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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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한림 (@shoyo_right)
독서 부에 가입하면 부활동 시 매번 초코파이와 초콜릿 맛 우유를 준다는 작은 글씨를 발견한 히나타 쇼요는 12년 된 친구, 보쿠토 코타로의 배구부 매니저 자리도 마다하고 냉큼 가입했다. 배구부 매니저도 간식을 주긴 하지만 잔심부름을 해야 하고, 더운 여름날 땀 냄새 나는 체육관에 있어야 한다. 반면 독서부는 계절과 상관없이 더우면 에어컨 바람 아래 책을 읽으면서 간식을 먹을 수 있다. 합리적인 간식이다.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 된 학생의 머리에서 나온 유치한 생각이다만 쇼요는 전력을 다해서 계산하고 또 계산해서 내린 결정이다. 독서부 가입서 하단에 있는 서명란에 시원하게 사인을 마치고 알게 되었다. 독서만 하는 것이 아닌 독서일기, 독서토론 같은 쇼요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배구부 매니저를 하고 코타로 간식을 뺏어 먹을걸 후회해도 늦었다. 여름방학, 겨울방학 독서일기를 쓸 때만 하는 수 없이 권장도서목록 1~5번째 책을 인터넷에 검색해서는 한글파일에 복사해서 붙이고, 겹치는 부분만 지우는 나쁜 짜깁기를 해왔다. 그런 쇼요에게 책을 읽으라니. 지금 당장에라도 부서가입을 철회해야 하나 몸을 낮추고, 양옆으로 눈알을 굴릴 때였다. 하얀색 미닫이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부장이라는 삼 학년 선배가 들어왔다. 시선이 확 몰리자 난감하다는 듯 오른손으로 얼굴을 긁적이는 그에게서 풋풋한 소년의 향기가 났다. 왜 자꾸 쳐다봐, 짧은 반말은 처음 본 상황에서도 익숙하게 만들었다. 그런 모습을 쇼요의 시선은 자석처럼 따라붙었다. 왜 자꾸 쳐다봐, 라는 흔한 말이 심장에 박혀서 우물쭈물 선배의 곁을 맴도는 날이 많아졌다. 책 한 장 읽고, 문자 보내느라 느려터진 책 읽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공원에서 코타로와 노는 시간이 확 줄었다. 커다란 손으로 배구공을 잡아서 쫓아와도 별수 없는 일이다. 지금이라도 배구부 매니저를 쫓아낼 테니 배구부로 와달라 바닥에 발랑 누워버린다. 마지막 작가의 후기를 읽어 내려가던 것을 멈추고, 책을 접은 곳 사이로 검지를 넣어 책갈피를 대신한다.
「독서부 재수 없어.」
「배구부도 재수 없으니까 닥치시지.」
「흥.」
키가 180cm가 훌쩍 넘는 고교생의 입에서 흥이라니. 쇼요는 오늘 밤 잠들기 전에 눈과 귀를 꼭 닦고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쇼요의 짝사랑은 물러터진 성격대로 지진 부진이다. 좋아해요! 엄청나게 좋아해요! 이런 걸 제 가슴에 써대고 있으니 알아주는 이가 없다. 선배가 읽고 있는 잡지에 시선을 보낸다. 소리를 죽이고, 죽인 시선을 알아차릴 리 없다. 선배의 옆에 있던 친구와 재잘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난 살찐 사람 싫어. 자기 관리 못 한 것 같잖아. 다이어트 정도는 정상지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잖아.
선배의 말이 한 글자씩 마음에 상처를 내고 지나간다. 쇼요는 다가가기를 멈추고 자리에 앉았다. 열 손가락을 쭉 핀 통통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뼈마디보다 튀어나온 살집이 우울하게 만들었다. 손만 살이 쪘을까. 입학하면서 맞춘 조끼는 작아서 1학년 1학기 이후로 입은 적이 없다. 대신 무지 후드를 입에 걸쳤고 안에 입은 셔츠는 세 번째부터 풀려있다. 허리선 위로 볼록 솟은 뱃살까지. 짝사랑하는 상대가 혐오하는 것이 전부 자신이라니. 눈물도 나오지 않을 만큼의 우울이다. 살찐 것 자체가 싫다고 하면 어떡해야 해. 볼 안 연한 살이 헤지도록 씹어대다가 집에 왔다.
현관문을 열자 물밀 듯이 밀려오는 달콤, 짭조름한 음식 냄새. 냄새만으로도 몇 가지 반찬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달걀 장조림, 알 감자조림, 으, 쇼요가 좋아하는 간장이 들어간 반찬이다. 까딱하면 시작도 안 한 다이어트를 끝낼 수 있어서 주방에서 반찬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는 어머니에게 후다닥 말을 했다.
“저 오늘부터 저녁밥 안 먹어요.”
“‘다녀왔습니다.’가 먼저 아닐까, 쇼쨩?”
쇼요는 현관입구에서 슬리퍼를 신는 사이 주방에서 나온 어머니가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곧장 방으로 들어가려던 방이 어정쩡하게 붙잡혔다. 쇼요를 바라보는 고용한 눈빛에서 잘못을 알아차라고 납작 엎드린다.
“죄송해요.”
“그래. 일단 방에 가서 쉬어라.”
네, 들릴 듯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쇼요는 방으로 향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하루에 지친 쇼요는 옷을 벗어 정리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손이 가는 대로 의자 위에 재킷과 조끼를 쌓는다. 재킷의 팔이 훌떡 안으로 말려 들어가도 못 본체하고 만다. 가방은 문 열면서부터 벗어서 문 옆에 놨다.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는 쇼요에게 책가방은 남들 다 매고 다니니까 들고 다니는 것 중 하나라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샤워하지 않은 몸을 침대로 올리기 찝찝해서 청소기 돌린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방에 눕는다. 하루 중 누워있는 시간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봐라. 지금도 이불도 펴지 않은 날바닥에 누워 동그란 몸뚱이를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고 있다. 에잇. 신경질이 나서 몸을 일으키려고 해도 사뿐히 일어나질 못하고, 다리를 한참 버둥거려야 한다. 구부정한 등 덕분에 뱃살에는 연한 분홍색 주름이 자릴 잡은 지 오래다. 자세 탓이라고 하기엔 배가 너무 앞으로 나왔다. 일정한 규칙을 가진 벽지 무늬를 세던 쇼요는 문득 자신이 언제부터 뚱뚱했는가에 대해 생각해본다. 갑자기 살이 확 찐 것이 아닌 야금야금 개미가 커다란 과자를 갉아 먹듯 오랜 시간 진행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시점을 알아내는 것은 무리다. 거실 입구에 나란히 놓인 세 개의 액자 중 두 개는 쇼요의 것이다. 살집이 없고 뽀얀 쇼요의 모습, 다시 봐도 예쁜 일곱 살이라고 했다. 그 이후로 살리 불었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지 않아서 한 장도 없다.
짜증나 죽겠네. 이게 다 코타로 잘못이다. 원래 쇼요는 코타로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잘한다. 그래도 이건 명백하게 코타로의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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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요가 일곱 살 무렵에 코타로의 옆집으로 이사를 왔다. 어머니들끼리 골목에서 만나서 나눈 짧은 대화에서 옆집에 쇼요와 동년배의 아이가 산다는 정보를 얻었다. 어머니는 소파에 널브러진 쇼요의 궁둥이를 두들겨서 억지로 일으켰다. 잠이 가든 눈을 문지르는 손에는 쿠키와 주스를 두 개를 쥐어서 옆집으로 보냈다. 까치발을 세워야 눌러지는 초인종. 한 번 더 누를까 고민하는 사이 어린 남자아기가 대문을 열어주었다. 마당에서 놀던 참인지 손에는 장난감이 들려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옆집으로 이사 온 쇼요입니다.」
「어머, 귀여워라. 네가 옆집에 이사 온 쇼요구나. 시간 괜찮으면 놀다 가지 않을래?」
쿠키와 주스만 내려놓고 도망가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난 보쿠토 코타로, 코타로 형이라고 불러.」
겁먹은 쇼요에게 친절하게도 어떻게 부르라고까지 알려준 코타로는 손을 먼저 내밀었다. 같은 유치원이라고 했는데, 그럼 나이가 같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은 뜨끈하고 모래알이 남아서 까슬 거리는 손을 잡자 사라졌다. 햇볕을 가려주는 차양 아래서 하는 로봇 놀이는 즐거웠다. 지는 태양이 야속할 만큼. 코타로는 정말 형이라도 되는 것인 양 집 앞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갔다. 다음날 유치원에 간 쇼요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배신감을 느꼈다. 맨 앞자리 다리를 달랑거리고 있는 코타로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온종일 형아, 형이라고 부른 쇼요는 눈을 사납게 뜨고 흘겨보자 안절부절못하며 뒤를 쫓았다.
「쇼요, 미안해. 난 내가 형인 줄 알았지!」
그러게 누가 그렇게 귀엽고 작으래. 툴툴거리다가 간식으로 나온 바나나 파이와 흰 우유를 내밀었다. 딱 일곱 살 코타로가 할 만한 생각이다. 이거 너 삐쳤으니까 먹어. 입술이 한자는 내밀고,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있던 쇼요는 마지못해 과자와 우유를 받아들었다. 작은 손으로 파이를 반으로 잘라 한입에 밀어 넣었다. 분홍색 입술 위에 부스러기를 붙여놓고 입을 우물거리는 게 귀여워서 코타로는 쇼요의 맞은 편 바닥에 앉았다. 뒷목이 뻐근해질 때까지 고개를 쳐들고는 오물오물 움직이는 입 모양을 지켜봤다.
「너 먹는 것도 엄청 예쁘다.」
순수하게 감탄을 한 코타로는 볼이 발그레해져서는 아예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쇼요의 작은 책상 위에 꽃받침을 하고 바라본다. 같은 남자애한테 받는 과한 관심에 쇼요도 얼굴이 빨개졌다.
「왜 자꾸 쳐다봐아.」
말을 길게 늘인 쇼요가 코타로의 손을 슬쩍 밀어냈다. 워낙 유치원 대표 건강체인 코타로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 이후부터 코타로는 맛있는 것이 나오면 무조건 쇼요에게 달려갔다. 이건 초콜릿 무스 케이크, 이건 에그 타르트. 살은 소리 없이 불어났다. 뽀얀 볼에 살이 붙고, 분홍빛이 물드니 코타로는 그게 또 예쁘다고 온종일 만지작거리다가 멍이 들게 하는 일도 있었다.
18년간 먹어온 저녁이 전선 끊듯이 꼭 끊어지지 않았다. 마음먹은 대로 굶어지면 이게 다이어트일까. 지금껏 살찌는 다이어트만 했던 쇼요의 위는 격렬하게 날뛰었다. 기운이 없어 침대까지 일어나지도 못하고 모로 돌아누웠다. 비어버린 위는 꼬르륵, 꼬르륵 한껏 성이 나서 항의 중이다. 반대쪽으로 돌아누워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침대에서 이불을 끌어 내린 쇼요는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쓰자 외부의 소리가 차단되어 더 크게 들렸다. 제발 조용히 자자. 성난 위를 달래는 다정한 손동작. 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대고 따뜻한 손으로 문지른다. 소용없다. 한층 더 높아진 꼬르륵 소리로 음식을 넣어주기 전까진 물러서질 않는다는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잠을 청해보려 눈을 감아도 위가 텅 비어서 도리어 잠이 깼다. 불을 켜지 않은 방안엔 어둠이 짙게 깔리는데 그럴수록 쇼요의 정신은 또렷해져만 간다. 생각하는 거라곤 다이어트가 끝나면 뭘 먹을까. 하는 소소한 생각뿐이다. 밥 들어올 시간은 지나고, 머리는 맛있는 음식을 떠올리니. 위액이 분비되어 속이 아프고, 쓰렸다. 참다못한 쇼요는 휴대전화에 버튼을 꾹꾹 눌러서 가장 믿을만한 아니, 만만한 코타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배고파.”
“연습 끝나고 맛있는 거 사갈까? 고기만두?”
해맑은 목소리가 들리자 쇼요의 눈에 눈물이 한가득 차올라서 넘실거렸다. 뒤에 나온 고기만두 탓이 절대 아니다.
“네가 과자만 안 줬어도 내가 살 뺀다고 이 고생은 안 하잖아. 크흡.”
빽하고 소리를 지른 쇼요는 콧물만 훌찌락 거렸다. 말간 콧물은 훌찌락거리거나 말거나 주륵 타고 흘러 분홍색 입술을 적신다. 코타로는 귀를 꽂힌 고함에 얼떨떨했다. 여태껏 살이고, 다이어트고 관심도 없었던 쇼요가 이 문제로 화를 내니 더 당황스러웠다. 그를 달랠 방법을 찾다가 집 근처에 있는 제과점을 떠올랐다. 뭘 좋아했더라? 빵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먹는 쇼요다. 조그만 게 드럽게 까다로워서 계절마다, 시간마다 먹는 빵이 다르다. 겨울을 앞두고 있고, 저녁이니까.
“배고프다며. 만두 싫으면 타르트 사갈까?”
“사오기만 해. 죽여버릴 거야.”
짜증을 실컷 낸 쇼요는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바꿔놓고 저 멀리 밀어버렸다. 어두운 방 안에서 잠이 들려고 할 때 창 측에서 콩콩, 노크 소리가 들렸다. 코타로였다. 들어와. 코타로는 창문을 열고 오른 다리를 먼저 밀어 넣는다. 활짝 열린 창문 안으로 양말만 신은 발이 불쑥 들어온다. 늦은 밤 쇼요와 놀고 싶은 날이면 코타로는 창문으로 들락거렸다. 둘만 아는 작은 비밀이다. 쇼요의 옆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은 코타로는 전화를 끊고 나서부터 줄곧 궁금했던 것에 대해 묻는다.
“갑자기 웬 다이어트야?”
“선배가 살찐 사람한테는 정이 안 간대.”
“겉모습만 보는 사람이 뭐가 좋다고 이 고생을 해.”
코타로는 울어서 딸기찐빵이 된 쇼요의 이마를 찰싹 때린다. 소리만 클 뿐, 손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 있다.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던 쇼요가 코타로를 가만히 올려보다가 작게 꽁시랑거린다.
“너도 살찐 사람은 싫을 거 아냐.”
“아닌데.”
“거짓말.”
배고파서 씻을 기운이 없다는 쇼요에게 기분전환을 들먹이며 억지로 방밖으로 내쫓았다.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쇼요의 말에 꼼짝도 않는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슬슬 일어나서 의자에 휘감아 놓은 재킷과 조끼를 주워서 옷걸이에 걸어놓는다. 뿌리라고 놓은 페브리즈 몸통엔 먼지가 뽀얗게 쌓였다. 이그. 휴지 두 칸을 끊어서 대충 먼지만 닦아내고 앞, 뒤로 흠뻑 뿌린다. 회색 재킷의 색이 더 진해지자 만족스럽게 건다. 그리고 빈 옷걸이를 찾아 입고 온 져지를 벗어서 나란히 놓는다. 그다음은 쇼요의 방 안을 구경한다. 쇼요의 방엔 코타로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크리스마스카드를 쓴다고 반짝이 풀을 벽에 문대놓은 것도 그대로다. 선물로 준 스노우볼은 글리터가 가라앉아있어 한번 흔들어준다. 네 주인이 너를 잊은 모양이야. 그렇지? 그렇다고 너무 서운해하지는 마. 알았지. 알아 들을 리 없는 차가운 유리구를 위로한다.
수건을 목에 걸친 쇼요가 들어온다. 욕실에서 말린 머리칼이 부스스하다. 손에 오십 원 크기의 로션을 쭉 짜서는 위아래로 두 번 왕복하고 끝이다. 바르기 시작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코타로와 함께 침대로 올라간 쇼요는 잠이 들만 하면 입을 열어 배고프다고 성화다.
“배고파.”
“라면 끓여 먹을래?”
라면이라는 말에 코끝에 자극적인 향기가 나는 듯해서 쇼요는 코를 막고 코타로를 흘겨봤다. 이게 진짜.
“너 진짜 죽을래?”
“배고프다고 하면 더 배고프니까 눈 감아.”
코맹맹이 소리로 위협을 해봤자 하나도 무섭지 않다. 커다란 손으로 눈을 가리자 또 순하게 눈을 감는다. 옳지. 이제 자자. 눈을 감긴 손을 내려 쇼요의 납작한 가슴팍 위에 대고 토닥거리자 얼마 있지 않아 도롱, 도롱 편한 숨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코타로도 눈을 감는다. 늦게 눈을 뜬 코타로는 혼비백산해서 져지를 손에 쥐고 창문을 넘었다. 쇼요가 학교에 가려고 나왔을 때 교복에 구두까지 챙겨 신은 코타로가 인사를 했다.
밥을 굶는 건 효과가 좋았다. 일주일 동안 3kg이나 빠졌다. 그 이상은 무리라는 듯 체중계의 바늘은 변화가 없다. 불타던 다이어트 의지가 사그라질 무렵 코타로는 뜻밖에 간단하게 답을 준다.
“같이 운동하자.”
“무슨 운동?”
“아침에 운동 같이하자.”
아침마다 코타로와 쇼요는 집 앞에서 만났다. 운동이란 걸 모르고 산 쇼요는 코타로가 운동하는 코스의 절반도 가지 못했다. 중간에 멈춘 쇼요가 스트레칭을 하는 사이 코타로는 정해진 코스를 끝까지 뛰어온 코타로와 함께 돌아갔다. 두 달 가까이 하루도 거르지 않자 살이 많이 빠졌다. 교복 바지가 헐렁해져서 세탁소에 수선을 맡기고 돌아왔다.
선배를 위한 목도리와 카드를 쓴 쇼요는 선배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괜히 눈에 띄었다가 미움만 살까 두려워서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니 당연히 모를 만도. 선배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몇 번 스치듯 본 적 있는 후배의 얼굴을 기억해내려다가 재킷에 수놓아진 이름을 슬쩍 본다.
“히나타군? 맞지?”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고마워. 너도 메리 크리스마스”
눈빛에서부터 쇼요를 모르는 것이 느껴졌다. 왼쪽 가슴팍에 짧게 머물던 시선도. 어물쩍 웃는 얼굴도. 모든 것이 상처가 된다. 열심히 가진 모든 에너지를 쏟아도 상대는 모르는 게 당연하잖아. 나 혼자 좋아한걸. 쇼요는 마음을 추스른다.
“근데 쟤 누구야?”
“걔 있잖아. 그 살 엄청 뺀 애.”
“아, 그래?”
감흥 없는 목소리는 아물지 못한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혼자하는 사랑이 다 그렇다지만 이번엔 유독 아프다. 내내 책상에 엎드려있던 쇼요는 삼 학년 교실을 얼쩡거렸다. 대답이나 들을 수 있을까, 거절이라도 확실하게 들으면 나을 텐데. 혹시 평생의 운을 다 써서 너를 좋아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헛된 희망을 품어보기도 한다. 이유 없이 들뜬 심장이 바닥에 내려앉는다. 처참하게 쓰레기통에 처박힌 선물이 눈에 들어왔다. 포장지를 선택을 못 해서 몇 번이나 점원을 귀찮게 했던 쇼요는 자신의 선물을 기가 막히게 찾았다. 쓰레기통을 뒤지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낮에 우유를 마시면서 빨대 껍질을 주머니에 그대로 둔 것이 거슬려서 버리려던 것뿐이었다. 하아. 쇼요는 눈물로 데워진 숨을 내쉰다. 머리가 하얗게 타버려서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다. 빨리 이 교실을 나가야 한다는 것도, 집으로 가야 한다는 것도. 눈물이 차올라서 더는 선물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 서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코타로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성큼 다가왔다. 잠시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표정에서 그가 느끼는 괴로움이 전달되었다. 왜 네가 괴로워하니. 쇼요는 묻고 싶었다.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깨물던 입술이 벌어졌다.
“왜 전화를 안 받아!”
“몰랐어...”
“걱정했잖아. 멍청아.”
혼이 쏘옥 빠진 상태에서 전화가 오는 지도 몰랐을 것이다. 코타로는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서 있을 힘도 없는 쇼요를 우악스럽게 잡아당기고 싶지 않았다. 너른 품을 열어 떨고 있는 작은 몸을 숨겼다. 익숙한 품에 안기자 억지로 잠가놓은 설움이 복받친다. 작은 어깨가 들썩거리자 낮은 목소리가 정수리 위로 떨어진다. 멍청아, 우리 멍청이. 나 멍청이 아냐. 크게 울음을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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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과 딸기의 조합은 언제 봐도 옳다. 달곰한 초콜릿의 맛은 상큼한 딸기가 잡아준다. 코타로는 그 둘은 자신과 쇼요라고 자신한다. 손에는 아이스크림콘을 쥐고, 눈이 내리는 거리를 걷는다.
“넌 선물 못 받겠다.”
“내가 왜?”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애한텐 선물 안 준대.”
재수 없는 소리를 저렇게 해대는지. 쇼요는 말할 가치를 못 느껴서 가운뎃손가락을 슬쩍 올려 보인다. 그런 얼굴로 욕 좀 하지 마. 손가락 욕은 욕 아니야. 그래? 긴 가운뎃손가락을 보니 제가 날린 욕보다 더 큰 것을 얻어먹은 것 같다. 재수 없어. 욕 좀 그만해. 자꾸 생각나는 걸 어떡해.
집 앞, 공터에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어린 쇼요와 코타로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놀이기구들은 남아있지 않다. 칠이 벗겨져서 삐거덕거리는 뺑뺑이, 정글짐, 미끄럼틀은 안전상의 문제로 철거당했다. 남은 건 플라스틱 소재의 딱딱한 의자가 달린 줄이 긴 그네다. 엉덩이 시리겠지? 쇼요가 코를 훔치며 묻자 코타로가 손을 잡아끈다.
“이렇게 하면 안 시릴 거야.”
코타로가 들고 다니는, 쇼요 전용 콧물 손수건을 깔아준다. 야, 이거 빨아야 하잖아. 뭐 어때. 네가 코 풀어도 빨아야 해. 재수 없어. 그네는 매우 낮았다. 쇼요의 발이 접힐 정도니 코타로는 아예 다리를 쭉 뻗었다. 저 멀리까지 뻗어지는 긴 다리. 놀이기구가 철거된 앞은 밟지 않은 흰 눈은 가로등에 의해 노스느름하게 보인다. 슬슬 일어날까 싶을 때. 코타로는 흰 눈을 응시하며 입술을 뗀다.
“널 좋아해. 저 눈보다 훨씬 더 많이.”
에이. 야유를 보내려던 쇼요는 진지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말을 삼켰다. 어디까지일까. 가늠되지 않는 감정의 깊이에 집으로 도망쳤다. 기껏 고른 케이크는 공터에 남겨두고 왔다. 정신없이 들어와서 현관문을 잠그는 쇼요에게 동네 변태라도 만났느냐고 물어왔다. 아니, 그게 아니라. 몸이 안 좋아서 먼저 잘게요. 할 말만 남겨놓고 방으로 들어온 쇼요는 창문을 걸어 잠갔다. 넌 오늘부터 내방 출입금지야. 커튼을 홱홱, 거칠게 잡아당기고 휴대전화로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부터 혼자 갈 거야.]
쇼요의 예상대로 코타로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 대문 앞에 기다리는 일도 없었다. 뭐야. 좋아한다며. 슬슬 짜증이 날쯤. 쇼요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 개자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코타로가 입이 닳도록 이상하다 말하던 선배의 조잘거림에 썩 처지가 난처해졌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느니, 카드에 뭐라고 적혀있었다느니. 조롱거리가 되어 삼 학년 교실로 모자라 이 학년 교실까지 내려왔다. 아주 짝사랑 정리에 도움을 주는구나. 쇼요는 뜻밖에 깔끔하게 마음 정리를 한다. 빌어먹을 코타로 자식만 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코타로를 찾아 체육관으로 향했다.
체육관 문 앞에 서 있는 코타로를 보고 이름을 부르려 했다. 그런데 공을 잡은 코타로는 누군가를 조준하고 있다. 눈은 한 곳을 뚫어져라. 응시했고, 매일 웃음을 달고 다니던 입은 일자로 다물어져 있다. 코타로의 시선을 따라갔을 땐 쇼요의 난처하게 만든 개자식이 걸려있다. 설마 하는 마음에 불안하게 볼 때. 이미 공은 코타로의 손을 떠났다.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스파이커 손에서 떠난 공은 선배의 머리를 정확하게 쳤다. 퍽. 지난여름 수박을 들고가다 아스팔트 바닥에 놓쳤을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하다. 저러다 사람 하나 잡지 않나.
코타로는 긴 다리로 잘도 걸어와선 선배의 셔츠를 반 바퀴 돌린 후 움켜쥐었다. 위로 잡아당기자 목이 끊어지기 싫은지 딸려 올라왔다. 커헉, 컥 하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손을 떼어내려 했다. 얼굴을 가까이 한 후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은 쳐다본다. 코타로의 얼굴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굳이 말을 하자면 분노일까. 감히 너 따위 버러지가. 바득바득. 살겠다고 코타로의 팔에 손톱자국을 낸다. 손에 쥐고 있던 것을 가볍게 흔들자 손이 힘없이 풀린다. 정신 차려. 할 말이 있으니까.
“한 번만 더 주둥이 놀려봐. 네 머리 똑 떼서 배구할거야. 알았어?”
코타로가 손을 놔주자 선배란 놈은 무릎으로 기어서 자리를 벗어났다. 일어나서 걸을 수 있는 직립보행의 기능을 상실한 네발짐승 같다. 그러게 내가 걔는 아니라고 했잖아. 저딴 버러지를 좋다고 하던 쇼요의 얼굴이 생각나서 헛웃음이 나온다. 굳이 나를 좋아해 주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저런 버러지라니. 코타로는 쇼요로부터 근신을 명받은 후부터 하루도 고민하지 않은 날이 없다. 고백을 후회하고, 시간을 돌리려 해도. 어쩔 수 없기에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시선을 들었을 땐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쇼요가 서 있다.
“집에 가자. 본관에서 기다릴게.”
쇼요가 등을 돌리고 앞으로 걸어나갈수록 머리는 텅 빈다. 동네 깡패같이 굴던 것을 보고 정떨어졌을지도 몰라. 체육관에 들어온 코타로가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웜업을 하고 연습을 해도 모자를 판에 손가락으로 바닥에 투명그림을 그리고 있다. 보다 못한 1학년 세터, 아카아시가 다가왔다. 연습하셔야죠. 아카아시, 나 이제부터 배구부 못 할지도 몰라. 그게 무슨 개, 아니 소립니까. 선배 머리에 배구공 던지고 멱살도 잡았어. 그래서 선배가 죽었습니까? 무릎으로 기어가던데. 그럼 학생부에 말 안 하겠죠. 여차하면 한 번 더 던져서 아예 싹을 도려내세요. 진짜? 그럼 감옥 가시겠죠. 오늘 연습할 상태가 아닌 것 같으니까 집에 가보세요.
얼결에 집에 가는 것을 허락받은 코타로는 구두를 질질 끌어서 쇼요가 있는 본관으로 걸었다. 이렇게 거절당하는구나. 어느 정도 체념을 하다가도 일말의 희망이 치고 올라온다. 위액처럼 시큼하고 따가운 희망. 코타로는 침을 삼키듯 안으로 욱여넣는다.
“그네 타자.”
코타로가 손수건이나 져지를 꺼낼 여유도 주지 않은 쇼요가 냉큼 그네 자리를 선점한다. 바닥에 끌리는 발을 아무렇게나 하고 싶은 대로 둔다. 고백했던 그네에 앉아서 거절을 당하다니. 코타로는 1분이라도 늦게 말을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 기도를 들어준 건지 모르겠지만 쇼요는 말을 아꼈다. 바닥을 보는 코타로는 덩치만 커다란 강아지로 보인다. 이리 와, 코타로! 하면 금방이라도 꼬리를 흔들며 달려올 것만 같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던 쇼요는 코타로가 앉은 그네의 줄을 확 잡아당겼다. 체격과 힘 차이가 크다 보니 쇼요가 끌려갔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코타로는 반사적으로 쇼요의 그넷줄을 잡아챘다. 작은 몸이 뒤로 휘청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다.
“다치면 어쩌려고!”
화를 내느라 몰랐는데 쇼요의 얼굴과 거리가 가까웠다. 그러니까. 발을 밀어 도망가려는 것을 줄을 꼬옥 말아 쥔 쇼요로 인해 실패했다.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사이, 쇼요의 입술이 다가왔다. 봄 벚꽃을 닮은 분홍색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다.
“좋아해. 눈보다 더 널 좋아할 수 있을진 모르겠어. 그렇지만 부지런히 널 쫓아갈게. 그래서 나중엔 내가 더 좋아할게.”
눈을 내리깔고 읊어대는 쇼요의 얼굴이 코타로에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오랜 시간 바라던 순간이라 숨을 쉬는 것도 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하다못해 알겠다는 말조차 뱉을 정신이 없었다. 무슨 말이든지 해야 해. 재촉하기 무섭게 코타로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말보다 행동이 먼저인지라 줄을 잡아당겼다. 가벼운 몸은 손쉽게 끌려왔고, 코앞까지 다가온 쇼요의 눈이 동그래졌다. 뽀얗고 하얀 뺨을 감쌀 여유도 없이, 그저 순수하게 자신의 입술로 쇼요의 입술을 꾹 눌렀다. 세상에서 제일 멋 없는 첫 뽀뽀를 마친 코타로는 하얀 이가 보이도록 입꼬리를 시원하게 위로 당겼다.
“절대 못 이길걸.”
그건 나중에 가봐야 아는 거지. 이제 가자. 가방을 챙겨서 먼저 일어난 쇼요의 뒤를 따라 걷는다.
“헤이헤이헤이! 쇼요!”
걸음을 멈춘 쇼요가 성큼성큼 걸어서 코타로의 앞에 섰다. 다시 한 번 뽀뽀를 해주려는 건가 싶어 눈을 감았을 때, 입술이 아닌 정강이에서 불같은 고통이 느껴졌다.