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케히나]
라이벌
W.말로 (@mallo_HQ)
마지막엔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그때만큼 공이, 블로킹이, 코트가, 그리 선명하게 보였던 적이 없었다. 몸의 모든 감각이 날카롭게 살아나 배구공 하나만 쫓는 듯한 쾌감, 그 느낌을 오랫동안 기억했다. 카라스노 10번에게는 늘 이렇게 보였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축복받은 눈이라 생각했다. 그와 시라토리자와의 경기를 관람하러 간 적이 있었다. 길고 긴 시합과 랠리에서도 끝까지 지치지 않았던 작은 거인을 동경한 소년은, 마지막 순간 날개를 달고 뛰어올라 다른 까마귀들과 자연스럽게 섞였다. 거기에 맞춰준 세터도 대단했지만, 블로킹과 수비를 피해 스파이크를 정확히 넣는 히나타의 모습은 예전에 티비에서 봤던 작은 거인을 쏙 빼닮아 있었다.
도대체 어딜 봐서 내가 널 이겼다는 거야, 히나타.
와쿠난과 카라스노 경기 이후 히나타가 작은 거인과의 대결에서 자기가 졌다고 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히나타를 쭉 지켜본 타케루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본기는 자신이 우위임을 인정했다. 히나타는 아직 리시브가 서툴렀고, 서브도 공격적이지 못했으며, 이끄는 쪽보다는 이끌림을 받는 쪽이었으니까. 하지만 성장하는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세터가 올려주는 공을 그 해 처음 받았다고 들었는데, 저 세터가 천재이기도 했지만 히나타는 고작 일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그 어떤 세터가 공을 올려주어도 잘 칠 수 있을 만큼 공중전에 더욱 능숙해졌다.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이 공을 만졌고, 넘어졌고, 굴렀고, 뛰었을까.
춘고에서의 경기 역시 모두 챙겨봤었다. 졸업 이후로도 습관처럼 히나타의 경기만은 전부 보게 됐다. 타케루는 배구가 좋았고, 그렇기에 배구 외의 다른 길은 걷고 싶지 않았다. 그런 타케루를 가족들은 고맙게도 전적으로 응원해줬다. 하지만 타케루가 아무리 공중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더라도 뛰어난 배구선수들은 너무 많았다. 타케루는 아무리 연습해도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힘이나, 텐도 사토리의 센스나, 히나타 쇼요의 눈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구가 좋았기에, 결국 선택한 길은 미야기 현 안에서 체육교육과를 전공하여 배구 코치가 되는 길이었다.
평생 배구를 하고 싶었다. 또한, 배구가 얼마나 매력적인 스포츠인지 더 알리고 싶었다.
어쩌면 타케루는 평생 배구공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운명일지도 몰랐다. 정글 같은 가족들, 무료한 공부, 그 틈에서 타케루의 삶에 있어 유일한 동경이자 열정은 바로 작은 거인의 배구였다. 작은 거인이 나오는 경기는 몇십 번, 몇백 번 찾아봤다. 그렇게 누가 가르쳐주기도 전에 페인트를, 블로킹 아웃을, 코스 배분을 눈으로 익혔고 가족에게 시간이 나면 토스를 올려달라고 부탁하며 연습했다. 대학팀에서 배구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속해 있던 팀이 강호는 아니었다. 약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무난한 팀. 그래도 타케루는 배구를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그런 타케루의 배구에 히나타는, 물론 본인은 몰랐겠지만, 꽤 큰 영향을 미쳐왔다.
히나타도 이제 졸업반이구나.
미야기 현에 남아 가장 좋은 점을 꼽으라면 단연코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히나타의 경기를 가까이서 챙겨볼 수 있었다는 것 또한 커다란 장점이었다. 이번엔 또 어떤 신기한 기술을 배워왔을까. 매번 성장하고 새로워지는 히나타는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벌써 직업병이 됐었는지, 타케루는 히나타를 봤을 때마다 어느 부분을 수정할지, 또 어느 부분을 더 잘 살릴 수 있을지 고민하곤 하여, 가끔 우카이 코치의 가게를 지나갈 때마다 주제넘은 조언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졸업식이라도 가야 할까, 졸업 이후의 진로는 뭐로 정했을까. 역시 배구겠지? 히나타는 모르겠지만 타케루는 길다면 긴 2년 동안 히나타를 지켜보며 혼자 내적 친밀감을 꾸준히 쌓아 올리고 있었다.
타케루는 가끔 생각했다. 과연 내가 히나타의 배구에 홀린 걸까, 히나타라는 존재에 홀린 걸까. 넌 나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같은 팀에 설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히나타와 함께라면 어떤 공격을 할지 생각했고, 히나타를 만난다면 어떤 조언을 해줄지 고민했다. 쓸데없는 두뇌 낭비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히나타는 나카시마의 머릿속에서 뜬금없이 한 번씩 튀어나왔다. 그래서 타케루는 히나타가 더 크고 넓은 곳에서 배구를 하기를 바랐지만, 동시에 미야기 현에 남기를 바랐다. 멀리서라도 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지만 히나타가 역시 카게야마와 함께 그리도 꿈꾸던 국가 대표 유스팀에 들어갔다는 것을, 월간 배구 잡지를 통해 알게 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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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입니까?"
"네, 나카시마상. 우린 당신을 스카우트하고 싶어요."
"저 말고도 훌륭한 선수는 많을 텐데요."
"음- 실은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지만, 히나타 선수 아시죠? 히나타군이 나카시마상을 추천했어요. 자기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작은 거인과 가까웠다며, 언젠가 코트 위에서 다시 만나기를 바라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카시마상의 경기를 여러 번 챙겨본 결과, 충분히 스카우트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야간 대학으로라도 학업을 마치시고 싶으시다면 저희가 전액 지원하겠습니다."
여기서 네 이름을 들을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였다. 프로팀에서의 스카우트 제의라니. 앞서 밝혔듯이 강호가 아닌 대학, 그것도 도쿄도 아닌 미야기 현의 대학이라 관심조차 많이 받지 못했었는데. 심지어 스카우트를 제의하는 팀은 널리 알려진 강호였다. 프로팀 중에서도 강호인, 자신이 간다면 지금처럼 에이스가 아니라 후보선수가 될지도 모르는. 하지만 강한 배구에 대한 열망은 타케루 마음 한편에 항상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히나타가 추천했다고 하니, 기대에 부응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타케루는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너와 난, 결국 코트에서 다시 만날 운명이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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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나타도 한 번씩 나카시마 타케루를 생각했었다는 것을, 어쩌면 나카시마는 이번 기회에 알아차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타케루는 스카우트된 이후 너무 바빴다. 가족들에게 스카우트 사실을 알렸고, 짐을 쌌고, 이사를 했고, 야간 대학에 입학했고. 배구 선수로서의 수명은 몇 년이 될지 알 수 없었기에, 타케루는 이미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 걱정은 아마 가족을 어느 정도 책임져야 한다는 그의 듬직한 성품도 한몫했을 것이다.
"히나타군, 나카시마군이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였어요."
"다행이네요!! 그럼, 나중에 친선 경기에서 만날 수 있는 건가요?"
눈을 과하게 반짝이며 신이 나 하는 모습에 헤드헌터는 이 사람이 그 코트 위의 작은 거인이 맞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할 정도였다.
"그럼요. 저쪽 팀과 잘 조율해보세요."
"와앗-! 카게야마, 오늘부터 특훈이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만 뛰어다녀라, 보게-!!"
그리고 히나타의 말대로, 둘은 예전 와쿠난전을 기억하며 공중전에서 1:1로 붙을 히나타와 나케시마를 위해 특훈을 시작했다. 히나타는 예전보다 눈을 훨씬 많이 활용하게 됐는데, 그 말인즉 공을 치기 전에 손 모양, 현재 코트 위 상황, 분위기 등을 파악하여 코스 배분을 예측하는 성공률이 예전보다 많이 상승했음을 뜻했다. 하지만 히나타가 한 번씩 챙겨본 나카시마 팀의 경기에서의 타케루는 코스를 읽기 가장 어려운 선수 중 하나였다. 오랜 시간 동안 단련한, 깔끔한 폼. 가끔 예전 아오바죠사이의 쿄타니처럼 예측할 수 없는 공격을 할 때도 있었고, 팀원의 리시브가 흔들리더라도 넓은 범위를 자랑하며 안정적으로 찍어 내리는 모습은 단연 에이스라고 불릴 만했다. 존경스러워. 히나타가 나카시마의 경기 비디오를 볼 때마다 중얼거리던 말에, 카게야마는 너도 이제 저 정도는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히나타는 동의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붙고 싶어.
그동안 카라스노에서 다양한 종류의 스파이커들과 경기를 해봤다. 키가 컸던 사람, 파워가 강력했던 사람, 자신처럼 눈이 잘 보였던 사람, 예측할 수 없었던 사람, 폼이 좋아 공중전에서 유리했던 사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작은 거인과 가장 가까웠던, 그리고 어쩌면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역시 타케루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꼭 한번 겨뤄보고 싶었다. 그때는 당신이 나보다 우위였지만, 이번엔 나도 많이 변했음을 보여주겠어. 승부욕에 불타올라 카게야마랑 과열된 상태로 연습하다, 결국은 코치에게 둘 다 오버 워크라고 혼난 후에야 하루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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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친선 경기가 바로 오늘이다. 국가대표팀이라도 다른 나라의 국가대표와 연습을 잡기는 어렵기에 종종 프로팀과 친선 경기를 하는데, 오늘이 마침 타케루가 있는 팀과 겨루는 날이다. 드디어. 히나타는 모든 경기, 모든 점수, 모든 공에 항상 최선을 다하지만, 오늘따라 더더욱 결의를 다짐한다.
한 번쯤 말이라도 섞고 싶었는데, 둘 다 웜업에 바빠 말조차 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경기는 시작한다. 나카시마상은 저기에서도 주장이구나. 히나타는 경기 전에 화장실에 가는 버릇을 고쳤나 보네.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도, 호루라기가 불자 모든 잡념을 잊고 모든 시선을 공과 코트 위에 집중한다. 나카시마의 팀의 서브. 처음부터 점프 플로터를 내보내지만, 익숙하게 오버로 잡아내는 리베로 덕분에 공은 카게야마에게 깔끔하게 돌아간다. 공이 돌아가는 걸 보자마자 가장 블로킹이 적은 곳을 찾아, 도움닫기를 하며 날아오르는 히나타는 고등학교 때보다 더 높이 뛰고, 더 빠르며, 더 놀랍다. 하지만 네가 그럴 거라고는 이미 생각했어. 히나타가 움직이지 마자 같이 움직인 타케루를 봤지만, 카게야마는 공을 여전히 히나타에게 올린다. 이건 어쩌면 나카시마에게 카게야마와 히나타가 던지는 도전장이나 다름없다.
공이 온다. 그리고, 멈춘다. 블로킹하려 히나타와 마찬가지로 뛰어오른 타케루에게는 그 공이 예전보다도 공중에 더 오래 머무르는 것이 똑똑히 보인다. 히나타의 손 모양은 일단 페인트는 아니기에, 전날 회의했던 것처럼 일단 스트레이트를 좁히는 블로킹. 히나타는 이 유도하는 블로킹이 유독 싫다. 크로스에는 예상했던 것처럼 이미 리시브를 할 준비가 끝나 있다. 블로킹 아웃을 노리기엔 킬 블로킹을 당할 확률이 너무 높아 보이고, 페인트도 잡힐 것 같고. 이럴 땐 어쩔 수 없다.
공이 손을 치는 것이 느껴짐과 동시에 블로킹을 맞춘 공을 상대편이 능숙하게 받아 올린다. 리바운드. 절묘하게 맞췄다. 조금만 잘못 맞췄다면 땅으로 곤두박이쳤을 텐데. 통칭 초속공이였는데, 그 짧은 시간 안에 모든 판단을 끝내다니. 소름이 돋을 틈도 없이 공은 세터에게, 그리고 이번엔 반대편으로 뛰어간 히나타에게 공이 다시 재빠르게 날아간다. 단 1초라도 늦으면 널 따라잡을 수 없어. 히나타에게는 항상 블로킹을 한 명 붙여서 코스를 좁히기로 했지만, 그 계획을 비웃듯 블로킹을 피해 아예 초 이너 스파이크를 쳐버린다. 아직도 공의 위력이 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유연함과 탄력성이 없으면 칠 수 없는 코스다. 결국, 처음부터 서브권을 뺏기고 만다.
그다음에는 반대로 타케루가 스파이크를 치러 뛰었고, 히나타는 2단 블로킹을 하려 뛰었다. 예전보다 블로킹 폼도 많이 좋아졌지만, 나카시마는 히나타의 영향이라도 받았는지 오늘따라 눈이 잘 보인다. 수천, 수만, 어쩌면 수십만 번도 넘게 연습했던 각도. 치는 각도에 따라 블로킹 아웃을 노릴 수 있다는 걸 작은 거인을 통해 배웠고, 그를 닮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손은 습관처럼 움직인다. 눈에는 히나타의 세 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이 유독 잘 들어왔고, 손이 공이 닿는 찰나 이후 히나타의 손가락을 스치듯이 건들고 높게 날아간다.
"원터치-!!!"
"내가 받을게!"
보아하니 히나타가 이미 말해뒀는지, 후위 선수 중 한 명은 평소보다 뒤에 자리 잡고 있다. 완벽한 플라잉 리시브. 꽤 높고 멀리 날아갔는데도 불구하고 잡힌다. 그리고 저 괴물 세터는 불안정한 리시브를 정비하지도 않고 바로 받아 올리는데, 정확히 4번 스피이커에게 날아간다. 하지만 거기엔 이미 타케루가 가 있다. 히나타에게 다시 올릴 수도 있지만, 지금은 히나타가 미끼로 쓰일 만한 타이밍이다. 킬 블로킹. 공이 손에 맞고 바닥에 떨어진다. 정확한 블로킹 타이밍, 손끝까지 준 힘. 히나타는 손가락 힘이 약한 편이라 킬 블로킹만큼은 아직도 미숙해, 그걸 보며 손가락 윗몸일으키기를 더 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한다.
로테이션을 하는 배구의 특성상, 둘이 공중에서 직접 겨루는 일은 듀스까지 끌고 간 팽팽한 세트에서도 생각보다는 많이 없다. 또한, 둘 다 눈은 공과 코트 위에 있는 사람들만을 쫓았기에, 둘 사이의 불꽃 튀는 라이벌전은 서로를 쳐다보지 않을 때 서로의 아우라 사이에서 더 도드라진다. 간혹 블로킹-스파이크를 하려 점프한 이후 공중에서 눈에 마주치며 중력에 의해 내려갈 때는 소름이 돋는다. 식은땀이 난다. 공은 상대방 코트에 떨어지기를 바라면서도, 경기는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아무리 쟁쟁한 프로 강호 팀이라도 국가대표는 역시 국가대표다. 모든 세트를 듀스까지 끌고 갔지만 결국 2-1로 국가대표가 이긴다. 하지만 작은 거인으로서의 대결은 막상막하라 우위를 가릴 수 없다. 아직 서브에서는 타케루의 점프 서브가 히나타의 점프 서브보다 위력도 더 강하고, 히나타와는 달리 타케루는 요새 점프 플로팅 서브 맹연습을 하는 중이라 꽤 높은 득점률을 자랑한다. 리시브에서는 스플릿 스텝을 이용한 히나타의 기막힌 운동신경이 슈퍼 리시브를 한 번씩 이뤄내지만, 전체적인 상황 판단력은 나카시마도 뒤지지 않는다. 공중전에서는 여전히 각도를 주 무기로 이용하는 타케루에 비해 히나타가 공을 더 잘 잡아내므로 히나타가 우위지만, 블로킹은 타케루가 더 견고하다. 아직 갈 길이 멀었어. 둘은 같은 생각을 하며 경기를 끝마친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 같이 인사를 한 후에서야 타케루는 겨우 히나타와 얘기를 할 기회를 잡는다.
"나카시마상, 수고하셨습니다!"
"히나타군도 수고했어요."
에엣. 히나타의 표정에 당혹감이 스친다.
"말 편하게 해주세요!"
고등학교 때 다른 학교의 선배들이 히나타에게 반말하는 건 익숙하다. 국가대표에서도 팀원들끼리는 모두 반말을 쓰는 만큼, 타케루의 존댓말은 두 배로 낯설다. 나카시마는 잠깐 고민하다 마음을 굳힌다.
"그렇게 할까?"
"네!"
"그럼 너도 편하게 해."
"힉!"
"정말로."
"하지만..."
눈이 데굴데굴 잘도 굴러간다. 카라스노나 국가대표가 위계질서가 강한 곳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히나타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
말하고도 약간 아차 했을만한 멘트였지만, 그래도 뜻만 전해졌으면 된 거지.
"저랑요?"
진심으로 놀란 눈치다.
"응! 둘 다 목표가 같잖아?"
히나타는 타케루를 항상 라이벌로만 생각했었다. 코트 너머에서 마주치는 상대이자, 같은 목표를 두고 싸우는 라이벌. 실제로 나카시마가 저렇게 웃는 것은 처음 본다. 타나카 선배, 어쩌면 니시노야 선배를 떠올리게 하는, 익숙한 느낌이 드는 듬직한 웃음. 히나타는 어느새 따라 웃고 있다.
"으음- 하지만 저는 선배들에겐 존댓말이 익숙해서요! 대신에 타케루상이라 불러도 돼요?"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큰 수확이다.
"그럼! 히나타 편한 대로 불러!"
"그럼 타케루상이라고 부를게요! 타케루상, 오늘 저녁에 바쁘세요?"
이번엔 나카시마가 당황할 차례다.
"아니, 딱히 없어! 왜?"
"앗, 그럼 저랑 좀 더 연습하고 저녁 드실래요? 블로킹 배우고 싶어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어보는 히나타의 부탁을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 타케루는 결국 팀원들에게 먼저 가라고 말하며 보호대를 다시 착용한다.
1:1로 연습하니까 히나타의 운동신경이 얼마나 놀라운지 새삼 깨닫는다. 마음 착한 매니저가 공을 올려주면 둘 중의 하나가 스파이크를, 다른 한 명은 블로킹하는데, 히나타는 길을 보여주고 막는 것도 의식해서가 아니라 손이 공을 따라 저절로 움직이는 듯하다. 히나타를 지켜보면 저 아이의 몸은 모든 세포가 공에게 이끌리는 것이 분명하다는 비현실적인 생각마저 할 만큼 히나타는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본능에 따라 공을 갈구한다.
갈구. 공을 조금이라도 더 만지고 싶어 하며, 공을 만지는 순간은 그 기회를 가장 잘 살려내고 싶고, 네트를 건너오는 순간부터 다시 넘어가는 순간까지 어디에서도 떨어트리지 않겠다는 집념.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고 털이 쭈뼛 설만큼 품기는 위압감과 존재감은 그 집념을 온몸으로 뿜고 있어서가 아닐까. 타케루는 예나 지금이나 히나타와 네트 건너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 가장 짜릿하다.
"타케루상 대단해요-!!"
네가 더 대단해. 말해봤자 믿지 않을 것 같은 눈빛이라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꿀꺽 삼킨다.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니 특유의 칭찬 릴레이가 시작됐는지 재잘재잘 듣기 낯부끄러운 얘기들을 늘어놓는다. 아까 블로킹은 어떻게 한 거예요? 타케루상은 어떻게 그렇게 높이 뛰어요? 막 막 발 어디에 힘줘요? 전 아직도 휙- 하는 느낌이라 카게야마가 혼내는데, 타케루상은 쿵- 해요!
"히나타가 더 작은 거인 같던데?"
진심이다. 히나타의 공중전은 예전에 동경하던 그 뒷모습을 닮았다.
"아직 작은 거인도, 타케루상도 따라잡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이긴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작은 표현 하나에도 배려심이 넘치는 아이. 히나타는 가끔, 코트 위에서는 위압감을 내뿜는 만큼 코트 밖에서는 다정함을 풍기는 아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앞으로도 같이 연습할까?"
둘은 마침 서로에게 부족한 점을 보완해줄 수 있다. 잘 보이는 눈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타고난 재능이지만, 히나타의 경우는 또한 경기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도 이제는 연습을 통해 누구보다 능숙하다. 또한, 히나타만큼 동체시력이 좋은 사람과 블로킹을 연습하는 것은 흔한 기회가 아니다. 히나타의 경우에는 더 높게 뛰는 법을, 아직도 종종 실패하는 리바운드를, 그리고 킬 블로킹을 배울 수 있다. 그렇기에 둘은 그 이후에도 한 번씩 만나 연습하기 시작한다. 다행히도 연습을 쉬는 날이 겹쳐 낮에 만나 오버 워크 방지를 위해 저녁까지만 하던 연습이 어느 순간부터 데이트 비슷한 것으로 바뀌어 낮에 만나 점심을 먹고, 근황을 나누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배구를 하고 저녁까지 먹고 헤어지는 것으로 변질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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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나타, 말은 언제 놓을 거야?"
같이 연습하기 시작한 지 벌써 반년이 지났다. 그동안 온갖 얘기도 했고, 의외로 주당인 히나타랑 술도 마셨고, 친해질 만큼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히나타는 아직도 존댓말을 쓰고 있다. 실은 나카시마는 존댓말이든 반말이든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깨달은 것은 타케루는 작은 거인을 빼더라도 히나타에게 많은 관심이 있다는 사실이다. 히나타가 국가 대표에 들어가기 전, 미야기에 둘 다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히나타의 생각을 자주 한다. 분명 라이벌인데, 같은 목표를 가진 선의의 경쟁자이자 코트 너머의 적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알려주고 싶고, 더 같이 연습하고 싶으며, 함께 발전하고 싶다. 함께. 그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관계일지도 모르지만, 나카시마는 둘 사이의 함께라는 말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모를 수가 없었다. 자신의 관심은 이미, 아마 아주 오래전부터, 애정과 사랑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히나타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직도 알 수 없어서 가끔 답답할 때가 있다. 분명 친한데, 히나타의 친화력은 원체 대단한지라, 나카시마에게 히나타는 큰 의미가 있더라도 그 반대가 성립되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그래서 평소엔 신경 쓰지 않을 존댓말에도 괜스레 의미부여를 하게 된다.
"타케루상이 요비스테하면요!"
응?
예상하지 못했던 반격에 살짝 놀라자 히나타가 사람 좋게 웃는다. 타케루상도 당황을 하시는군요! 꽤 오래 매주 만나더라도 타케루가 놀라거나 당황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라, 히나타는 타케루의 새로운 면모를 배운듯하여 미소가 번진다.
"그래도 괜찮아?"
"당연하죠!"
하지만 몇 번 더 있었던 친선경기에서 히나타에게 요비스테 하는 사람은 국가대표팀 내에서도 몇 안 됐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항상 자신이 먼저 다가가는 쪽이고 히나타는 배구가 좋아서, 또는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따라오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본다.
"쇼요."
겨우 두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데 나카시마의 목소리는 조금 더 굵직하고 낮다. 히나타는 그 목소리를 항상 부러워했다. 그리고 그가 그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면 목부터 빨개지는 건 왜일까, 히나타는 아직도 자기 자신을 모르겠다고 문득 생각한다. 어쩌면 예전부터 알 수 있었을 텐데, 타케루가 무심하게 대해서 아직도 몰랐던 걸까. 겨우 한 번 경기해본 주제에 운명의 상대라도 찾은 것처럼 내내 생각났었다. 라이벌. 나와 다시 겨룰 사람, 다시 작은 거인에 대한 동경을 성화로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마주칠 사람. 그와 동시에 같이 있고 싶은 사람. 아직도 종종 응원하러 오는 그의 가족들은 여전히 흥이 넘치고 열정적이어서 그런지 나카시마는 언제나 침착해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팀이 위기의 상황이어도 오이카와처럼 공격하는 서브를 넣는 정신력과 주장으로서 팀원들을 북돋아 주고 탄탄한 실력으로 받쳐주는 것은 다이치를 생각나게 했다. 여러 주장의 장점을 고루 가진, 견고한 반석 같은 사람. 히나타는 나카시마 타케루를 동경했고 동경한다. 닮고 싶다. 그래서 굳이 매주 나카시마랑 만나 연습을 하고 밥도 먹는 것인데, 타케루는 저를 그저 같이 연습하는 친우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히나타도 그 정도로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꾹꾹 눌러왔던 마음이 저 두 글자에 터져버린다. 좋아해요, 좋아해요. 오랫동안 생각했어요, 당신을.
"타케루상."
"왜, 쇼요?"
"좋아해요."
멋없는 고백이다. 불 품 없이 빨개졌을 것이 뻔한 볼과 눈을 마주치기 두려워 숙인 고개, 불안을 숨기지 못하고 꼼지락거리는 두 손과 아파지는 배. 이보다 더 예쁜 말도, 더 준비된 말도 많았을 텐데, 왜 나는 생각한 걸 바로 말해버리는 거지. 한동안 대답이 없으니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들자 처음 보는 나카시마의 붉어진 얼굴과 마주친다.
히나타는 긍정적인 사람이다. 배구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고 꿋꿋이 연습하여 작은 키를 가졌음에도 국가대표가 됐고, 주위 사람에게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나눠주어 이름이 잘 어울린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런 히나타가 자신에 대해 비관하는 것은 딱 하나다. 연애. 남들은 다 되고 나만 안된다는 그놈의 연애. 히나타는 짝사랑에 익숙한 사람이다. 제가 좋아했던 사람은 항상 제 옆에 있던 사람들을 좋아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히나타를 좋아해 줬던 사람들은 히나타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었을 때만 나타났다. 예의가 아니니 정중하게 거절한 후 마음을 키웠어도 히나타의 사랑은 히나타를 되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히나타는 항상 신기했다. 내가 남을 좋아하고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하는 일은 실은 기적이 아닐까, 그 기적이 나에게 일어나기는 할까. 그렇게 거진 포기에 가까운 삶을 살아왔다. 그러다 이번에 처음으로 사랑을 만났다. 그래서 히나타로서는 이 인연이 더욱 소중하다. 어쩌면 작은 거인이 맺어준 인연, 배구로 엮인 인연, 그리고 이제는 함께 하고 싶은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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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요, 연습은 잘했어?"
"네! 블로킹 연습했는데, 킬 블로킹이 많이 늘었어요! 오늘은 무려 다섯 번이나 성공했다고요! 맞다, 리바운드도 늘었다고 코치님이 칭찬해주셨어요!"
매일 보고 싶지만, 강도 높은 연습이 끝나고 나면 만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니 연습 전에 로드워크를 중간지점에서 만나 같이 하고, 연습 후에는 보고 싶은 마음을 전화로 달랜다. 신 나는 히나타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 타케루는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사랑스러운 내 쇼요. 타케루는 아직도 모든 것이 꿈은 아닌지 의심한다.
"연습하다가 다친 곳은 없고?"
요새 블로킹 연습만 죽어라 하는 히나타라 손가락에 무리가 갈까 봐 걱정된다.
"없어요! 전혀! 타케루상은요?"
반대로 이쪽은 점프 플로터를 목표로 점프 서브만 하루에 몇백 번을 연습해서 무릎이 걱정된다.
"없어! 그래도 코치님이 하루에 너무 많이 뛰면 안 좋으니 오늘은 리시브 연습도 더 했어."
"에엑- 타케루상 리시브는 이미 완벽한 거 아니에요?"
진심 어린 놀람에 쑥스러움이 물밀려 온다.
"그럴 리가. 오늘은 블로킹 지원을 많이 연습했어."
"타케루상 멋져요-!!"
"쇼요가 더 멋진데?"
"둘 다 멋진 걸로 해요!"
히나타의 이런 면이 좋다. 저 말 다음에는 블로킹 지원에 대한 질문이 쏟아지고, 나카시마는 익숙하게 하나씩 대답한다. 배구를 이제 제법 오래 했지만 히나타는 늘 호기심이 많고 언제나 발전할 곳을 찾아낸다. 블로킹 지원! 멋져요! 아마 히나타는 내일이면 팀원들에게 달려가 블로킹 지원을 연습하자고 물어볼 것이다. 무릎 보호대가 다 낡아 떨어지도록 연습할 성격이다, 쇼요는. 코스를 워낙 잘 읽고 블로킹 위치 파악도 빠른 히나타니 팀의 수비력이 한 층 올라갈 거다. 한 달 뒤인 히나타의 다음 경기쯤이면 이미 경기 중에 몇 번 사용하여 떨어졌을 공을 다시 위로 띄워, 모두에게 원래는 오지 않았을 소중한 기회를 안겨줄 것이다. 흡수력이 빠른 히나타를 위해 친절하게 설명한 후 다음에는 어떻게 같이 연습할지 고민한다. 물론 히나타와 함께. 휴일의 배구 연습, 둘에게는 데이트. 특별한 순간인 만큼 보통은 둘만 만나지만, 다음번엔 친구라도 몇 명 불러야겠다고 다짐한다. 히나타를 위한 플레이를 구상하는, 그의 오래된 습관. 히나타에게 타케루가 히나타만을 위해 코치가 된 듯 구상한 최적의 블로킹 지원 연습을 말하자 벌써 들뜬 히나타는 어서 다음 쉬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한다.
배구를 사랑하는, 작은 거인을 동경하는, 내 히나타 쇼요.
나카시마 타케루는 히나타와 함께하는 오늘이 배구만큼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