온다. 보쿠토의 손이 허리를 쓸어온다. 키스로 붉어진 입술을 손으로 쓸어본다. 귓가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입맞춤이 간지럽다. 온 몸이 달아오르면 창문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가 몸을 식힌다. 그래서 더 몸을 달싹거려, 온 몸을 보쿠토에게 맡긴다.
“쇼요, 우리 사귀자. 장난으로 사귀는 거 말고. 정말, 온 진심을 다해서. 네가 좋아 미치겠어. 네 생각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
히나타가 보쿠토의 손을 꼭 잡고는, 그 끝에 자신의 입술을 부딪는다.
“코타로가, 내 옆에 없어도 코타로 생각밖에 안나요. 근데 그게 좋아요. 매일매일 코타로 생각만 하게 해줘요.”
오이카와와 쿠로오는 보쿠토로부터 이미지가 첨부된 메일을 받았다. 새로 뚫은 야키니쿠 집이 끝내주게 맛있다는 내용이라 지레짐작하고 메일을 연 두 사람은 얼어붙어 한동안 같은 자세로 있었다. 내 애인. 짧은 텍스트와 함께 폭신해 보이는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은 보쿠토의 사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